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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4)(주)보배-③보배소주의 탄생

1957년 춘천양조장을 인수한 문병량 사장은 군산시 대명동 양조장 앞 집으로 이사해 살았다. 일찍 결혼한 그는 주옥환 여사와 사이에 5남3녀를 두었고, 항상 부지런하고 열성적으로 사업을 꾸려나갔다. 당시 군산에는 대한주조, 미룡주조 등 대형 주조장이 많아 경쟁도 치열했다. 문병량의 춘천주조장은 중상급 규모의 주조장이었고, 탁주와 약주 부문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근에는 군산역과 시장, 중앙동영동 거리 등이 위치, 양조장의 지리적 조건도 좋았다. 하지만 문병량 사장은 춘천양조장을 인수한지 5년만인 1963년 '백화 강정준 회장처럼 크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이리지역 한 소주업체의 면허를 확보, 이리로 이사한다. ▲ 60년대의 소주업계 문병량 사장이 이리로 진출, 소주업에 뛰어드는 1960년대 소주정책은 우리나라의 식량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부는 1962년 1월1일 주세법을 개정하면서 과세 물건이 한 종류인 소주를 증류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 두가지로 나누고 그 세율도 달리 정했다. 밀보리옥수수 등 곡류로 제조하는 증류식 소주에는 희석식 소주보다 3.6배에 달하는 높은 세율을 적용했다. 이어 1962년 11월28일 주세법 개정에서는 아예 고구마로 제조하는 주류 전반에 대해 주세 경감 규정을 신설, 비곡주 생산을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썼다. 당시 식량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부가 이처럼 주세경감 규정을 둔 것은 비곡주로의 전환이 가능한 증류식 소주를 고구마로 제조하도록 하거나, 아예 희석식 소주 공정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정부가 이같은 정책을 취한 것은 1961년 이후 주류업 전반의 침체 현상과는 달리 증류식 소주 생산이 증가 일로에 있어 식량 사정을 어렵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1년부터 전국의 소주 출고량 중에서 증류식과 희석식 소주의 비율은 크게 엇갈린다. 1961년 증류식 소주 출고량은 8만4229석(1석=180ℓ)에 불과했지만 이 후 크게 늘어나 1963년에는 18만7800석, 1964년 19만1229석으로 두배 가량 증가했다. 반면에 희석식 소주는 1961년 66만2063석에서 1963년 33만2992석, 1964년 23만8525석으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이처럼 증류식 소주 출고량이 급증한 것은 곡류를 원료로 하면서도 가격이 저렴하고, 재래의 증류방식으로 제조돼 소비자 기호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류식 소주는 주정을 원료로 만드는 희석식 소주보다 제조 원가가 높아 업체 입장에서는 실익이 적었다. 이 때문에 증류식 소주업자들은 주정을 일부 섞은 혼화주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군산의 청주 기업 대한양조(훗날 백화양조)는 1963년 8월, 정부가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류 제조에 대한 제재 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청주 생산을 일시 중단해야 했다. 이 때 대한양조는 합성청주를 생산하는 한편 향후 대중주류로서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본 희석식 소주에 눈을 돌린다. 이 때 대한양조는 김제 백구에 있던 부용양조장의 희석식 소주 제조면허를 양수, 1964년 6월부터 백화를 상표로 내건 희석식 소주를 생산한다. ▲ 남선양조장 인수 춘천양조장을 운영하며 소주 시장의 가능성을 확신한 문병량 사장은 소주업 진출을 시도하게 되는데 1963년 4월 문 사장이 소주면허를 인수해 설립한 소주업체가 이리 소재 남선양조장이었다. 보배그룹의 태동이었다. 문병량 사장이 이리에 진출하며 설립한 남선양조장은 이리시 중앙동 3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리시는 주변으로 큰 들과 밭이 있어 술 원료인 쌀과 고구마 등 곡류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편리한 물류 조건을 갖춘 교통의 요충지였다. 남선양조장 인근에 중앙동 일대 번화가가 있고, 화물을 운송하기 쉬운 이리역이 지척에 위치했다. 남선양조장은 증류식 소주인 남선소주와 희석식 소주인 해양소주를 생산, 지역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1964년 4월에는 희석식 소주의 상표를 '동일소주'로 변경했으며, 소주 원료 다변화를 위해 증류식 고구마 소주를 개발해 판매했다. 당시 익산군 황등면 일대에서 생산된 고구마는 '황등고구마'라고 불렸는데, 당도가 높은 황등고구마는 맛이 좋아 시장에서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이 당시 증자기가 폭발하는 바람에 근로자가 부상하고 많은 물적 손해가 발생하는 등 불운도 겹쳤다. 문 사장이 고구마를 원료로 한 증류식 소주를 생산한 것은 주변에 고구마가 풍부했고, 또 양곡을 원료로 한 주정 및 증류식 소주 제조 금지를 유도하는 정부 정책과 무관치 않았다. 실제로 정부는 1964년 12월8일 양곡 소비절약 지침을 입안해 공시하는데, 고구마 소비 증대와 양곡 소비 절약이 골자였다. 이 지침은 먼저 고구마를 원료로 증류식 소주를 제조하는 업자에게 주정 면허를 부여했다. 또 증류식 소주 업자는 희석식 소주로 제조 종목을 바꿀 수 있고,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정과 증류식 소주 제조를 일체 금지했다. 정부는 결국 1965년 3월에 양곡을 원료로 하는 증류식 소주의 제조 금지 명령을 내리게 되며, 이 후 양곡을 원료로 하는 증류식 소주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희석식 소주 시대가 열린 것이다. ▲ 보배의 탄생 정부 정책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면서도 중소 소주업체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문병량 사장이 남선양조장을 설립할 무렵 도내에는 30여개의 크고 작은 중소 소주업체들이 군웅할거했고, 전국적으로는 진로, 삼학 등 300여개에 달했다. 그 시절에는 출혈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술 제조업체들의 탈세도 일상화 돼 있었다. 당시 소주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업계는 정부 조세수입의 1할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는데, 탈세를 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악순환 구조 속에서 남선양조장이 살아남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문병량 사장은 소비자들에게 차별화된 품질과 기업 이미지를 줄 수 있 방법을 생각하던 중 상호를 변경하기로 했다. 남선주조란 상호는 일반 주조장 이미지가 강해 대중들에게 아무런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판단, 기업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상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문병량 사장은 1965년 3월 새로운 상표를 '보배(寶盃)'로 변경하고, 상호는 보배양조공업사로 정한다. 보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배에서 만든 보배소주야말로 인간 관계를 더욱 보배롭게 만들 수 있다며 소비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어갔다. 이어 문병량 사장은 1965년 7월 서울출장소를 개설하고 서울로 진출, 영업망을 확대한다. 서울시내를 달리는 전차 내에 보배소주 광고가 부착됐고, 라디오 광고방송, 장수무대 등에서 보배소주를 알리는 광고가 전국에 울려퍼졌다. 보배는 1966년 6월 전국 소주 인기투표에서 최우수상인 재무부장관상을 수상하고, 이어 8월에 열린 전국주류경진대회에서도 최우수상인 국세청장상을 수상하는 등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도내에서는 군산의 대한주조가 상호를 백화로 변경하고, 청주 뿐 아니라 소주까지 생산하며 사세를 확대하고 있었다. 보배의 사세가 상대적으로 부족했지만, 도내 소주업계는 백화소주와 보배소주 구도가 형성돼 가고 있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7.01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희석식 소주의 기원과 제조과정

요즘은 쌀이 남아 돌아간다며 쌀막걸리 등 쌀을 적극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정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광복 후 20여년동안 우리나라는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려 쌀의 누수를 막는 정책이 많았다. 정부가 내놓은 고육책 가운데 쌀과 보리 등 곡류를 이용한 술 제조 규제책이 있었다. 정부는 1965년 1월부터 증류식소주의 곡류사용을 금지했는데, 이는 식량용 곡류가 소주 제조에 사용되는 것을 차단한 것으로 증류식 소주 제조 금지정책이었다. 이 조치에 따라 1965년 이후 우리나라 소주 제조방식은 희석식으로 변했다. 희석식소주는 연속식 증류기로 증류한 순량의 알코올(주정)을 물로 희석한 제품을 말한다. 요즘 우리가 즐겨 마시는 (주)보배의 하이트소주, 롯데주류BG의 처음처럼 등은 모두 희석식 소주다. 이 소주는 비록 맛의 조화를 위해 첨가물을 섞는 제조과정을 거치지만 증류식 소주에 비해 무취, 담백하고, 또 알코올분 외의 성분이 극히 적은 단점이 있다. 익산의 (주)보배, 군산의 (주)롯데주조BG 등 도내 소주 생산공장은 모두 자체 주정공장에서 생산한 주정을 공급받은 뒤 희석 과정을 거친다. 원료인 주정은 알코올 95% 정도이지만 물을 가하여 40% 전후로 정제한다. 40%로 희석한 주정은 맛이 거칠고 원료주정의 품질에 따라 향미도 일정하지 않다. 이에 향미를 안정시키고 맛을 순화시키는 정제과정을 거치는데, 주로 탄소처리법이 이용된다. 탄소처리법은 주정에 분말탄소를 넣은 뒤 잘 저은 후 13일간 방치하여 여과하는 법, 입상탄소층으로 희석주를 23회 통과시키는 법 등이 있다. 그러나 주정을 물로만 희석하면 맛이 너무 담백해 제품의 특징을 느낄 수 없다. 이 때문에 각 소주업체들은 맛의 조화를 위해 설탕, 포도당, 구연산, 아미노산류, 솔비톨 또는 무기염류 등 각종 첨가물을 넣어 소비자 입맛을 공략한다. 당연히 첨가량과 종류는 제조장마다 다르며, 보통 0.05-0.15% 가량 첨가한다. 첨가물과 관련, 주세법 시행령은 15℃ 때에 제성주 100㎖ 중에 2g까지 첨가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첨가 과정을 거친 후 제품의 규격에 맞춰 여과하는데, 보통 여과포, 여과지로 3회 이상 여과한 다음 병입한다. 비로소 완성된 소주 한 병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제품 규격은 과거의 경우 35%, 25%였다. 이는 알코올분 40%가 넘는 양주나 중국술에 비해 크게 약하지만, 갈수록 건강한 음주문화가 강조되면서 최근에는 알코올 2015%의 저도주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보배의 알코올성분 21% 짜리 '보배21'은 소주업계에 저도주 시대를 연 제품으로 기록된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6.24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3)(주)보배-②창업기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해 출범한 익산시는 내륙이라는 입지 조건에도 불구, 산업단지가 잘 발달해 있다. 또 쌍방울과 보배, 광전자, 한국고덴시, OCI, 귀금속단지 등 굵직한 기업들이 활발한 생산활동을 벌이면서 역동적 발전을 해 나가고 있다. 일제시대 소규모 촌락에 불과했던 이리읍이 오늘날 인구 30만명이 넘는 익산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편리한 교통이다. 1907년 5월에 착공해 1908년 10월 개통된 전주군산간도로(노폭 7m, 길이 46.4㎞, 1975년 4차선으로 확장포장)에 이어 1915년 1월 이리역이 개통됐다. 전주 등 동부권과 당시 호남 최대 항만인 군산항을 잇는 전주군산간 도로에 이어 서울과 목포를 잇는 호남선 열차가 이리역을 통과하면서 사람과 물자, 자본이 이리역을 중심으로 대거 몰렸다. 그리고 이처럼 편리한 교통여건이 기업 입지로 이어졌다. 1973년 11월 호남고속도로(길이 195.16㎞)가 개통, 그야말로 교통 요충지가 된 익산은 요즘에도 여전히 기업들이 주목하는 곳 중의 하나이다. 옥구군 회현면이 고향인 보배그룹 문병량 회장이 군산에서 활동하다 이리에 둥지를 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8세때 아버지 여의고 고생 양조장에서 출발, 굴지의 주류기업으로 성장한 보배의 창업주 문병량 회장. 어려운 가정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매사를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며 양조장을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문 회장은 지난 1996년 2월11일 향년 63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기업가로서 야망을 불태운 시대의 풍운아였다. 1933년 7월24일 옥구군 회현면에서 태어난 문병량은 8세에 부친을 여의고, 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3대 독자 외아들 문병량은 가산이 넉넉치 못한 상황에서 부친마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항상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성장했다. 고향 회현에서 회현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오랫동안 고생했다. 그는 군산 영명학교를 다녔지만, 거의 고학에 가깝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성장한 문병량은 할아버지가 70대에 돌아가실 때까지 극진히 모시며 효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뼛속까지 사무치던 시절부터 조부모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문병량의 가슴은 항상 '돈을 벌어 가세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강한 집념으로 가득했다. 1953년 무렵, 20세의 청년 문병량은 군산 미군비행장에 취직했다. 신장 180㎝인 문병량은 단단한 체격의 사나이였다. 하지만 3대 독자 외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군징집을 면제받아 미군부대에 취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길러주신 조부모 고생을 덜어드릴 수 있었다. 군산 미군비행장에 취직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반장 지위를 확보했다. 그가 군부대 작업반장을 꿰찰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생활자세가 바탕이 된 통솔력이 크게 작용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성장한 문병량은 부지런하고, 근면 성실해야 각박한 사회에서 살아남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 부터 깨달았다. 그는 항상 5시쯤이면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생활을 평생 지켰다고 한다. 문병량은 군부대 작업반장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 취직도 주선하는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생하는 이웃들을 위해 나름대로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 기업에 눈 뜨며 홀로서기 나서 1957년 당시 24세인 문병량은 군산시내에서 중상급 규모에 속하던 춘천양조장을 인수하며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춘천양조장은 군산시 대명동 속칭 '감독거리'에 자리잡은 막걸리와 약주 생산 공장이었는데, 기업에 눈을 뜬 청년 문병량은 3년여 동안 저금한 자금을 바탕으로 주변 자금을 끌어모아 양조장을 인수할 수 있었다. 당시 기업에 눈을 뜬 문병량은 군산지역에서 잘 나가는 도정업과 목재업, 양조업 등 3개 업종을 놓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이들 3개 업종은 당시 군산에서 가장 잘 나갔다. 문 회장은 그 가운데 양조업을 택했고, 1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양조장 가운데 마침 매물로 나온 춘천양조장을 인수했다. 개인 문병량이 기업가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문 회장이 양조업을 택한 것은 나름대로 앞을 내다본 선견지명이 있었다. 도정공장은 시설비 등에 따른 막대한 자본이 부족, 인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며 양식에 눈을 떴던 그는 우리나라도 경제발전에 따라 생활양식이 변하면 도정업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재업의 경우 관련 정보 및 기술이 전혀 없어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양조장 사업의 경우 잘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비록 막걸리는 마진에 한계가 있지만 술 산업 전체적으로 볼 때 양조업은 소주 생산 등 업종전환을 통해 고부가가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 회장이 훗날 중국 보배원 설립과 죽엽청주를 바탕으로 한 외식업, 주류 수출입업 등에 진출한 것은 창업 초기부터 예고된 일이었던 셈이다. 1957년 당시 군산에서는 청주 생산업체인 대한주조(훗날 백화)가 연매출 2억3400여만원을 올리며 사세를 확장해 가던 때였다. 이제 막 창업한 청년 문병량은 대한주조는 물론 미룡주조장 등 대형 양조장들을 벤치마킹하고, 또 신세도 졌다. 이 때 문병량의 가슴 속에는 갈매기처럼 높이 솟아올라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기업가의 큰 뜻이 용광로처럼 부글거리고 있었다. 대한주조 강정준 사장의 대약진을 지켜보면서 청년 문병량으 꿈도 커갔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6.24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2)(주)보배-①소주의 역사와 창업

사람사는 세상에서 술은 '약방의 감초'격이다. 희로애락의 순간마다 술은 흥겨움을 더해주고, 울적한 기분을 달래주고, 사기를 북돋워준다. 이같은 술 문화는 발효와 누룩이 발명된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과 함께 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한시대 조상들은 한 해의 풍년농사를 위해 맑은 곡주를 빚어 조상께 먼저 바치고, 춤과 노래와 술을 즐겼다. 삼국시대의 술은 주국(酒麴)과 맥아(麥芽)로 빚어지는 주(酒)와 맥아로만 빚어지는 례(醴, 감주) 등 두가지였다. 이들 중 고려주와 신라주는 그 우수한 품질이 중국 송나라에까지 알려져 송나라 문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황금주(黃金酒), 백자주(栢子酒), 송주(松酒) 등 술의 재료와 특성을 담고 있는 술이 등장했다. 또 고려시대에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증류주가 제조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만들어진 술 제조법, 유명 술은 대체적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술은 고급화 추세를 보였는데, 제조 원료가 멥쌀에서 찹쌀까지 확대됐고 발효기술도 단(單)담금법에서 중양법(重釀法)으로 바뀌었다. 이 시대 유명주는 삼해주(三亥酒), 이화주(梨花酒), 국화주 등이다. 조선 후기에는 지방에서 빚어지는 명주들이 전성기를 이뤘다. 익산 여산의 호산춘(壺山春)을 비롯해 충청의 노산춘(魯山春), 김천의 청명주(淸明酒) 등이 명주로 꼽혔다. ◆ 한국의 전통술 우리나라의 전통술은 막걸리인 탁주, 그리고 약주, 청주, 소주다.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탁주는 민족의 토속주로서 예로부터 각 가정마다 독특한 제조 방법으로 만들어 마셨다. 탁주와 약주는 큰 구별이 없다. 같은 원료를 사용해서 탁하게 빚으면 탁주, 맑게 빚으면 약주가 되기 때문이다. 탁주와 약주는 곡류와 기타 전분이 함유된 물료나 전분당, 국 및 물을 원료로 사용하는데, 발효시킨 술덧을 여과 제성했는가 여부에 따라 탁주와 약주가 구분된다. 약주는 탁주의 숙성이 끝날 때 쯤 술독 위에 맑게 뜨는 액체 속에 싸리나 대오리로 둥글고 깊게 통같이 만든 '용수'를 박아 맑은 액체만을 떠낸 것이다. 익산 호산춘과 같은 약주는 좀더 섬세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약주는 우리나라에서 '약으로 쓰이는 술'이라는 뜻의 약용주가 아니다. 조선시대 서유거(徐有渠)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좋은 술을 잘 빚는다는 소문이 났다. 마침 그의 호가 약봉(藥峰)이고, 그가 약현동(藥峴洞)에 살았다고 하여 '약봉이 만든 술''약현동에서 만든 술'이라는 의미에서 약주로 불리었다고 한다. 청주는 백미로 만드는 양조주이며, 탁주에 비해 맑은 술이다. 청주는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졌다. 일본 '고사기(古史記)'에 따르면 백제의 인번(仁番)이 응신천황(應神天皇, 270-312년) 때 일본에 건너가 새로운 방법으로 미주(美酒)를 빚었으며, 그를 주신(酒神)으로 모셨다. 미주는 청주의 전신으로 풀이된다. ◆ 소주의 역사 탁주나 양주는 오래 보관할 수 없는 결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소주는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다. 발효원액을 증류해 얻은 술이기 때문이다. 소주는 고려시대에 원나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소주는 인도나 이집트 등지에서 4000년 전이나 2800년 전부터 제조됐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중국 원나라때 처음 제조됐고, 우리나라에는 징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위해 한반도에 진출했을 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원나라군은 개성에 본진을 두고 안동과 마산, 제주도 등에 전진기지를 두었는데, 소주는 이곳들을 중심으로 제조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까지 세력을 확장했던 원나라는 페르시아의 증류법을 우리나라에 전달한 셈이다. 전래 당시 소주는 감로(甘露), 아라키(亞刺吉)라고 불렀는데, 아라비아의 아라크(Araq)라고 했다. 아라키라는 이름은 아라비아의 아라크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나라에서 들어온 소주는 오랫동안 약용으로 사용됐고, 조선시대 들어 술로서 대중화됐다. 소주는 지역마다 명칭을 달리했는데, 개성에서는 아락주, 평북에서는 아랑주, 전라 충청 일부에서는 새주, 세주라고 했다. 진주에서는 쇠주, 하동과 목포, 서귀포 등지에서는 아랑주, 연천에서는 아래지, 순천과 해남에서는 효주라고 불리었다. ◆ 오늘의 소주 소주는 전통적으로 증류식으로 생산됐다. 우리나라는 곡류를 누룩으로 발효시킨 다음 고리를 사용하여 증류식 소주를 생산했다. 증류 장치인 고리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밑부분은 아래가 넓고 뒤가 좁다. 하지만 위의 것은 밑이 좁고 위가 넓다. 위쪽에 숨이 나오는 주둥이가 있는데, 이 곳에 주발을 대놓고 소주를 받았다. 전라도지역에서는 흙으로 만든 토고리를 많이 사용했다. 1920년대 이후 소주는 일본에서 보급된 발전된 양조기술로 생산됐다. 흑국균을 입국(粒麴)으로 배양해 쌀과 보리, 옥수수 등의 술덧을 발효시키고, 증기 취입식 단식증류기로 증류해 소주를 생산했다. 증류식 소주는 제국과 담금, 증류, 저장 등의 공정을 거쳐 제조됐는데 1960년대 초까지 생산됐다. 식량난에 시달리던 정부는 1965년 1월부터 곡류를 사용하는 증류식 소주 생산을 금지시켰고, 주정공장 업자들은 희석식 소주 생산에 나섰다. 희석식 소주는 증류한 순량의 알코올(주정)을 물로 희석한 것이다. 증류식 소주에 비해 알코올성분 외의 성분이 극히 적기 때문에 맛이 단순하다. 희석과 정제, 첨가, 제성여과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 알코올 성분이 주로 25%였지만, 최근에는 2015%의 저도주가 상품화되고 있다. ◆ 전북의 소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전통적 농도인 전북에는 도정공장과 주정공장이 많이 발달했다. 광복 후 군산에서는 강정준 씨가 일본인의 주정공장 시설을 이어받아 백화양조를 창업, 청주와 소주를 생산했고 익산에서는 군산 옥구 출신의 문병량 씨가 양조장을 창업한 뒤 1963년 익산시 중앙동 3가에서 남선양조장을 설립, 전북의 술 보배가 그 첫 걸음을 내디뎠다. 본관이 남평(南平)으로 1933년 7월24일 옥구에서 태어난 문병량 씨는 원광대 법학과를 졸업한 인물이다. 그가 남선양조장을 세운 1963년 그의 나이가 30세였으니, 늦지 않은 나이에 사업에 뛰어든 셈이다. 1976년 이리상공회의소 회장,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1986년 보배장학문화재단 이사장 등 대외적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그는 일개 양조장으로 시작한 사업을 크게 확장시켰고, 1994년 보배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1970년대 1도1사 소주 시대가 열리면서 그동안 백화소주와 출혈경쟁을 벌였던 보배소주는 지역 대표 소주로 우뚝 섰고, 도민의 사랑을 온몸에 받으면서 성장했다. 1968년 이후, 40대 이상 도민이라면 귀에 익고 정다움을 느낄 수 있는 보배소주 CM송을 기억할 것이다. "보배로구나 보배로구나 소주는 뭐라해도 보배가 보배야 마시는 기분 취하는 기분 소주는 뭐라해도 보배가 보배야 아무리 마셔도 뒤탈없는 보배 쿨쿨쿨 쿨쿨쿨 마셔보는 보배 소주는 뭐라해도 보배가 보배야" 당시 라디오 광고방송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온 CM송'보배로구나'는 송해 씨가 정감을 다해 불렀고, 아이들도 거리를 다니면서 부르고 다닐 정도로 보배소주와 함께 인기를 모은 노랫가락이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6.17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국내 첫 '명품 200수' 속옷

남성 정장의 품질과 가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실의 굵기를 나타내는 단위인 '번수'이다. 몇 수 원단을 사용했는가에 따라 옷의 광택, 밀도, 착용감 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번수의 차별화가 속옷에도 적용될 전망이다. ㈜쌍방울트라이그룹은 얼마전 국내에서는 최초로 '명품 200수' 속옷을 출시한다고 밝혔다. 200수(1수=1.6933m)란 목화솜 1g에서 338.7m의 실을 균일한 굵기로 뽑아내 방적한 원단을 말한다. 속옷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40수(67.7m) 비해 흡수성과 통기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가벼운 느낌과 광택, 부드러운 착용감이 월등하다. 특수 가공 처리를 통해, 섬유 강도가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탁 후 형태 변형 방지 실험을 모두 통과해 기존의 고급 원단이 가지고 있던 단점이 보완되었다. ㈜쌍방울트라이그룹 한 관계자는 "예전에 일시적으로 출시했던 140수, 160수 속옷을 입어본 소비자들의 문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명품 속옷에 대한 시장의 욕구가 있다고 판단, 200수 속옷을 개발, 출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품질을 자랑하는 이집트산 기자 원면을 사용한 트라이 '명품200수' 속옷은 가격보다는 품질과 착용감을 중요시 여기는 40대 이상 고소득층 남성을 주요 타깃으로, 남녀 상의 2종이 출시돼 전국 100여 개 트라이 매장에서 판매된다. ㈜쌍방울트라이그룹 최제성 대표이사는 "명품 200수 속옷의 개발은 국내에서 아직까지 누구도 이루어 내지 못한 성과로, 트라이가 가진 45년간의 기술력이 응집된 제품이다" 며 "200수 속옷 출시와 함께 꾸준히 우수한 제품을 개발해 기존 속옷 시장의 틈새 시장이라 할 수 있는 명품 속옷 시장을 공략해 나가겠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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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6.10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1)쌍방울-⑥시련기

1963년 내의업체 쌍녕섬유로 출발한 메리야스 기업 쌍방울은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했다. 무주리조트 개발을 수행한 (주)쌍방울개발을 비롯해 쌍방울 제품 수출을 전담한 쌍방울상사(주), 외의부문 첫해외 합작사 (주)쌍방울다반, 여성 패션의류 해외 합작사 (주)쌍방울룩, 유아복 전문업체인 (주)쌍방울베베, 소모사(梳毛絲)를 생산하는 소모방적업체인 태영모방(주), 종합인쇄포장업체인 화성실업(주), 이리컨트리클럽(현 상떼힐CC)을 운영하는 덕원관광개발(주), 전북의 프로야구단 (주)쌍방울레이더스 등 9개에 달했다. 특히 쌍방울그룹은 무주 스키장과 리조트, 골프장 개장, 1997년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 전북 연고 프로야구단 쌍방울레이더스 등 대중성이 강한 사업에 진출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1997년 한국을 덮친 IMF외환위기 사태는 쌍방울그룹 해체로 이어졌다. IMF외환위기는 쌍방울그룹은 물론 이봉녕 회장과 이의철 부회장 등 오너일가에게 엄청난 비극이었다. ▲ 무주리조트 사업으로 자금난 봉착 이봉녕 회장이 '한올의 실로 세계를 당긴다'는 창대한 목표를 내걸고 1963년 창업한 쌍방울은 갑작스럽게 닥친 IMF외환위기 회오리바람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의철 부회장이 레저관광과 동계스포츠를 선도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무주리조트 사업에 뛰어든 후 쌍방울은 스키장과 리조트를 성공적으로 개장하고, 이어 97년 1월24일부터 2월2일까지 무주리조트와 전주빙상경기장 일원에서 무주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덕유산 자락 212만여평에 자리한 동양 최대의 스키장은 30면의 슬로프를 갖췄고, 리조트와 티롤호텔 객실은 1400여개에 달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쌍방울그룹의 화려한 앞날은 예약돼 있었다. 그러나 메리야스 중심의 쌍방울이 튼실했을 뿐 무주리조트 작품을 내놓은 쌍방울개발은 멍들어 있었다.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가 확정된 후 쌍방울개발은 무주리조트 사업 고삐를 당겼지만, 자금난에 봉착했다. 이에 3400억원의 자금을 금리가 높은 종금사에서 주로 빌리며 공사를 계속했고, 1997년 10월 16일 쌍방울 부도 당시 쌍방울그룹의 부채 규모는 9000억원에 달했다. 대부분의 부채가 종금사 등 제2금융권 자금이었다. 수천억원의 빚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1997년 태국발 외환위기는 아시아 경제에 암운을 드리웠고, 1997년 한보가 부도를 낸데 이어 기아자동차, 해태, 진로, 나산, 거평 등이 잇따라 쓰러졌다. 국내 경제는 급속도로 냉각됐고, 위기감이 커진 금융기관은 자금 회수에 나섰다. 엄청난 자금을 종금사 등에서 빌려쓰고 있던 쌍방울그룹은 두손을 들고 말았다. 골프장 등 계열사들이 줄줄이 부도, 매각 등 처리됐다. 1989년 7월 전북을 연고로 창단된 쌍방울레이더스는 10년 6개월만에 간판을 내리고 2000년 1월 SK에 매각됐다. 91년 1군 리그에 합류, 빙그레와의 개막 첫 경기를 11대0 승리로 장식하며 순조롭게 출발했지만 우승기록은 세우지 못했다. 쌍방울그룹 부도는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추진한 관광레저사업, 건설업 진출 등이 한 원인이었다. 쌍방울이 가장 잘하는 분야는 내의 관련업이었지만, 이의철 부회장은 부친 이봉녕 회장을 비롯한 대다수 선배 경영진들의 만류를 무릅쓰고(설득하고) 레저관광업에 진출했다. ▲ 치열한 구조조정으로 재기 성공 쌍방울은 1996년 연매출액 3600억원을 넘기며 창사 이래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쌍방울은 쌍방울개발(무주리조트)에 대한 8000억원이 넘는 보증채무를 지고 있었고, 이는 97년 1차 부도 후 쌍방울이 추진한 법정관리 탈피에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종합패션기업이었던 쌍방울은 법정관리 이후 모든 사업을 아웃소싱 또는 청산 매각했다. 2000년에는 주력사업인 트라이를 중심으로 한 내의사업과 진 캐주얼 리(LEE)만 보유하게 됐다. 또 2500명이 넘던 직원을 1200명 수준으로 대폭 감축했고, 그 결과 연매출액 2500억원 영업이익 200억원을 달성했다. 이처럼 내실을 다진 쌍방울은 2002년 11월19일 회사정리절차(법정관리) 종결 결정을 받기에 이르고, 애드에셋컨소시엄에 인수됐다. 하지만 이후 애드에셋컨소시엄의 후신 SBW홀딩스와 지분경쟁을 벌이며 지분 매집에 들어간 대한전선이 대주주 지위에 올랐고, 2004년 3월3일 쌍방울은 대한전선 계열사로 편입됐다. 이 당시 쌍방울의 매출은 1600억원 수준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매출 400500억원 규모의 익산 방적공장을 매각하고, 200억 매출 규모의 청바지 LEE도 정리했기 때문이다. 또 쌍방울은 논현동 본사 사옥을 505억원에 매각하는 등 치열한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며 건실한 기업으로 거듭났다. ▲ 쌍방울트라이그룹 전국 유통점 1000여개 대한전선은 쌍방울 인수 후 2006년 3월10일 상호를 트라이브랜즈로 변경했다. 그러나 지난 2월23일 대주주가 다시 대한전선에서 태평양통상으로 바뀌고, 2월25일 최제성 대표가 취임한 후 다시 쌍방울트라이그룹으로 상호가 변경됐다. 2010년 6월 현재 쌍방울트라이그룹은 전국에 트라이 유통점 1000여개를 운영하고 있다. 이중 오렌지색 간판을 내건 300개의 오렌지숍은 속옷 전문점으로 운영되는 핵심 유통망이다. 그 결과 쌍방울의 주력 브랜드 트라이는 국내 단일브랜드 최대 매출실적을 올리며 시장 점유율 20%대를 유지하고 있다. 또 쌍방울의 최대 자산인 기술력의 상징 순면 200수를 개발, 브랜드 가치를 높여가고 있다. 지난 1995년 2800만달러를 투입해 익산방적공장과 메리야스공장을 그대로 이전한 중국 길림트라이방직유한공사는 쌍방울트라이그룹의 대규모 첨단 생산기지다. 면화에서 봉제까지 일관생산체제를 갖춘 길림트라이는 월360만매를 생산할 수 있고, 90% 이상을 해외로 수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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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6.10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무주리조트와 쌍방울레이더스

이의철 부회장은 1980년대 이후 쌍방울 역사를 주도한 경영인이다. 그는 이봉녕 회장이 일군 내의사업 부문을 안정적으로 성장시키는 한편 젊고 창의적인 경영감각을 토대로 패션내의에 이어 외의사업과 란제리사업에 진출, 큰 성공을 거두며 그룹을 성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승승장구하던 이의철 부회장은 기업의 미래 발전을 담보할 또 하나의 사업을 구상하는 데 기존 의류사업과는 거리가 있는 레저스포츠사업이었다. 사실 이봉녕 회장을 비롯해 그룹 중역들은 이의철 부회장의 스포츠 레저분야 진출을 무모한 도전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초기 투자비용이 엄청나고, 자본 회수율도 늦어 단기적으로 볼 때 수익성을 기대하기 힘든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의철 부회장이 각종 자료를 동원해 미래지향적 사업임을 내세우자 결국 뜻을 굽히고 말았다. 결국 1987년 12월30일 쌍방울은 '덕유산개발사업'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다. 이어 3년만인 1990년 12월22일 동양 최대의 스키장이자, 사계절 레저스포츠타운인 무주리조트를 개장했다. 이의철 부회장의 쌍방울은 프로야구에도 진출했다. 1989년 8월에 한국 프로야구 제8구단으로 결정됐고, 이어 1990년 3월31일 쌍방울레이더스 야구단을 출범시켰다. 전북 연고의 쌍방울레이더스는 타자 김기태, 투수 김원형, 포수 박경완 등 많은 스타 선수를 배출하며 도민의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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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0.05.27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20)쌍방울-⑤확장기(2)

1987년 첫 선을 보인 트라이가 오늘날까지 쌍방울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품질 향상과 다양한 신제품 개발은 물론 소비자 마음을 파고드는 꾸준한 광고 전략이 큰 몫을 했다. 처음 TV와 신문 광고를 시작으로 극장광고, 옥외광고, 라디오와 잡지 등 다양한 매체광고로 확대하며 광고 효과를 극대화시켰고, 무엇보다 '편안함'을 강조했다. 첫해 15개 남성용 신제품으로 출발한 트라이는 1988년 50개, 1989년 94개, 1990년 83개 등 매년 다양한 종류의 신제품을 쏟아냈다. 또 처음 남성용에 이어 이듬해 여성용 트라이와 트라이 양말을 출시했고, 1990년에는 트라이 소아용품을 내놓았다. 1985년 무렵 쌍방울에 의해 시작된 국내 패션내의시장은 급속히 신장해 갔다. 이에 쌍방울은 1990년 초부터 JOCKEY와 트라이에 이은 패션제품 개발에 들어갔고, 1991년 프랑스 굴지의 내외의 종합 패션업체 드방레이사와 JIL브랜드 도입 기술계약을 체결했다. JIL 제품은 1992년 9월부터 판매에 들어갔다. ▲실버벨 등장 쌍방울은 1982년 신규사업위원회를 구성하고, 1983년 4월에 신규사업 대상으로 란제리사업과 외의사업을 정했다. 또 이들 사업을 전담할 특수사업부를 발족했는데, 특수사업1부는 외의류사업, 특수사업2부는 란제리사업을 담당했다. 우리나라 란제리시장은 (주)신영의 비너스(1956년 출시)와 남영나이론의 비비안(1965년), 태평양패션의 라보라(1977년) 브랜드가 분할하고 있었지만, 쌍방울은 1980년대 이후 국내 경제 규모의 확대와 국민소득 증대에 따라 패션의 고급화다양화가 기대되는 란제리류 시장도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쌍방울의 여성용 기초의류 첫 사업대상은 스타킹이었다. 1957년 남영나이론이 처음 생산한 스타킹은 이후 유영산업(반달표)과 화창산업(화창레스) 등이 생산하면서 치열한 가격경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1983년 중고교생 교복자율화는 스타킹 수요를 한층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쌍방울은 1983년 말 39대의 편직기를 도입했고, 1984년 6월 이리공장에서 스타킹을 생산, 판매에 들어갔다. 여성용 화운데이션과 란제리 시장에 진출한 쌍방울의 실버벨 브랜드는 1984년 결정됐다. 실버(silver銀)는 고급스러운 품위와 청초하고 맑은 이미지, 벨(vell)은 쌍방울과 관련있다. 1984년 7월부터 판매에 들어간 스타킹 제품에 처음 사용됐으며, 이후 화운데이션과 란제리, 수영복, 액세서리 등 모든 품목에 부착됐다. 중상가제품의 브랜드는 실버벨, 중저가품의 브랜드는 뉴인나였다. 사업 첫해인 1984년 6억7100만원이었던 실버벨사업부의 매출액은 1985년 21억3100만원, 1986년 36억7500만원, 1987년 74억1000만원, 1988년 121억7400만원 등 크게 성장해 갔다. 그러나 전체 시장점유율은 10% 내외에 그쳤다. 이에 쌍방울은 프랑스 드방레이사의 스캉달 브랜드를 도입, 1990년 3월부터 판매에 들어갔다. 스캉달은 패션의 본고장 유럽에서 최상위 여성 란제리 브랜드였다. 스캉달 도입을 계기로 쌍방울은 란제리 분야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고, 기술력도 제고할 수 있었다. ▲외의사업 진출 내의업체 쌍방울이 외의류 제품을 생산한 적이 있는데 1978년에 내놓은 SYT 브랜드였다. 그러나 4년만에 중단된 실패작이었다. 쌍방울이 다시 외의류 시장 진출을 결정한 1984년 무렵 국내 경제는 극심한 불황을 탈출하고 있었고, 국민 의생활 패턴이 다양화 고급화 추세에 접어들고 있었다. 88올림픽 개최가 결정됐고, 교복자율화 조치에 따른 스포츠웨어, 캐쥬얼웨어 부문의 신장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이같은 긍정적 분위기 속에서 1984년 의욕적으로 내놓은 자체 브랜드 '포라리스'는 2년만에 생산이 중단된다. 포라리스는 스포츠 캐쥬얼웨어로서 2040대 중상층 남녀 소비자를 목표로 했지만, 기존 대형 의류업체들이 잇따라 내놓는 브랜드와 경쟁이 안됐다. 내의업체 쌍방울 자체가 외의류 시장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부족하고 경험도 일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쌍방울은 외의시장을 포기하지 않고 1986년 2월 미국의 유명 청바지 브랜드 리(Lee)를 도입, 판매에 나섰다. 당시 국내 진 의류 시장에는 럭키금성상사의 죠다쉬(1982년), 한주통상의 리바이스(1983), 삼도물산의 써지오바렌테(1984)가 나와 있었는데, 쌍방울이 리를 도입하면서 세계 4대 진 브랜드가 각축을 벌이게 됐다. 진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쌍방울은 Lee에'정통과 패션의 만남'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소비자 마음을 파고들었고, 소비자들에게 Lee브랜드의 이미지를 심는데 성공했다. 쌍방울은 Lee를 출시한 첫해인 1986년 27억원, 1987년 6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등 성장을 지속해 1990년대 들어 국내에서 시판되는 해외 진 브랜드 중 최고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Lee브랜드 이미지를 확고하게 굳힌데 이어 1992년 8월에는 여성 전용 패션 진 가쉽(GOSSIP)을 출시했다. 정통 아메리칸 진과는 다른 자유분방한 모습을 선보이면서 1984년 패션의 본고장 유럽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가쉽은 쌍방울 외의류 사업의 전면에 세워진 대표 브랜드였다. 쌍방울은 1985년 이후 합작 투자사업도 펼쳤다. 일본의 대표적 섬유의류 그룹인 레나운그룹의 계열사인 다반사와 51:49 지분의 합작을 추진, 1985년 11월21일 (주)한국다반을 설립, 남성 캐쥬얼웨어인 인터메조를 생산 판매하는 등 고급 캐쥬얼웨어 시장을 공략했다. 1985년 12월 (주)쌍방울다반으로 상호를 변경한 후 1989년 8월에는 인터메조에 이은 두 번째 브랜드로서 고급 신사복 다반을 시판, 정장 분야에도 진출했다. 쌍방울다반이 독자적 영역을 구축함에 따라 쌍방울은 외의사업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고, 여성용 외의사업을 위한 합작법인 설립도 추진했다. 1987년 11월 일본 레나운룩과 51:49 지분의 합작계약을 체결하고 1988년 1월 (주)쌍방울룩을 설립했다. 쌍방울룩은 88년 5월, 25세부터 35세까지의 감각적 여성을 대상으로 한 기비(Givy)를 생산했고, 1989년 7월에는 복고적인 색상에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키이스(KEITH)를 출시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5.27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9)쌍방울④확장기(1)

메리야스의 품질 고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술과 시설, 그리고 면사의 질이 중요하다. 쌍녕섬유는 이봉녕 회장의 엄격한 품질관리체제 아래 창립 10년여만에 업계 선두 위치에 올라섰지만, 고민을 하나 안고 있었다. 바로 품질좋은 메리야스를 생산하기 위해 꼭 필요한'품질좋은 면사의 안정적 공급' 문제였다. 쌍녕은 메리야스 제조업체일 뿐 원재료인 면사는 풍한방직, 충남방적, 경성방직 등 전국의 방적업체로부터 공급받았다. 하지만 독과점 품목으로 지정된 면사는 가격 인상이 자유롭지 못했고, 방적업체들은 생산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매년 면사파동이 일었고, 1972년과 1976년에 발생한 면사파동은 메리야스 제조업체들이 생산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심했다. 이럴 때마다 면사 확보도 힘들지만, 불량률이 심해 원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했다. 면사 불량률은 곧바로 메리야스 제품 불량률을 높였다. ▲ 면사-내의 첫 일관 생산체제 갖춰 이봉녕 회장은 이 문제의 근본적 해법은 방적공장을 직접 설립해 운영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1976년 10월16일 이리시 신흥동 220번지 이리공단 내의 부지 4만2567평을 매입하고, 이어 10월29일 상공부로부터 5만112추의 섬유시설 설치 허가를 받았다. 방적업체가 면사 가공업에 진출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가공업체가 시설과 자금 소모가 많은 방적업에 뛰어들기는 쌍방울이 처음이었다. 1977년 3월4일 자본금 10억원으로 출범한 쌍녕방적주식회사(대표이사 이봉녕)는 그해 5월 일본 도요멘사와 780만 달러 상당의 장기차관에 의한 자본재 도입 계약을 체결, 면방적기를 확보했다. 이어 8월5일 본공장 8000평 등 총9600평 규모의 방적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5만112추의 시설재와 건설비 등 총70억원이 투자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1978년 6월 쌍녕방적은 1차공장을 완공(10월19일 준공식), 기존 17개 방적업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면사 생산능력은 연600만㎏이었고, 이중 60%는 쌍방울이 사용했고, 나머지는 외부에 판매했다. 소규모 메리야스업체로 출발한 쌍방울이 창립 15년만에 원사에서 제품까지 일관 생산하는 국내 유일의 기업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쟁 방적업체들이 쌍방울에 면사 계약을 기피,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충남방적의 계열사(봉제공장)를 인수하는 대가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시련이 닥쳤다. 쌍방울과 별도 법인으로 출범했던 쌍녕방적은 1979년 4만176추를 증설하며 사세 확장에 나섰지만, 1979년 세계경제를 강타한 2차 석유파동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1981년 2월26일부로 쌍방울에 흡수 합병됐다. 방적공장 당시 480원 정도였던 원/달러 환율이 1981년 1월에는 700원으로 절하되고, 국제금리도 17.55%로 급등해 쌍녕의 경영을 압박, 독자생존이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 내수부진, 수출로 극복 쌍녕방적이 출범한 1977년은 우리나라가 사상 최초로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할 만큼 고도성장기였다. 쌍방울도 1979년 석유파동 직전까지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쌍방울의 매출은 1977년 120억원대였지만, 1978년에는 241억원으로 껑충 뛰어 사상 처음 200억원대를 넘어섰다. 하지만 석유파동이 터지자 내수시장은 얼어붙었다. 쌍방울은 위기에도 강했다. 1980년까지 480억원까지 급신장하던 매출액이 석유파동 후 이어진 경기침체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1981년 489억원에 그치자 쌍방울은 경영전략을 수정, 1979년 무렵부터 해외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나섰다. 이 수출전략이 맞아떨어지면서 쌍방울은 신장세를 이어갔다. 1979년 24억원에 불과했던 메리야스 수출액이 1980년 45억, 1981년 60억원을 넘어섰다. 게다가 쌍녕방적 면사 수출액이 70억원을 넘어서면서 총137억원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 1981년 쌍방울의 전체 수출액은 1000만 달러를 상회, 그해 12월22일 열린 제18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수출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의철 사장이 산업포장을 받았다. 내수시장에서도 쌍방울은 신제품을 계속 출시, 소비자 관심을 집중시켜 나갔다. 여성내의 '뉴인나', 편면 조직에 신축성과 광택 효과를 낸 '브라이트', 고급 '백수메리' 등은 당시 나온 대표적 신제품이었다. ▲ 1987년 try 탄생 이의철 사장은 1979년 6월 취임 후 많은 변화와 혁신을 추구해 나갔다. 그는 취임 2개월 후인 1979년 8월1일 동종업계 최초로 컴퓨터 시스템을 도입, 서울사무소와 이리 본사를 온라인으로 연결했다. 이 시스템은 HP-3000Ⅲ 기종으로 인사관리 및 자재관리는 물론 원사 투입에서 제품 공급에 이르기까지 관리의 현대화와 제품의 품질개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의철 사장은 이어 본사 서울 이전 작업을 추진, 그해 12월1일부로 이리에 있던 본점 소재지를 서울로 이전하고, 생산 관련 부서를 제외한 관리부서 전체가 서울로 이사했다. 쌍방울은 처음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녕빌딩에 입주했지만, 1988년 11월 서울 강남구 논현동 49-4번지 자체 사옥에 입주하며 토탈패션업체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였다. 이어 기업공개에 나서 1984년 9월19일에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자본금 규모는 120억원이었다. 젊은 사장 이의철은 또 우리나라 최초의 남성용 패션내의(쟈키JOCKEY)를 출시, 그동안 백색내의 일색이던 국내 내의시장을 뒤흔들었다. 1984년 7월 미국 쟈키사와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한 뒤 1986년 남성용, 1988년 여성용(JOCKEY FOR HER) 패션내의를 내놓았고, 이들 제품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보수적인 속옷 문화에 일대 전환점이 됐다. 고가의 고급 패션내의 자키에 맞서 1986년 백양에서 BYC, 1987년 태창에서 VICMAN 브랜드의 패션 내의가 나오면서 국내 패션내의 시장은 치열한 경쟁 체제에 돌입했다. 이 때 쌍방울은 중상가격의 패션내의류 시장에 대응할 자체 브랜드 개발을 고민했고, 1987년 11월 try가 탄생했다. 중가품인 쌍방울과 고가품인 JOCKEY 사이의 중상가 패션내의 try는 출시 초기 고유 브랜드 이미지가 부족해 고전했지만, 제품을 다양화(1990년 190개 품목)하고 광고에 주력하며 소비자 관심을 유발시키는데 성공했다. '편안합니까?''편안합니다''직접 확인하세요'는 트라이 광고가 만들어낸 새로운 유행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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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5.13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이의철 사장은

쌍방울의 급신장 아래 쌍녕방적 설립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이봉녕 사장이 갑작스럽게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만다. 쌍녕방적 설립이라는 엄청난 사업을 벌여놓은데다, 방적업계가 쌍방울에 면사 공급을 기피하는 등 급박한 일들이 많은 중요한 시기에 최고경영자가 병원에 드러눕는 사태가 발생, 쌍방울 경영 전반의 동요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봉녕 사장은 한양대부속병원 입원 한달여 만에 퇴원했다. 그러나 회사에 출근, 사장 직무를 수행할 정도로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이 사장은 사장 자리를 장기간 비워둘 수 없다고 판단,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임원 중에서 대표이사를 선임하거나 외부에서 전문 경영인을 영입하는 방안을 주변에 타진했다. 하지만 임원들은 기획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장남 이의철을 대표이사로 추대하자는 뜻을 제안했다. 1954년생으로 26세에 불과했던 이의철 기획실장은 강력히 고사했지만, 결국 모친 김복래 여사의 격려에 힘입어 수락한다. 그리고 1979년 6월7일 이봉녕 사장은 대표이사 회장에 추대되고, 이의철 기획실장이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1975년 입사한 이의철은 생산부와 판매계 등 현장 근무를 거쳐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쌍방울 전체 업무를 익혔다. 적수공권으로 시작한 피나는 인생 역정 속에서 사업을 일으킨 이봉녕 사장은 장남 이의철에게 "사업을 하려면 장돌뱅이가 돼야 한다"며 독려했다. 그러나 이의철 사장은 훗날 야심차게 시작한 무주리조트사업으로 인해 경영권을 잃고 만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이봉녕 회장은 일생동안 거대한 사업을 일구었다. 경영권을 지켜내지는 못했지만, 그가 일군 쌍방울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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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5.13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8)쌍방울 ③성장기

전국적으로 판매량이 급증하자 쌍녕섬유는 1968년들어 종전 판매과를 판매부로 승격시키고, 인력도 30여명으로 대폭 증원해 전국 판매망을 포괄했다. 당시 섬유의 주원료인 면사의 국내 공급물양이 수요에 크게 미치지 못해 섬유업계가 원료확보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는 면사(綿絲)파동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쌍녕섬유는 이봉녕 사장이 전국 방적공장을 찾아다니며 원사확보에 주력했고, 제품 판매 호조가 이어지면서 회사는 급신장했다. 1968년에는 우리나라 섬유업계 최초로 품질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고, 품질관리부를 운영했다. 염색기술자를 스카웃해 염색기술을 보강하는 한편 신제품 개발에도 주력했다. 제품도 다양화해 1966년 '파이렌'이라는 신사용 내의, 1967년 '뉴티'라는 티셔츠를 개발해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는 등 외의류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준비도 했다. △ 해외시장에 눈을 돌리다 1963년 출범한 쌍녕섬유는 불과 45년 후 전국 섬유 시장을 뒤흔들었고, 이봉녕 사장은 해외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0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관람한 이봉녕 사장은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일본의 기술은 크게 앞서 있었고, 내의류 품질은 물론 종류도 다양했다. 시설과 기계가 고도화돼 있었고, 경영자나 종업원 모두 품질개선을 위해 연구개발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큰 충격이었다. 결국 이 사장은 견본용으로 가져간 쌍방울 메리야스는 내놓지도 못한 채 신형 편직기만 사들고 귀국했다. 그러나 일본 방문에서 이 사장이 받은 충격은 보약이 됐다. 포기할 수 없었다. 품질 향상을 위해 자신은 물론 종사자들 모두를 향해 채찍질했고, 2년 후인 1972년 다시 견본품을 들고 일본을 찾았다. 그리고 일본 시장에서 품질을 인정받은 쌍녕섬유는 수출 교두보를 확보, 상반기부터 수출에 들어갔다. 품질에 까다로운 일본 진출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었다. △ 새로운 출발 쌍녕섬유는 1971년 당시 620개에 달하는 국내 메리야스 관련업 중에서 내수기반을 확고히 한 몇 개의 업체에 속했다. 국내의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에 힘입어 낮은 가격의 제품으로 수출하는 기업이 많았지만, 쌍녕섬유는 꾸준히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고 품질을 향상시키며 국내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지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1970년대 중반 이후 쌍녕섬유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메리야스업체로 부각됐다. 당시에도 메리야스업계는 여전히 지역 대표업체들이 시장을 분할하고 있었지만, 쌍녕은 창사 10여년만에 전국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쌍녕섬유가 공장 설비의 대규모 확장을 계획한 것은 제품 판매량에서 선발업체들을 제치고 앞서나가기 시작한 1970년부터였다. 전주공업단지는 1967년 조성돼 입주가 시작됐지만, 이리공업단지는 1969년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봉녕 회장은 전주와 이리공단 입주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문제는 염색 공정에 중요한 수량과 수질이었다. 수차례의 수질 검사 결과, 이리지역의 수질이 낫다고 판단이 나왔다. 이리공단에 1차로 1만 평을 매입하면서도 원수를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도록 공단 내에서도 가장 낮은 지역을 택했다. 마침내 1972년부터 공장부지 조성 및 공장 건설에 들어갔고, 1973년 3월에 새로운 설비를 갖춘 공장이 가동에 들어갔다. 기존 동이리공장에는 100여명이 잔류해 생산을 계속하고, 이리공단 공장에는 300여명의 인력이 가동됐다. 새 공장은 최신 대규모 설비를 갖춰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이제 쌍녕섬유는 이봉녕 개인 기업을 넘어서고 있었고,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다. 쌍녕섬유공업사는 1972년 6월7일 상호를 쌍녕섬유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자본금을 3200만원으로 총3만2000주의 주식을 발행했다. 대표이사는 이봉녕이었다. △ 업계 선두에 이르기 까지 쌍녕섬유는 1973년 8월23일 편면 남 티셔츠 등 7개 품목에 대해 코튼마크 승인을 얻는다. 이는 당시 메리야스 내의류 생산업체 중 무궁화상사에 이어 두 번째에 해당한다. 코튼마크는 대한방직협회가 미국국제면화협회의 협조하에 1971년부터 시행한 것으로 면 제품의 우수성을 보증했다. 공장 규모가 커지자 1973년 8월부터는 매월 5060명의 종업원을 공개 채용하기 시작했는데 몇개월 후 쌍녕의 종업원은 거의 두 배 규모로 늘어났다. 회사는 항상 활력이 넘쳤다. 동이리공장은 쌍녕에서 분리 독립, 서안섬유주식회사가 됐다. 이 무렵 쌍녕은 성장일로였지만, 국내 경제와 섬유업계는 1973년 10월 중동전 발발과 함께 터진 석유파동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내수성장과 함께 수출까지 활기를 띠면서 국내 섬유업계는 1967년 20.7% 성장, 1973년 23.4% 성장 등 매년 20% 이상의 성장세를 달려왔지만, 석유파동 후인 1974년에는 불과 1.3% 성장에 그친 것. 석유파동과 선진국의 소비 둔화, 수입억제정책 등으로 인해 1975년에도 어려움이 계속됐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쌍녕이 약진을 계속해 1975년부터는 국내 최고 메리야스업체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석유파동 이전에 이리공단 이전을 마쳤고, 수출에 주력하지 않고 내수시장을 적극 공략해 경쟁력 우위를 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자기혁신으로 경영을 쇄신한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74년 쌍녕의 내수부문 매출액은 5억 2000만원에 불과했지만, 1975년에는 29억 8900만원으로 무려 6배가 신장했다. 이어 1976년에는 전년대비 100% 성장한 56억 1200만원에 달했고, 1977년에는 112억300만원으로 처음 내수부문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다. 물론 쌍녕의 약진은 꾸준한 기술개발과 품질향상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1973년부터 일본의 가다쿠라공업주식회사와 기술교류를 시작했고, 1976년부터는 기존 제품과는 달리 직조방법과 소재를 다양화한 제품을 본격적으로 개발해 선보였다. 추동절 내의시장을 겨냥한 순모 내의, 앙고라, 리플, 론샤니 등이 그것이다. 1976년 말에는 증설과 보수작업을 마무리하고, 이 과정에서 신형 기계를 도입했다. 1977년에 설치한 자동선염기와 신형 표백기 설치로 염공시설의 자동화를 이뤘다. 또 1977년에는 1일 2500톤의 폐수를 처리할 수 있는 현대식 폐수처리 시설을 준공, 생활환경 개선과 수질오염 방지에 획기적 전환점을 이루었다. 1977년 들어 그동안 부진하던 수출도 호조세를 보였다. 일본 최고 품질을 인정받고 있는 가다쿠라 등 4개 업체와 수출계약을 하고, 새로 개발된 리플 내의류는 중동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미국 앤더슨사오하 스포츠 티셔츠 수출 등 일본과 중동, 미국, 유럽 시장으로 수출이 크게 늘어났다. 이처럼 경영이 안정 궤도에 오르면서 쌍녕섬유는 방적업에 진출한다. 이봉녕 사장은 1977년 3월4일 자본금 10억원으로 쌍녕방적주식회사(대표이사 이봉녕)을 출범시키고, 그해 3월25일에는 쌍녕섬유주식회사 상호를 '주식회사 쌍방울'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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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06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국내 내의 제조업 간략한 역사

우리나라에 메리야스 제품인 양말류가 전래된 것은 1780년대 쯤으로 추정된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여온 것으로 보이는 양말류는 버선에 비해 편리하고 실용적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개화기 무렵, 고무신과 양복, 양말류는 대중화 단계에 들어갔다. 면화 재배가 성행하고, 면포도 생산됐다. 그러나 개화기 이후 조선은 일본 방적산업의 원료 공급지에 불과했다. 일제에 눌려 조선 자본이 성장할 틈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서울과 평양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직포공장, 메리야스공장, 고무신공장 등이 성장하고 있었다. 1900년 서울 종로에 종로직조사가 설립됐고, 1919년 설립된 경성방직은 순수 민족자본에 의한 면방직산업의 맥을 이어갔다. 1920년대 들어 평양을 중심으로 양말공장이 대거 들어섰다. 당시 평양에서 생산된 양말은 전국 생산량의 60% 정도를 차지했다. 1933년 평양에 설립된 조선메리야스합명회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메리야스 내의류 생산업체였다. 조기, 횡기, 태환기 등 일본에서 들여온 설비를 갖춘 조선메리야스는 전량 주문생산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했다. 이처럼 메리야스공업이 활기를 띠면서 평양 중심의 메리야스공업은 서울과 부산, 대구 등 각지로 확산됐고, 20여개 업체는 중국으로 설비를 옮겨 생산하기도 했다. 1941년 기준 국내 메리야스업체는 482개였는데, 평남 163개 서울경기 103개, 전북 5개 등의 분포를 보였다.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구와 부산, 경남북지역의 메리야스 공업이 발달했다. 평양의 조선메리야스합명회사 박형준 사장과 삼공양말의 손창윤 사장 등이 설비를 남한으로 옮겼고, 영남지방은 6.25 전화 속에서 인민군의 포화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활필수품인 메리야스류의 공급이 부족하자 정부가 전후복구사업 측면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UN의 구호 면사 방출, 시설 확충을 위한 산업기계자금 지원 등에 힘입어 메리야스산업은 시설 확장 및 현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당시 원조물자는 제분제당면방산업 등 이른바 삼백(三白)산업 형성의 토대였다. 그러나 전후 의류 절대부족 상황을 벗어나고, 미국 원조도 끊긴 1957년 이후 메리야스업계도 대대적인 재편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1957년 내의류와 양말장갑 생산업체는 무려 1107여개에 달했지만 이후 영세부실업체들이 대거 퇴출되고, 새로운 기업이 탄생했다. 1954년 형제상회를 설립, 자본을 축적하던 이봉녕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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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4.29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7)쌍방울 ②창업기

▲ 형제상회 호남지역 최대 도매상 형제상회는 개업 1년만인 1955년에 10평에서 30평 규모로 커졌다. 취급 물량이 많아지면서 잡화상으로 커졌다. 생활의류 절대량이 부족하던 때여서 물건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양말도매상에서 내의류 도매상으로 성장한 형제상회는 종업원이 18명에 달했고, 1958년 무렵 대전 이남의 충청권과 호남지역 최대의 메리야스 도매상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규모가 커지면서 형제상회는 소규모 메리야스 제조업체에 자본을 대주고 생산품을 납품받기도 했다. 하지만 형제상회의 판매량이 워낙 많아 전체 물량의 절반 정도는 대형 메리야스 업체에서 공급받아야 했다. 하지만 대형 메리야스업체는 형제상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대량으로 물량을 쏟아내며 도매상에게 떠맡기기도 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판매 물량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애를 태우기도 했다. 이봉녕은 결국 마음에 드는 제품을 직접 생산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히고, 사업 구상에 들어간다. 그러나 1958년 메리야스업계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쳐 1107개이던 업체가 726개로 감소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봉녕은 품질이 떨어져 소비자에게 외면받는 기업, 자금력이 취약한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 창업 시기를 놓고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1962년 9월 동이리역 부근인 이리시 인화동 2가 57번지에 대지 280평, 건평 200평 규모의 공장을 마련하고, 삼남메리야스공업사를 출범시켰다. 중고 편직기 7개, 재단기로 작두 4대와 핸드나이프 1대, 염색시설을 갖췄다. 종업원은 50명이었고, 동생 창녕이 공장장을 맡았다. 그러나 메리야스 장사를 하면서 품질은 물론 소비자들의 성향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이봉녕에게 초기 제품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기술자들과 다툼도 잦았다. 그렇게 탄생한 첫 제품이 '삼남표'라는 상표를 부착하고 시장에 나왔다. 하지만 1년이 지나서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삼남메리야스는 자금압박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 이봉령 사장 불량품 모두 불태워 창업 후 지난 1년을 결산했지만, 기업의 미래가 밝지 않았다.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조직적이고 일관성 있는 운영체제가 절실했다. 이봉녕 사장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먼저 1963년 3월1일 상호를 쌍녕섬유공업사로 변경했다. 형제를 의미하는 쌍(雙)자와 봉녕(奉寧), 창녕(昌寧)의 이름 끝자인 녕(寧)을 조합한 것으로, 외형적으로는 단순히 상호만 변경한 조치였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창업주 이봉녕 사장이 비로소 사업가로서의 뚜렷한 미래와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출발선에 섰음을 의미했다. 훗날 쌍방울이 1963년 3월1일을 그룹의 실질적인 출발 기점으로 잡은 것도 이런 연유였다. 당시 메리야스업계는 1962년 6월 단행된 화폐개혁으로 초래된 자금난과 구매력 감소 등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원료난으로 조업을 단축하고, 휴업하는 공장도 많았다. 쌍녕도 마찬가지였다. 이봉녕 사장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품질개선과 원가절감을 통한 경쟁력 확보라고 믿었다. 그는 면 제품에 대한 혜안을 갖고 있었고, 자사 제품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다. 불량품은 종업원들이 보는 앞에서 가차없이 불질러버렸다. 이에 주변에서 불평의 소리가 나오자 이봉녕은 "소비자를 속이고 불량품을 생산공급하는 기업은 사기꾼과 다를 바 없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 쌍녕은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시장에서 품질 우수성을 인정받았고, 경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계획이 성공하면서 국가 경제가 성장, 섬유산업도 성장 국면에 들어갔다. 쌍녕도 제품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판매가 호조세였지만 전국 판매망은 어림없는 상황이었다. 충청전라도를 뛰어넘어 서울과 부산, 대구 등 전국 시장으로 진출이 절실했다. ▲ 쌍방울의 등장 이봉녕 사장은 '삼남표'라는 상표가 전국 소비자들의 의식 속에 파고들기 어렵다고 판단, 상표 변경을 모색한다. 그래서 나온 상표가 '쌍방울'이다. 쌍방울은 사람들이 항상 몸에 밀착하고 애용해야 할 속옷류에 대한 명칭으로서는 정감을 느끼게 했고, 또 상호인 쌍녕의 한글식 표기여서 거부감도 없었다. 쌍녕섬유공업사는 1964년 10월부터 새로운 상표 '쌍방울'을 출시했다. 다만 충청과 호남지역 출하제품에 한해서는 삼남표를 당분간 사용키로 했다. 쌍녕섬유공업사가 쌍방울 상표를 앞세워 전국 시장에 진출하던 1965년 무렵, 국내 메리야스업체는 500여개에 달했다. 서울과 부산대구, 그리고 전북지역에 대부분 업체가 밀집했다. 주요 상표는 서울의 독립문표무궁화표태복, 부산의 왕자표캉가루표기차표매표, 대구의 지구표청포도메리야스, 광주의 남영백마표, 전북의 백양태창메리야스금성섬유해신대성메리야스 등이 대표적이었다. 따라서 쌍녕이 전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 유수의 상표 벽을 허물어뜨려야 했다. 이봉녕 사장이 꺼낸 첫 카드는 서울판매부 설치였다. 서울판매부의 성공은 쌍녕섬유가 전국적 유통망을 구축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1965년 서울판매부 설치 후 쌍방울표가 서울 대표 브랜드 독립문표와 무궁화표의 벽을 뚫고 서울에 안착하는데는 1년 이상 걸렸다. 이어 부산에 판매 거점을 마련한 쌍녕은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확대해 나갔다. 1960년대 중후반들어 쌍방울이 전국적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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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4.29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쌍방울' 역사 명암

'쌍방울', '트라이', '쌍방울레이더스'는 국민 모두는 물론 특히 전북도민에게 정겨운 이름이다. 쌍방울이 IMF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좌초, 대한전선에 넘어갔을 때에도 쌍방울은 계속 유지됐고, '쌍방울'이란 상호가 2007년 3월 트라이브랜즈로 바뀌었을 때에도 '트라이'란 명칭은 계속 사용됐다. 지난해 자산운용사인 JHCIAMC를 거쳐 지난 3월 태평양통상에 경영권이 넘어갔지만, 새로운 대주주 태평양통상은 사명을 '(주)쌍방울트라이그룹'으로 결정, 기업의 47년 자산을 그대로 이어갔다. 그러나 쌍방울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큰 것이 사실이다. 창업주 이봉녕 회장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세운 쌍방울은 1997년 IMF외환위기가 닥치기 직전까지만 해도 잘 나가는 기업이었다. 전북의 대표적인 향토기업이었다. 하지만 쌍방울은 IMF 파고를 넘지 못하고 부실기업이 됐다. 2004년에는 이봉녕 회장이 어렵게 일군 쌍방울과 무주리조트 등이 모조리 대한전선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2010년들어 또 다시 의류 도소매 기업인 태평양통상의 경영권 아래 들어갔다. 태평양통상이 트라이브랜즈 경영권 인수를 공식화한 것은 지난 3월 2일이다. 이날 태평양통상은 트라이브랜즈의 지분 40.87%(339만5960주)를 보유하고 있다 증권거래소에 공시했다. 이에앞서 태평양통상은 2월 23일 대한전선으로부터 주식을 주당 5595원에 매입했다. 트라이브랜즈의 최대 주주인 대한전선은 지난 8월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자산운용사인 JHCIAMC와 지분 양수도 계약을 맺고 경영권을 매각한 바 있다. 트라이브랜즈(옛 쌍방울) 지분 40.86%를 200억원에 매각한 것이다. 그러나 JHCIAMC가 잔금을 치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태평양통상이 잔금을 대한전선에 지불하고 트라이브랜즈의 경영권을 확보, 트라이브랜즈 최대주주가 된 것. 트라이브랜즈를 인수한 태평양통상은 의류 도소매와 부동산개발 투자를 주 사업으로 하는 회사이며, 3월 임시주총에서 트라이브랜즈의 경영권을 공식 인수했고, 3월31일 정기주총에서 사명을 (주)쌍방울트라이그룹으로 변경했다. 지난 2007년 3월 토털 패션업체로 도약하기 위해 사명을 쌍방울에서 트라이브랜즈로 바꾸었지만, 이제는 경영권이 바뀌었다. 쌍방울트라이그룹 최제성 대표이사는 "끊임없는 자기혁신과 앞서가는 기술 개발을 통해 세계적인 브랜드와 디자인 파워를 가진 초우량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며 "쉼없는 변화와 새로운 도전을 고부가 상품 개발과 글로벌 디자인파워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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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4.22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6)쌍방울 ①태동기

전북 대표 향토기업 쌍방울은 내의와 무주리조트 개발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일자리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창업주 이봉녕 회장의 인생 역정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었고, 프로야구단 쌍방울레이더스는 도민들에게 애향심은 물론 인생의 재미도 주었다. 이봉녕 회장 일가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지난 10여년동안 외지 자본이 쌍방울을 경영하고 있는 동안에도 쌍방울은 도민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속옷 기업 쌍방울, 방적회사 쌍방울은 도민이 어려울 때나 기쁠 때나 항상 도민과 함께하며 어려웠던 개발시대를 극복해 왔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 이봉녕 쌍방울의 역사는 창업주 이봉녕 회장의 인생 역정과 궤를 같이한다. 연안(延安) 이씨인 이봉녕 회장은 1924년 2월 5일(음력) 완주군 초포면 송전리에서 아버지 이영옥과 어머니 최병옥의 5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회장의 선대는 완주군 구이면 일대에 일가를 이루고 살았으나, 증조때부터 초포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업을 유지했다. 초포는 전주에서는 불과 20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1975년 전주시에 편입된 곳. 그러나 당시의 초포는 시골 오지였고, 소위 일본식 신식학교도 없었다. 이 때문에 이봉녕은 서당에도 못가고 어깨 너머로 천자문을 익히는 정도의 교육을 받았다. 이봉녕이 10살 되던 1934년 초포에 소학교(초등학교)가 설립됐지만, 생활이 너무 어려워 그 마저도 갈 수 없었다. 이봉녕 부친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학교인데다, 살림도 어렵다는 이유로 이봉녕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봉녕은 친구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 너무 부러웠고, 아버지 몰래 학교에 가 첫 입학생 33명에 끼어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 나눠준 교과서와 공책 몇권을 무명베 보자기에 휘감아 허리에 매고 5리길을 오갔지만, 어린 이봉녕은 학교 생활이 너무 즐거웠다. 1939년 3월 초포 소학교를 졸업한 이봉녕은 현 초포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궁핍한 시절이었다. 16세가 되던 1936년 이봉녕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외숙이 살고 있는 함경북도 성진으로 갔다. 16세 소년이 감당하기 힘든 혹독함이 예상되는 행로였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을 배우고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홀로서기의 첫 걸음이었다. ▲두만강에서 장사에 눈을 뜨다 난생처음 고향을 등지고 성진에 자리잡은 이봉녕은 처음 1년은 둘째 외숙을 따라다니며 페인트 칠 일을 했다. 이후 책방을 하는 막내외숙의 집으로 옮겨 살면서 서점 점원 생활을 했다. 이때는 이봉녕이 책을 가까이 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소중한 기간이었다. 2년여간의 서점 점원 생활을 마치고, 이봉녕은 함경도 아오지 탄광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석탄으로 휘발유를 만드는 조선석탄공업주식회사에 취직, 급사(심부름 하는 일)로 일했다. 그러나 급사는 월급이 적었다. 이에 이봉녕은 석탄가루가 날리는 현장노동일을 자청했고, 야간근무도 마다하지 않는 생활력을 발휘했다. 아오지 생활에 정착한 이봉녕은 고향에 있던 동생 창녕을 불러왔다. 두 사람은 돈을 벌수 있는 궁리를 한 끝에 두만강 건너 만주에서 옷 장사를 하기로 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봉녕 형제가 생각한 방법은 토요일과 일요일을 이용하여 여러 켤레의 양말과 옷가지를 두툼하게 껴입은 채 두만강을 건너가 그곳 사람들에 벗어 파는 것이었다. 매달 월급의 일부를 떼내어 양말 등을 구입한 뒤 한 달에 3회 정도 두만강을 건넜고, 수입도 짭짤했다. 이 때 이봉녕에게 징병통지가 날아들었다. 1924년생인 이봉녕은 1945년 3월에 징병 1기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봉녕은 사지에서 살아남았고, 징집 5개월만에 조국이 해방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 이봉녕은 23세 때 김복래 여사와 결혼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가난했던 이봉녕은 1949년 농촌생활을 포기하고 전주를 거쳐 처남이 사는 이리(익산)로 이사했다. 처남은 무명베 장사였다. 이봉녕은 처남을 따라 다니며 장삿일을 배울 수 있었는데, 장날에 맞추어 팔 물건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무명베를 적정한 가격에 구입해 놓아야 많은 이문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점상에서 형제상회까지 그러나 무명베 장사도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살길은 있었다. 장사에 관심이 많아졌던 이봉녕은 전쟁 중에 양말장사를 시작, 장래 성공의 기틀을 다져간다. 이봉녕은 시골 아낙네들이 장날에 가져오는 양말을 사서 시장 한켠에서 노점을 벌였다. 생산자들이 장날에 팔아달라고 맡기면, 이 물건들을 판매해 이익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이봉녕의 신용도가 높아졌고, 소문이 나면서 이봉녕의 노점은 크게 발전했다. 밀려오는 많은 물량을 노점에서 소화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이봉녕은 시장 인근에 방을 하나 얻어 물건을 보관해야 했고, 양말장사는 계속 번창해 나갔다. 노점상이 나날이 발전, 어느날 양말 도매상으로 커졌다. 인근 지역에서 생산된 양말들이 이곳에 집중되면서 양말 유통본부 수준에 이르렀다. 나중에는 동생 창녕도 가세했다. 이봉녕은 노점에서 양말을 팔기 시작한지 3년만인 1954년 3월 이리 파출소 앞에 10여평의 점포를 얻어 형제상회를 개업했다. 형제상회는 이봉녕과 이창녕 형제의 각별한 우애가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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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4.22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전북고속의 면허인가 대수·수송인원 추이

1920년 자동차 5대로 출발한 전북여객은 1986년말 현재 548대(직행 316대, 완행 93대, 시내 139대)의 면허인가대수를 보유할 만큼 1980년대까지 성장 가도를 달렸다. 실제로 1950년 완행버스 59대에 불과했던 전북여객의 면허인가대수는 1960년 126대, 1970년 254대, 1980년 427대 등 꺾일 줄 모르게 증가했고, 1986년말 548대로 정점을 이뤘다. 연간 수송인원도 1986년 1억명에 육박했다. 당시 버스는 완행버스, 직행버스, 시내버스, 고속버스로 구분됐다. 전북여객의 경우 처음 완행버스 위주의 버스운송사업이었고 1958년 시내버스, 1968년 직행버스, 1991년 군내버스(현 농어촌버스), 1994년 고속버스 면허인가를 받으면서 사업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대중교통 수요가 커지고, 지역특성에 알맞는 양질의 교통서비스 제공을 위해 교통정책이 변화하면서 완행버스1970년대 말을 정점으로 크게 축소됐으며, 결국 1990년 거리에서 완행버스가 사라졌다. 물론 그동안 완행버스에서 운전기사와 함께 호흡을 맞춰 일하던 승무원인 남차장, 여차장도 버스운송 현장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대신 시 단위에는 시내버스, 군단위에는 군내버스가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전북여객은 1991년까지 일선 시군지역에서 평화여객(현 안전여객), 제일여객, 부안 금일여객, 군산여객, 우성여객, 남원여객, 임순여객, 무진장여객, 풍남여객 등을 분리독립시키면서 모두 257대를 감차시켰다. 이에따라 전북여객의 면허인가대수는 1987년 457대, 1991년 348대, 1995년 314대, 2001년 308대까지 줄어들었다. 연간 수송인원도 1987년 9675만명, 1991년 4973만명, 1995년 1776만명, 2001년 934만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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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0.04.15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5)(주)전북고속-④IMF 사태부터 현재

▲전북고속으로 새롭게 탄생 전북여객은 1994년 4월1일 5개 노선(17대)의 고속버스 면허를 발급받으면서 상호를 전북고속으로 변경, 새롭게 출범했다. 과거 시내, 완행버스 회사에서 직행고속버스 기업으로 탈바꿈하며 그 위상을 새롭게 했다. 전북고속은 1996년 부도위기에 몰린 전주고속을 인수하고, 1997년에는 풍남여객 경영권도 인수하며 전북지역 여객운송기업의 맏형다운 면모도 보였다. 전주고속이 경영상 어려움 때문에 시장에 매물로 나온 것은 1994년 무렵이었다. 이 때 광주와 대전 버스업계가 전주고속에 눈독을 들였고, 지역사회에서는 전주고속을 외부 기업에 넘겨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 결국 지역의 맏형 전북고속이 전주고속을 인수하게 된 것. 그러나 전북고속은 이 일 때문에 엄청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전북고속 유환상 총무부장은 "전북고속은 전주고속을 인수하면서 예상치 않게 법인 일체를 인수했습니다. 처음 인수전에 뛰어든 1994년 무렵만 해도 차량 61대만 인수할 계획이었는데 협상 과정에서 상황은 그렇지 않게 돌아갔습니다." 전주고속의 채무 문제를 협상하는 과정에서 전주고속 소유의 정비공장과 부동산 등 일체의 자산을 모두 인수하였고, 인수자금 또한 애초 60억원 선에서 120억원 선으로 껑충 뛰었다. 문제는 전주고속 인수 1년 만에 터진 IMF 외환위기였다. 황의종 사장은 "전주고속을 인수하면서 120억원의 채무가 발생했는데, IMF 사태가 터지면서 금리가 36%까지 뛰었습니다. 너무 큰 부담이었습니다" ▲혹독했던 IMF 외환위기 은행 빚 독촉을 피해 사채까지 끌어 써야 했고, 자칫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촉즉발 위기가 전북고속을 엄습했다. 문제는 그동안 유지해 온 지입제의 폐단이었다. 전북고속은 1976년 7월 버스 여객자동차운수사업 개선 명령에 의거해 완전 직영화를 추진했고, 1977년 1월1일부로 완전 직영체제로 운영돼 왔다. 완전직영제란 지입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지입제를 계속해 왔고, 소위 주주기사들도 많았다. 문제는 위기 앞에서 주주의 구실이 실종된 상황이었다. 유환상 총무부장은 "정부가 지입제를 금지했지만 전북고속은 2000년까지 사실상 지입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주들은 지입차주였고, 기름값 등 수송 관련 비용을 제한 뒤 남는 이익금을 가져가는 준직영제 였죠. 사정이 이렇다보니 당시 전북고속은 책임경영, 효율적 경영을 수행하기 힘든 구조였습니다" 당시 전북고속은 주주, 즉 200여명의 지입차주들이 심각한 자금난에 처한 회사를 위해 선뜻 자금을 내놓지 않자 은행 등 금융기관 대출이자 막기가 어려워 사채까지 끌어다 막아야 했다. 이런 가운데 2000년 6월 정기주주총회를 끝으로 임기가 만료된 황의종 사장이 대표이사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신임 사장 체제에 들어간 전북고속의 경영난은 더욱 심각해져 갔다. 은행거래가 두 차례나 정지되는 상황이 연출됐고, 체불임금이 40억원에 달했다. 장기간 임금을 받지 못한 일부 운전사들은 버스를 세워두고 떠났다. 전라북도 대중교통의 중심을 잡아온 전북고속이 좌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고강도 구조조정 단행 문제가 심각해지자 전북고속 종사원들이 황의종 사장의 복귀를 요청했고, 2000년 10월18일 이사회에서 황의종 씨가 다시 대표이사로 추대됐다. 황 사장은 사장 보수를 반납하고 고강도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적자운행이 심각한 노선버스 41대와 예비버스 18대 등 59대 감차, 부동산 매각, 인력감축 등 경영난 해소를 위한 청사진을 내놓았다. 그러나 황 사장의 구조조정안에 대해 노조 등이 반발, 2000년 12월 1일 파업에 돌입하는 등 내홍은 계속 이어졌다. 300여대의 고속직행버스 가운데 30%에 달하는 100여대가 결행하는 바람에 도내 대부분 노선에서 버스운행이 중단되거나 운행횟수가 크게 줄었다. 하지만 황 사장은 2001년 1월1일 운전사와 사원, 주주, 임원대표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고, 308대이던 버스를 260대로 감차 조치하는 한편 임직원도 130명 감원하는 등 혹독한 결정을 내렸다. 특히 지입차를 완전한 회사 소유 재산으로 돌리는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전북고속 경영의 신기원을 이뤘다. 이에 일부 주주들이 버스 번호판을 떼어가는 등 극렬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제2창업 정신으로 새출발 그동안 경쟁력 약화 및 고객 불만 요인으로 지적돼 온 노후 버스를 대거 교체하는 계획도 세워 추진했다. 260대의 노후버스를 신차로 교체하기 위한 예산은 무려 230억원에 달했다. 2001년부터 시작된 신차 교체작업은 2006년에 마무리됐다. 노사가 '다시 타고 싶은 버스 만들기'운동을 펼치는 한편 교통사고 예방과 수입증대에 힘을 합했다. 또 경영안정을 위해 도시와 도시간 운행에 역점을 두어 '군산-익산-부산''군산-인천''전주-보령''군산-익산-전주-경주-포항'노선을 개발하는 등 사업노선 개발 및 유지에 심혈을 기울였다. 1997년 전라북도버스운송사업조합 이사장에 이어 2003년 전국 버스운송사업조합 이사장에 취임한 황의종 사장은 "급격한 자가용 승용차 증가 속에서 승객 감소를 겪고 있는 대중교통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부와 자치단체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며 버스운송사업의 활로를 모색했다. 황 사장은 "2001년 20%에 불과했던 대중교통 유류세 환급비율을 2003년 7월부터 100%로 상향조정했고, 정부 재정지원도 이끌어 냄으로써 비로소 버스운송 기업들의 숨통이 트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북고속의 경우 2009년 현재 90억원 가량의 벽지노선지원금과 재정지원금, 유류세 환급금을 지원받고 있다. 2010년 현재 전북고속은 자회사 전주고속, 풍남여객, 전주시외버스터미널, 1급 자동차정비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전주시외버스터미널(1일 이용차량 865대, 1일 이용객 1만 1000여명)의 서비스 개선을 위해 2007년에 10억원을 투입, 중앙타원형 몰 플랫폼과 최신 냉난방 설치, 그리고 인터넷 예매 등 현대식 리모델링을 실시했다. 2009년도 연간 매출액 583억원, 수송인원 930만명의 실적을 올린 전북고속은 서울, 부산, 포항, 대구, 광주, 춘천 등 전국 234개 노선(면허거리 22만 6892㎞)에서 대중의 벗이 돼 달리고 있다.

  • 경제일반
  • 김재호
  • 2010.04.15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4)(주)전북고속③ 해방부터 1997년까지

1945년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일본 자본은 철수했다. 꿈에도 그리던 광복의 감격으로 사회 전체가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전북여객자동차주식회사는 최승렬 사장과 종업원 대표 결합 체제 하에서 차질없이 운행을 계속했다.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주식 1만9081주는 광복 1개월 후인 9월19일 공포된 관재령 제10호에 따라 미군정 관리에 들어갔다. 당시 전북여객은 1944년 일제가 자동차운송사업 통제를 위해 내놓은'조선자동차사업령'을 계기로 15개 군소 운송회사를 통합한 전북지역 유일의 운송기업이었다. 광복과 함께 전북여객에 투자한 일본 자본이 철수하면서 최승렬 사장 체제의 전북여객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전북여객의 운명은, 조국의 운명처럼 그리 녹록하게 풀리지 않았다. 1950년 6월25일 6.25전쟁이 터지면서 전북여객 보유 98대의 버스 중 39대와 택시 20대가 인민군 등에 의해 약탈파괴방화됐다. 황의종 사장은 "그 와중에서 버스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회사 임직원들이 큰 고초를 당했습니다. 당시 최한규 사장이 사망했고, 일부 간부사원들은 북으로 끌려가거나 행방불명되는 등 인명 피해가 컸습니다. 정상적인 버스 운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죠"라고 전했다. 하지만 얼마 후 9.28 수복과 함께 전북여객도 정상 운행에 나서 전쟁 속에서 묶인 도민들의 발이 됐다. 전쟁 중에 임직원들이 버스 운행 정상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고, 파괴되지 않은 버스 59대로 회사를 재건했다. 정부에 귀속됐던 일본인 주식 1만9081주를 불하받았고, 전북대학교 후원회 재단 1만3081주와 전북향교재단 6000주도 불하받음으로써 자본금 200만환에 총주식 4만주 규모였다. ▲지입제에서 직영체제까지 전쟁이 끝나고, 사람과 물자 운송량이 많아지면서 운송업은 성장 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우리나라 자동차운송업계의 경영방식은 일본에서 2차대전 패전후 성행했던 지입제였다. 지입제는 차주가 자동차운송사업면허를 갖고 있는 회사에서 운송업을 영위하며 이익을 얻는 대가로 일정액의 수수료를 지불하는 형식이다. 이 때문에 재정력이 부족해 운송사업을 할 수 없는 사업자들도 차주들이 넣은 지입차량 몇대를 갖고 사업을 벌였다. 음성적인 지입차량이 많아졌고, 기업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이같은 사정은 전북여객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정부가 1957년 5월8일 자동차운송사업면허의 제한방침을 공고(58조치)하고, 자동차운송사업면허를 사실상 동결했다. 하지만 자동차운송사업면허를 동결한 정부가 한쪽에서는 계속 자동차 면허를 내주는 바람에 음성적 지입제가 만연되는 등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이는 사업자와 차주 모두의 이익 때문이었다. 사업자는 잠시 명의만 빌려주고 짭짤한 지입 수수료를 챙졌고, 지입차주도 수입이 좋았다. 시발차(최무성이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 변속기, 차축을 이용, 드럼통을 펴서 만든 지프형 승용차. 첫 국산차) 1대를 8만환에 구입해 15개월 운행, 차값의 9배 수입을 올렸다. 15개월 후 중고차로 내놓아도 35만환을 받았으니 부자들이 지입차에 눈독을 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정부는 1960년 5월27일 5.27고시를 통해 차주신고제를 도입했지만 업계 반발에 부딪쳐 실패했다. 하지만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반전돼 정부의 운송사업 기업화 정책은 속도를 냈다. 그렇지만 지입제가 영세 사업주와 차주들에게 주는 이익이 워낙 커 대부분 버스운송사업체의 직영 경영체제는 거의 형식에 불과했다. ▲창업 이래 최대 전성기 누려 지입제를 둘러싼 시비에도 불구, 1960년 이후 전북여객은 창업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자본금을 증액하고, 차량을 증차 또는 인수하는 등 사세를 크게 확장해 나아갔다. 1962년 8월7일 운송사업경영면허 갱신시 총 노선수가 134개에 달했고 1일 운행횟수 219회, 1일 총운행거리 1만9782㎞였다. 회사는 성장을 거듭, 1986년 차량 보유대수 548대, 종업원수 1500명, 연간 수송인원 9800만명에 달했다. 이는 전국 여객회사 중 제일 많은 차량과 수송인원으로 기록됐다. 1968년 12월19일 1급자동차정비공장 인가를 받아 차량 정비업에 진출했고, 1971년 10월7일 진안 공용정류장, 1974년 4월15일 전주시외버스공용정류장을 인수하여 정류장 사업도 겸하게 됐다.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1983년에는 주택건설사업 면허를 획득, 아파트 건설을 하기도 했지만 실적 저조 등 문제점이 발생해 면허를 반납했다. 벽지 오지주민 교통 편익을 위해 무진장, 임실, 순창 등 산간부의 20호 정도되는 마을까지 버스를 운행하면서 도민의 사랑을 받았다. 전북일보 창간과 전북은행 창립 시에 자본을 투자하며 협력했고, 씨름선수단 육성, 불우이웃 돕기 등 각종 지역사회와 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 벽지노선 운행과 관련해 대통령표창, 장관표창을 다수 수상하고, 지역사회 경제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돼 은탑산업훈장(1회), 석탑산업훈장(2회), 대통령상(3회), 장관상(10회) 등을 수상했다. 또 정부인가를 받아 평화여객(현 안전여객), 제일여객, 군산여객, 우성여객을 설립케 했고 금일여객, 남원여객, 무진장여객, 임순여객, 풍남여객을 설립하는 등 전라북도 대중교통 발전을 선도해 왔다. 전북여객은 1993년 12월 고속버스사업 면허를 받으면서 상호를 전북고속으로 변경했다. 이어 1996년 전주고속을 인수하고, 1997년에는 풍남여객 경영권까지 인수해 계열사로 운영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4.08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654고시'란

5.16 군사 혁명정부 치안국은 5.16 직후 15일동안 범법차량 8000여대를 적발, 이중 230여대를 폐차처분했다. 특히 혁명정부는 혁명 2개월만인 7월15일 전격적으로 '654고시'를 발표하는 등 초강경 자세를 보였다. 654고시는 영업용차량의 지입제를 전면 폐지하는 등 자동차운송사업의 기업화를 유도하는 정책으로, 5.27고시를 한층 세분화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자동차운송사업자들은 지입제 형태를 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큰 돈이 없는 상황에서 지입차주들로부터 프리미엄과 지입료를 받아 손쉽게 자동차운송사업을 할 수 있는 매력 때문이었다. 이와관련 황의종 사장은 "당시 버스업계는 돈방석이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앞다퉈 조립자동차를 구매해 버스회사에 들어갔다. 지입차는 형식상 버스회사에 정식 등록된 차량이지만, 실제로는 개인 소유의 차량이다"라며 "정부는 지입차의 폐단을 없애고, 여객운수업이 기업화를 통해 효율적 경영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61년 654고시를 발표, 차량과 인사, 회계를 회사가 직영토록 한 것은 의미 있는 조치였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어 1962년 1월 자동차운수사업법과 도로운송차량법을 각각 개정 공포했다. 이 법률에 따라 교통부는 그동안 치안국에서 담당했던 자동차의 차적 등록업무를 이관받았다. 또 이 법률에 따라 자동차 등록은 운송사업면허를 받은 사업자 명의로만 가능하고, 소유권에 대한 국가의 보호도 명의인, 즉 사업주에게만 부여됐다. 지입차주는 자기 차량에 대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됐고 횡령 등 사회문제가 잇따라 발생했다. 정부는 654고시가 지입제의 음성화만 초래했다고 판단, 1964년 9월15일 교통부 고시 제1111호를 통해 기업화를 압박했고, 이어 1976년에도 차주를 인정하지 않는 기업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형식적 직영경영체제는 1997년 무렵까지 계속됐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4.0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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