[오항녕의 인문학 에세이] 깡패 영화에 아이가 안 나오는 이유
▲ 기우였으면 …기우면 좋겠다. 말 그대로 기(杞)나라 사람의 걱정.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봐 걱정했다는 이야기가 「열자」(列子)라는 책에 실려 있는데, 모두 알다시피 기우란 '쓸데없는 걱정'이란 뜻이다. 그렇지만 아마 선우(先憂)란 말은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많으리라.후락(後樂)이란 말은 조금 익숙하지 않을까 한다. 이승엽 선수가 뛰고 있는 롯데 자이언트의 홈구장이 고라쿠엔 경기장인데, 이 고라쿠엔이 곧 '후락원(後樂園)'의 일본 발음이다. 초기 성리학자인 송나라 범중엄(范仲淹·989년 ~ 1052년)이란 분이 「악양루기」(岳陽樓記)서 "천하의 근심을 앞서서 근심하고, 천하가 모두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했는데, 이 말에서 '선우'가 나온다. 이후 세상을 정신 차리고 살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좌우명이 되었다.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 나의 걱정이 미리 하는 걱정이 아니라, 쓸데없는 걱정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왜 애가 안 나오는지 알아?새삼스럽게 내 머릿속은 한참 지나간 영화, '넘버 3'의 한 장면으로 차 있다. 송능한 감독의 '넘버 3', 깡패로 한석규가 나오고, 하는 짓은 깡패 같지만 뜻은 검사다웠던 검사로 최민식이 나왔다. 그리고 깡패 한석규의 애인은 이미연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 어느 부분에선가, 이미연과 한석규가 다투는 장면이 나온다. 깡패 생활을 그만두라는 이미연의 말에 한석규는 짜증부터 낸다. 그럼 뭐하고 사느냐는 거다. 그럴 만도 하다. 할 줄 아는 게 깡패인데, 그만두면? 이때 이미연이 한방 날린다."너, 깡패 영화에 왜 어린애가 안 나오는 줄 알아?"생각은 하지만 답은 모르는 표정으로 한석규가 바라보자, 이미연은 비웃으며 내뱉듯이 한마디 던진다."그건, 깡패에겐 희망이 없기 때문이야, 이 새끼야!"그때까지 큰 소리 치던 한석규의 얼굴은 순간 당황한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건 이 장면이 거의 다다. 나도 이 순간 이 영화는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깡패 영화 안에서 '깡패 영화' 얘기가 나오니까 이상하기라도 하련만, 그게 이상하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사회는 애를 낳지 않으려고 한다. 출산률이 떨어져서 나이 많은 사람은 많아지고, 어린 사람들은 적어지고 있다.▲ 어떤 학생의 핀잔우석훈 박사가 쓴 「88만원 세대」를 사서 몇 쪽을 읽고 있었을 때, 우연히 한 학생하고 마주쳤다. "선생님, 이 책을 이제야 읽으세요?" 아니, 2~3년 된 책이긴 하지만 좀 늦게 사서 읽기로 서니, 뭐 그렇게까지 말할 게 있나 싶어 서운하기까지 했다. 딴엔 나도 열심히 찾아 읽으려고 하는 편인데 말이다. 그리고 난 88만원 세대가 아니다. 10대도, 20대도 아니고. 음, 그러고 보니, 내가 볼 책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 틈에 이 '88만원 세대'라는 현실이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 학생의 핀잔이 지극히 정당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불과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페이지 넘기면서 10대, 20대가 지금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착취당하고 있는지, 왜 저자가 '88만원 세대'라고 책이름을 붙였으며, 왜 그 말이 그토록 유행하게 되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40대, 50대 남자 중심의 경제 주도세력이 10대를 인질로 잡고 20대를 착취하는 형국이라고 했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우리 학생들을 착취하고 있다?!▲ 일상화된 세대 착취20대. IMF 1세대로, IMF 이전의 경제적 풍요를 누려보지도 못한 채 승자독식의 세계에서 무한 경쟁의 늪에 빠졌다. 그들은 경제 활동의 맨 밑바닥에서 생산과 유통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지만, 그에 적합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주변에서 보듯이 늦은 세대 독립(곧 결혼)과 경험 부족, 강요된 승자독식 게임으로 인한 획일성으로 장차 이들의 미래는 암울하다. 이들은 세대 내 경쟁에서 살아남더라도 윗세대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나 윗세대는 20대에게 양보하지 않기 때문에 경쟁에서 뒷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10대. 20대가 이른바 '인턴' 등의 가면을 쓴 비정규직 전면화의 피해자들이라면, 1318 마케팅의 희생양들이다. 3·40대가 중고등학교 때 흔히 보던 문학소녀, 소년들도 드물다고 한다. 이들은 경제능력에서는 20대보다 더 무기력하면서, 1318 마케팅의 소비자로써 과시적 소비 성향을 보인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알바'를 뛴다. 우리가 호프집, 레스토랑, 음식점에서 만나는 바로 우리 아이들이다.그런데도 이들에 대해 기성세대는 "불평만 많다," "아무 생각이 없는 주제에 반항적이다"라고 한다. 하지만 정말 이들이 기성세대에 반항이라도 하고 있는가? 천만에. 오늘날 한국의 10대 20대는 과도한 승자독식이라는 무서운 룰을 내면화하고 있으면서, 기성세대에 매우 순종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바늘구멍만한 생존기회를 기성세대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떤 인사들은 "너희들이 노력하지 않아서 취직을 못하는 것"이라고 꾸짖는(것 같지만 실은 조롱한)다. 이게 어른인가?▲ 기우일지도 …어떤 학생들은 「88만원 세대」가 10대와 20대의 주체적인 판단, 대응 능력을 무시하고 대상화했다고 비판한다. 이 세대가 수동적인 세대가 아니라, 자신들의 비전도 있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적극적인 자세도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형 할인점이 재래시장이나 동네 구멍가게까지 몰아내는 경제 현실, 사회 현실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국사회의 이기심과 졸렬함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기성세대보다 건강하다는 것이다. 우리 학생들을 보면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많은 증거가 있다.하지만 「88만원 세대」가 10대와 20대를 대상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처한 경제 상황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현상을 묘사한 것뿐이다. 당연히 현상에 대해서 인간은 '대응·적응'한다. 그 메시지의 취지만 이해하면 된다.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질문이 무의미하거나,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일 사람들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직 그 답이 늦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다시 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우리 아이들이, 학생들이 애를 낳고 싶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 문화전문객원기자(전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