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만난 작가] 이준호 소설가가 만난 소설가 윤홍길
선생은 언제나 조용조용 말씀하신다. 노여운 일이 있어도 어지간해서는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다. 선생의 작품도 그 목소리를 닮았다. 이야기를 들려주되, 주장하고 설득하기보다는 독자 스스로 이해에 이르도록 배려한다. 행여 독자들이 오해하고 곡해할까 봐 조바심내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작품을 통해서만 당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 방식은 작품 활동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결같다. 그래서 선생의 작품은 화학조미료를 듬뿍 넣은 음식점 갈비탕이 아니라, 오래 고아 우려낸 곰국 같다. 첫술에 미각을 확 사로잡아버리는 맛이 아니라 오래오래 음미해야 비로소 제 맛이 느껴지는.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작가가 배우나 가수처럼 단명 하는 요즘에도 선생이 건재한 까닭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필자는 선생이 재직하는 대학에 작년까지 강사로 나갔다. 선생의 연구실은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다. 가장 적절한 단어와 문장을 찾아내기 위해 삭제와 되살리기의 고달프고 힘든 노동을 거듭하는 선생을 그려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문단 이력이 일천한 필자로서는 선생의 치열하고 준엄한 문학정신을 가늠할 수 없다. 선생은 한창때 내리 일주일을 자지 않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 같지 않아 밤을 새우면 그 후유증이 오래간다며 웃을 때, 그 수줍은 미소에서나 어렴풋하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선생은 정년을 1년 남겨둔 문예창작학과 교수이다. 올해 65세가 되셨다는 뜻이다. 선생이 좋아하는 외국작가는 예순을 넘겨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써낸 ‘니코스 카잔차키스’다. 선생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지금은 창작을 잠시 중단하고 있지만 강의, 강연, 심사에 전념하면서 구상중인 작품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정년을 하면 칩거하며 오직 창작에만 전념하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선생은 이런 각오를 회갑기념으로 출간한 중편집에서도 밝히고 있다. 간절히 소망하건대, 이번 작품집 출간을 계기로 해서 회갑 이후의 내 삶의 내용이 과거에 비해 실팍하게 달라졌으면 한다. 더욱이 간절히 소망하건대, 회갑 이후에 쓰여질 내 작품들이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한결 완숙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바뀌었으면 한다.(「낙원? 천사?」작가후기)정읍에서 태어난 선생은 여섯 살이 되던 1947년, 이리(현재의 익산)로 이주한다. 하지만 이리에서의 어린 시절은 잦은 이사, 무허가 판잣집, 아버지의 실직 등 극심한 가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보호와 안주의 의미를 상실한 집은 부재와 결핍의 공간이다. 그래서 선생의 초기 작품에 나타나는 집은 대체로 불안정하고 위태롭다. 지방 명문인 강경상업을 졸업한 아버지 덕분에 정읍에서는 행복한 유년을 경험했기에 선생이 이리에서 체감한 불행은 수은주가 가리키는 온도를 훨씬 밑도는 것이었다. 「집」이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그려지고 있듯, 안식과 휴식을 제공하는 집의 상실은 어린 선생이 방황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다. 가난의 원인제공자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현실 일탈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가출을 택한 그는 무허가 판잣집이 철거를 당한 무렵을 전후해 총 다섯 번의 가출을 감행한다. 이를 평론가 황종연의 표현을 빌면 그의 가출은 “친근한 삶의 경계를 넘어서 보다 넓고 낯선 세계와 접촉하는 기회”라고 말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가 처음이었다니 꽤나 어린 나이부터 가출을 경험한 셈이다. 그렇지만 선생의 가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어느 출판사에서 기획한 한국명작소설총서의 열 번째 작가로 선정된 선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가출 욕구가 꿈틀거릴 적마다 부지런히 소설에 매달렸고, 작품을 통해 낯선 땅에서 낯선 인물들을 만나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들을 대신 이룰 수가 있었다. 선생의 가출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그 가출은 막연한 도피나 방황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성과 의미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이 추구해온 문학과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현실과의 불화를 해소하기 위한 모색인 가출을 ‘유토피아 찾기’라고 명명해도 무방할 듯하다. 선생은 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올해로 39년째다. 그동안 많은 작품을 발표한 선생은 전쟁의 상처와 분단과 이산의 아픔, 사회의 구조적 폭력, 후기산업사회에서 소시민들이 겪는 애환 등과 같은 문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유년시절과 젊은 날의 대부분을 가난과 씨름해온 선생은 타자화된 주변부적 주체로서, 현실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러므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깊은 관심과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선생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녹록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군대생활? 군대생활이 좋겠다. 공군 기술병으로 복무한 도시는 필자의 고향이다. 선생은 필자의 고향을 알고 나서도 한참 뒤에 이 사실을 밝혔다. 그때까지도 선뜻 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에 앙금이 남아있었던 것일까.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심한 차별과 설움을 겪었다고 한다. 한 번은 전투기가 격납고에 충돌하면서 폭발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고. 61년 전주사범을 졸업한 선생은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교사를 하면서도 가출병이 도져 방학이면 무전여행을 다니다가 과로와 영양실조 때문에 급성간염에 걸려 고생하기도 한다. 유경순 여사와 결혼한 다음해인 73년, 선생의 표현을 빌면 “좀더 사회적으로 나은 대접을 받아볼까” 해서 초등학교 교사를 사직하고 원광대학교 국문과에 편입한다. 하지만 졸업하고 부임한 성남의 모 여중학교를 금새 사직한다. 선생은 그 이유를 “사립학교의 경영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밝혔지만, 그 말의 행간을 더듬어보건대 사립학교의 독선적인 운영에 적응하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거기에는 글 쓰는 사람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도 한몫 거들었으리라. 좀더 나은 사회적 대접은커녕 실직자가 된 것이다. 가난은 선생 주위를 끈질기게 맴돌았다. 당시의 가난에 대해 선생은 “극심하고 고생스러웠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선생의 표정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빈약한 필자의 상상력을 동원해보자면 신혼인데다 장남이 태어나 물리적 빈곤에, 정신적 압박까지 겹쳐 선생을 짓눌렀으리라는 것이다. 얼마나 가난했는지에 대해 선생이 한 사례를 들려주었다. 정말 콧날이 시큰해지는 그 이야기를 밝히는 것은 선생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더군다나 무능력한 아버지에 대해 반발하고 반항했던 선생이 아니었던가. 자전소설 「궁상반생」에는 동생 경묵이를 죽인 사람은 바로 아버지라는 진술이 나온다. 홍역을 앓던 경묵은 약 한 첩 못 쓰고 죽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양」에서 주인공 ‘나’의 동생 윤봉이의 죽음으로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그런데 선생이 가장으로서 그 가난을 가족이 겪게 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 당혹감과 참혹감이란! 하지만 불에 데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그 뜨거움을 알겠는가. 그저 짐작할 뿐이다. 얻은 것도 있다. 그해에 윤흥길 선생의 대표적 중 하나인 「장마」를 발표한 것이다. 선생의 출세작이기도 한 「장마」는 정양 선생이 들려준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었다. 같은 해 ‘대한일보’신춘문예에 시로 당선한 정양 선생과는 고향의 문단 선배들이 베풀어준 당선 축하연에서 처음 만난 뒤 지금까지 친분을 이어오고 있다. 75년부터는 생계가 차츰 안정되기 시작한다. 선배인 최창학 소설가의 주선으로 출판사 일조각 편집부에 취직이 된 것이다. 낮에는 편집 일을 보고, 밤에는 작품에 몰두한다. 집이 있는 성남까지 오가는 시간이 아까워 출판사 근처에 여관방을 잡았다. 며칠에 한 번씩 유경순 여사가 갈아입을 옷가지를 가지고 왔다. 선생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문득 부끄러워지며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선생이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소설가는 독종 기질이 있어야 한다고. 나에게 자문해본다. “너는 글쟁이로서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77년, 선생은 직장생활을 접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선생에게 문명을 떨치게 해준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발표한 것도 이 해이다. 그 뒤로 선생은 왕성한 창작으로 한국문단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생들에게 문학을 통한 가출을 부추기는 교수이기도 한 선생 역시 종착지는 집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가 안주할 날은 요원해 보인다. 유토피아 찾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작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한 영영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사전식 풀이로 ‘이상향’인 유토피아는 ‘없다’는 뜻의 라틴어 'u'와 장소 ‘topos’의 합성어로, 원래 의미는 ‘없는 땅’이다. 이는 곧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이므로. 2000년 서울 국제문학포럼의 토론자로 참석한 선생은 자신의 유토피아 찾기가 계속될 것임을 아래와 같이 시사하고 있다. 시대의 단순한 삶을 작품에 투영하는 단순한 증언자, 기록자로서가 아니라 특별하고 내밀한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작가다운 작가를 지향…… 선생은 정년 후에 「밟아도 아리랑」을 완간할 계획이다. 그리고 본격 역사장편소설과 현대를 배경으로 한 장편도 구상중이다. 어떤 내용이냐고 묻자 선생은 웃는다. 하긴 예고편이 너무 자세하면 재미없는 법이 아닌가. 최근의 작품들로 미루어볼 때, 이것만은 분명하다. 현대가 배경인 작품은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로 환원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위악을 고발하게 되리라는 것. 또는 소비와 욕망을 특징으로 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게 되리라는 것. 선생의 정년은 끝이 아니라 유토피아를 찾기 위한 적극적인 모색이 될 전망이다. 늘 길 위에 서 있는 선생의 건강을 빌며, 다음 작품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소설가 윤흥길은 1942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출생, 전주사범학교와 원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소설집으로 「황혼의 집」「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장마」 「꿈꾸는 자의 나성」 「낙원? 천사?」 「소라단 가는 길」등이 있으며, 장편소설로 「묵시의 바다」「에미」「완장」「낫」 「밟아도 아리랑」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창작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요산문학상, 21세기 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