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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내면의 자유를 찾아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대한 이해가 선행되거나 같이 읽어야 『그리스인 조르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누군가가 말한다. 온전한 이해도 좋지만, 좀 부족한 이해, 오독의 즐거움도 없진 않을 것이다. 또 몇 구절만으로도 그 책이 가지는 향취에 흠뻑 젖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처형대에서 죽음을 앞두고 목청껏 외친다. "프리덤!" 전혀 다른 장르, 다른 내용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 조르바』와 〈『브레이브 하트』를 연결시켜준 것은 바로 이 '자유'라는 단어 때문이다. 우리 인간에게 숨을 쉰다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 '자유'! 미국의 독립운동가 패트릭 핸리는 외친다. "하느님, 우리에게 자유를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음의 잔을 들게 하소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주소서." 자유를 부르짖는 맥락은 다르지만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가치로운 덕목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서른다섯의 젊은 서술자, 이 소설의 '나'는 부처의 가르침을 탐구한다. 그가 고용한 '조르바'는 가족도 명예도 세속적인 부도 아무것도 없다. 예순 살이 넘은 몸밖엔 가진 게 없다. 그러나 지식인인 서술자 '나'를 흠뻑 매료시킨다. 조르바의 모든 말과 행동 속에서 '나'가 탐구하고 있는 붓다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붓다가 이룬 열반의 세계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걸림이 없는 세계이다. 육체와 영혼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 무장무애의 자유의 경지 아니겠는가? 조르바는 오입쟁이이며 여자를 성욕을 충족시킬 대상으로만 바라본다는 비난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르바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자유를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여자도 인간일까요? " 이 말은 가정과 사회의 온갖 편견과 제도와 종교의 고정관념 속에 묶여있는 여자가 아닌, 속박되지 않은 본능과 자유의지를 가진, 자유의 등가물, 인간으로서 여자를 보고자 하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었다.조르바는 현재를 산다. 그가 과거에 오입쟁이였건 이국의 전장에 날뛰던 용병이었건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는 현재의 시간 속으로 계속하여 다시 태어난다. 조르바는 과거에 살지 않고 현재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더구나 미래에 현재를 저당 잡히지도 않고 미래 따위는 믿지 않는다. 문득 금강경의 한 구절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 떠오른다. 어디에고 얽매지지 않는 대자유인, 궁극의 자유, 열반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술자 '나'가 추구하는 바가 붓다의 세계라면 나의 해석도 크게 오독은 아닐 것 같다. "「두목 저게 무엇이오?」그가 놀라도 크게 놀라면서 물었다. 「...... 두목 저 건너 가슴을 뭉클거리게 하는 파란 색깔, 저 기적이 무엇이오? 당신은 저 기적을 무엇이라 부르지요? 바다? 바다? 꽃으로 된 초록빛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저것은? 대지라고 그러오? 이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지요? 두목, 내 맹세코 말하지만, 내가 이런 걸 보는 건 처음이오.」" 조르바는 미쳤다. 만날 보는 바다와 대지를 두고 맹세코 처음 본단다. 60을 넘긴 조르바는 늘 아기의 눈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나'는 조르바로 하여 자유를 발견한다. 조르바가 광산의 석탄을 효과적으로 나르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케이블 고가선을 설치하려다가 그게 왕창 무너져 버렸을 때, 필생의 사업일 수도 있는 사업의 그 완전한 실패 앞에서 '나'가 한 말을 상기한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고 말 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조르바처럼 살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자유 없이는 살 수 없다. 지난여름 니코스카잔차키스의 혼이 서려있을 지중해를 따라 여행하면서 틈틈이 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정치적인 의미와는 다른, 종교적인 의미와는 또 다른, 그러나 다르면서 같은, 내 내면에서 메아리치는 자유와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복효근 시인은 1991년'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남원 금지중 교사로 일하고 있다.

  • 주말
  • 기고
  • 2012.10.19 23:02

자유와 희망 찾아가자 - 할레드 호세이니 소설 '연을 쫓는 아이' 김관식씨 서평

연은 종이에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서 붙여 줄에 매달아 공중으로 날리는 놀이기구다. 우리의 과거 문헌을 들여다보면 연은 놀이 뿐만 아니라 액을 쫓는 의식이나 의사전달의 수단으로 그리고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연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창공을 가르며 줄 끝 반대편의 존재와 팽팽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연은 하늘을 자유로이 날고자 하는 소망을 대신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한 줄에 의해 구속되어 있을 때 날아올라 창공을 휘저을 수 있는 것이다. 소설 '연을 쫓는 아이들'은 이러한 연의 속성을 소설의 전편에 드러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유망한 가계의 부유한 집안에서 아버지 바바의 아들로 태어난 아미르 그리고 그 집 하인 알리의 아들로 태어난 태어난 1년 터울 하산은 어린 시절을 주인과 하인 사이로 친구처럼 지낸다. 그러나 1975년 겨울 연날리기 대회 우승 이후 연을 쫓던 하산에게 일어난 사건을 외면하게 되고 그들의 관계는 소원해진다. 결국 아미르의 모함으로 알리와 하산은 바바의 집을 떠나게 된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혁명과 전쟁, 내분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바바와 아미르는 조국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생활을 한다. 만족한 결혼 생활에도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성공한 작가 아미르는 2001년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정신적 지지자였던 라힘 칸의 전화 한통을 받고 파키스탄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지배했던 위선으로 뒤틀린 사실들을 직면하고 외면했던 상처를 감싸안기로 한다. 알리는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아들 소랍이 남아있는 조국 아프가니스탄으로의 위험한 여행길에 오른다. 어린시절 아세프가 하산에 가했던 성적 폭력이 광기 어린 내분의 와중에 소랍에게도 행해졌음을 안 아미르는 목숨을 건 행동으로 소랍을 구해 미국으로 되돌아오기로 한다. 소랍은 그 와중에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자살을 시도하고 실어증의 상태가 되어 함께 돌아온다. 공원에서 희미하게 미소 짓는 소랍과 함께 연을 날리며 마침내 끊어진 연을 쫓는 아미르는 자유로움과 희망을 얻는다. 소설의 호흡은 팽팽한 날아오르기와 느슨히 하강하기 그리고 다시 팽팽히 날아오르기처럼 연 날리기와 닮아있다. 아미르와 하산은 연과 얼레 사이 연줄과 같이 드러나지 않는 이복혈연의 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있고 소용돌이치는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현실이 있다. 그것은 광복과 내분, 전쟁 그리고 구데타 등의 우리의 근현대사를 가로질러 가는 역사적 흐름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소설 속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필자를 포함하여 주위에서 많은 이들이 겪는 관계와 정서적으로 매우 유사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소설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마치 몇몇 단어만 바꾸면 우리 이야기를 읽고 있는 듯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소설은 상처를 준 것 때문에 고통 받는 받는 아미르와 상처받는 하산의 이야기이다. 우리의 삶이란 어쩌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에게 상처받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고통과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승화시키는가에 따라 인생의 가치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저자 할레드 호세이니는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으로 의사로서 소설을 쓰는 작가였으며 현재는 유엔의 난민국에서 NGO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삶이 그의 소설에 가치를 더할 수 있기를 응원하고 싶다. 필자는 이 소설을 교수 생활을 접고 개원을 한 이후 불안정한 시기에 읽었다. 그때 스스로 자신의 상처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위선을 함께 감싸안고 자신을 용서해가는 아미르의 여정 속에서 함께 아파하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이후 조금은 평온해진 요즘 다시 읽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다시 읽는 지루함을 주지 않았고 여전히 필자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연을 하나 날려 저 창공으로 놓아주었으면 좋겠다.마지막으로 떳떳치 못한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바바가 아미르를 무릎에 앉히고 자신을 향한 향한 채찍처럼 들려준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가 되새길만하여 인용하고 싶다. "네가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한 생명을 훔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아내에게서 남편에 대한 권리를 훔치는 것이고 그의 자식들에게서 아버지를 훔치는 것이다. 네가 거짓말을 하면 그것은 진실을 알아야 할 다른 사람의 권리를 훔치는 것이다. 네가 속임수를 쓰면 그것은 공정함에 대한 권리를 훔치는 것이다.*김관식씨는 종양학을 전공한 산부인과 전문의며, 전북작가회의 회원이다. 현재 자인산부인과 원장.

  • 주말
  • 기고
  • 2012.10.05 23:02

악마의 맷돌, 시장경제의 허실을 보다

지난해 뉴욕 맨해튼에서 시작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시위는 대형 금융기관들의 탐욕과 부패를 비난하는 데서 촉발했다. 이 운동은 신자유주의로 위장된 시장경제의 수탈과 착취, 금융과 지대 수탈에 따른 부의 이전, 절대 다수의 빈곤, 1%가 99%의 부를 독점하는 초양극화의 불평등에 대한 분노였다.전북대 원용찬 교수(경제학)가 세계적으로 확산된 아큐파이 운동을 보며 시장자유주의의 메커니즘을 근원적으로 비판한 칼 폴라니(1886~1964)를 주목했다. '칼 폴라니, 햄릿을 읽다'(당대 출판).저자는 책의 시작을 '햄릿'이야기로 시작한다. 경제학자와 햄릿,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조합은 그러나 폴라니의 주장을 이해하는 핵심이다.'아버지의 복수를 미루고 견디며 사느냐(to suffer and to be)' 아니면 '운명을 당당히 받아들이고 죽느냐(to take arms and not to be)'를 고민하는 햄릿처럼, 시장경제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총체성을 잃고 지리멸렬한 노동으로 '밥'을 벌든지 아니면 이를 거부하고 굶주릴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다.폴라니는 이 선택을 두고 인간은 죽음으로 인해 언젠가는 자신의 영혼을 잃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체념'하라고 한다. 그래야'자유'를 깨닫고 인간 영혼에 원래부터 있던 품격과 창조적 개성, 그리고 평등을 지향하는 공동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파악했다.시장 자유주의자의 주장이 가진 몰역사성과 허구성을 밝히기 위해 폴라니는 인간의 경제에서 교역화폐시장이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이 개별적으로 발전해 왔음을 보여준다. 폴라니는 또 시장경제를 '악마의 맷돌'로 표현했다. 공동체가 뿌리째 뽑히고, 삶의 동기와 존엄성이 파괴된 채 언제든 시장의 화폐요구에 복속될 수밖에 없는 맨 몸뚱어리로 전락한 것이 시장경제라는 '악마의 맷돌'이 갈아버린 결과라고 본 것이다.저자는 "오래전 대학원 석사시절에 일본에서 왕성하게 연구되고 있던 폴라니의 경제사상과 경제인류학을 접하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며, "월가의 저항운동을 보면서 폴라니의 숨결과 생각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세계질서와 시장 자본주의를 새롭게 바꾸려는 힘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말했다.저자는 또 폴라니가 역설한 애초 한 몸이었던 '경제'를 '사회'에 되묻어 인간이 이웃과 함께 공동체의 터전을 회복할 때 '거대한 전환'이 마련될 것으로 결론을 냈다.

  • 주말
  • 김원용
  • 2012.09.14 23:02

멸망한 고조선 유민들의 구만리

90000리(다산책방)를 쓴 소설가 이병천은 작가의 말에서 (고)조선 유민과 예수의 만남이라는 설정 자체에 대하여 주변에서 보인 반응을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다는 실소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분노에 걸친 부정적 반응에 작가가 의외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고조선 유민과 유대 성인의 만남은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다. 이런 상상이 불쾌하다면 우리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진 모든 관행을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상상 속에서 만남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 다음에는 그들이 어떻게 만났는가를 차근차근 보여주는 것이 순서이다. 이것이 작가가 스스로를 일컬어 수공업자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라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풀려나왔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게 그리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구절은 작가의 말을 배신한다. 시간에도 어쩌면 틈이란 게 존재하는지 모른다. 문틈이나 바위틈처럼 그 틈새에 놓인 사람들은 이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한다. 그냥 같은 공간만을 공유할 뿐. 그렇지 않다면, 그리메와 에데사 성기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무리가 만나지 못한 일을 설명할 도리가 없어진다. 작가가 열심히 설명하려고 애쓰는 모양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소설의 몫은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90000리에서 추적의 테마는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제국의 북군 교관 융커가 그리메와 달하의 뒤를 는 장면에 다음과 같은 묘사가 있다. 부하 중 한 놈은 어떤 동물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는 듯했다. 길 위에 남겨진 말 발자국뿐 아니라 풀잎을 뜯어 냄새를 맡거나 때로는 입안에 모래를 한 움큼 집어넣어 맛을 보면서까지 치밀하게 그리메와 달하의 행적을 좇았다. 모래 맛의 자극보다 어떤 동물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는 듯했다는 표현의 섬세함, 갖추고 있었다라고 설명하지 아니하고 있는 듯했다고 망설이는 필세가 독자로 하여금 작중화자의 동선을 따라가도록 손을 내밀고 등을 떠미는 역할을 한다. 이런 묘사가 작가의 언어 구사력이 여전히 1급수처럼 맑음을 보여준다. 거시적인 틀에서 90000리의 얼개는 하늘, 나라, 별, 곱자 등의 핵심어 위에 세워져 있다. 나라가 과연 무엇일까? 잃어버린 나라, 고조선에 대한 향수는 식민과 분단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한국인의 심성을 자극할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국가 또는 민족이라는 다른 용어로 번역되는 순간, 그 의미의 확장은 순식간에 동이족을 넘어가 버린다. 좋건 싫건 세계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2000년 전의 나라는 어떤 의의를 제시하는가? 시작을 돌아본다는 뜻에서 이런 문제 제기는 숙고의 기회를 제공하는 미덕을 발휘한다. 그렇지만 황금으로 바뀐 기적의 곱자가 몽금척 설화를 통하여 근세조선으로 연결되는 지점은 불편하다. 조선이 계승과 극복 어느 한 쪽으로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일진대 유구한 전통이 종종 계승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제사장 성기와 그의 아들 그리메가 나라를 되찾는 방법을 두고 대립하는 것은 여느 조직에서나 강온파가 대립하는 보편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그들이 각자 추구하는 해결 방식이 구만리 여정에 가장 큰 긴장으로 작용하고 있다. 칼리와 융커 역시 잃어버린 초원의 나라에 대하여 상이한 접근법을 주장한다. 갈석산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구만리의 여정은 그 규모로 말미암아 인물들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각자의 특성을 보여주려고 부단히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방대한 배경 속에서움직이는 인물들이 각자의 잣대로 상대를 재단하려 든다면 통교가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들이 종족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비단길 위에서 나그네로 만나 서로 관계를 맺는 과정이 이채롭다.  ※ 이 글은 지난 6월 전북작가회의 월례문학토론회에서 발제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문학평론가 정철성씨는 전주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주말
  • 기고
  • 2012.09.13 23:02

책을 덮으면 길이 보인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폐기하기로 한다. 책을 신앙처럼 생각하며 안개 자욱한 길 없는 길에서 얼마나 헤맸던가.책 속에서 인생의 빛나는 순간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새벽별처럼 가뭇없이 사라져간다. 이제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이 한낱 문자 기호의 배열일 뿐이었음을 뒤늦게 고백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이유는 마지막 페이지를 다 덮지 못한 탓이다. 정민 선생의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 2011)을 읽어가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린다.다산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운명적인 만남을 그려내고 있는 이 책의 첫 마디는 '과골삼천'(과 骨三穿).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씩이나 뚫릴 정도로 치열했던 공부의 자세를 보여주는 다산 선생과 그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황상의 일화는 절창이다. 두 사람의 만남이 아름다워서 절창이기도 하지만, 가슴에 오래 새겨두고 곱씹을 만해서 절창이다."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런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황상의 말은 스승과 제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가르침의 미덕이 자본화된 요즘 더욱 사무친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현상도 그렇지만 남 탓, 세태 탓으로 모든 허물을 덮으려는 곡해의 자세가 부끄럽다.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잠깐 등 돌린다고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애써 부정한다고 그 인연을 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멀고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거칠기만 하다. 짧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오로지 책 속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우매한 행태의 반복 탓이라는 생각이다.그래서 잠깐 책을 덮고자 한다. 애초에 책은 스승을 향해 가는 길, 제자를 찾아 떠나는 여정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책 속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자체가 길이라는 뜻이다. 그 관계의 지향성을 무시한 채 책 속만 들여다보았으니 아무래도 소견이 좁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소견은 좁을지라도 과골삼천의 자세마저 버려서야 쓰겠는가!모두 마흔네 개의 마디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마흔한 번째 마디에는 황상이 쓴 '회주 삼로에게 드림'의 한 대목이 있다. "종유했던 여러 분이 차례로 세상을 뜨매, 비유컨대 다락에 올라갔는데 사다리가 치워지고, 산에 들어가자 다리가 끊어진 격이라 하겠습니다."가르침을 받았던 스승들이 세상을 뜬 후 어지러운 소회가 잘 드러나 있다. 이 구절에서 비유하고 있는 '사다리'와 '다리'는 책으로 읽힌다. 비약적 읽기가 허락한다면,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읽어보고 싶다. "책을 덮어야 길을 얻을 수 있다."가르침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제자에게 길을 보여주고는 곧 그 길을 지워버리는 것. 길이 끝나야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깨달음의 기회를 주는 것. 애초에 스승의 길은 옛길이었으니, 그 길을 지나 제자는 마땅히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것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어지는 공부의 과정이었을 것이다.그러고 보면 책은 잘못이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책 속에 길이 있을 거라고 순박하게 믿었던 독법이 문제다. 책은 다만 책이고자 했을 뿐, 애초에 빛나는 길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책은 오히려 무수한 오독의 발자국으로 어지럽혀진 진흙탕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서 아직 밟아보지 않은 처녀지를 찾고자 했던 어눌한 책읽기를 탓할 뿐이다.그래도 깨우친 것이 있다면, 길은 책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산 선생이 보여주고 싶었던 가르침의 순간이자 황상이 깨달았던 배움의 극치이리라. 그러므로 이제 '삶을 바꾼 만남'을 버리고자 한다. 책을 버리는 순간 비로소 스승을 얻게 될 것이니, 책 속의 길이 아니라 그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한다. 손에서 책을 높고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디며 다가올 '운명'의 순간을 기다려본다.※ 문신 시인은 2004년 전북일보,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 '물가죽북'을 펴냈다. 현재 전주문화재단에 근무하고 있다.

  • 주말
  • 기고
  • 2012.08.31 23:02

자기기만에서 깨어나라

세계문학의 걸작, 중국 루쉰의 '아Q정전'(창비). '아Q정전'에서 주인공 아큐를 만나고 정신이 번뜩 났던 기억은 나를 늘 새롭게 한다. 사람의 무지성과 착각의 측면을 여지없이 한방에 잘 표현해 주었기 때문이다. 작가 루쉰이 중국을 대변해서 작품을 통해 아큐라는 인물을 내세웠다는데, 어쩌면 오늘 날의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살다간 중국의 지성인 루쉰, 그는 암흑의 구름에 가려진 중국이라는 자국을 아큐라는 인물을 내세워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봉건사회에 대한 도전과 함께 중국사회의 이정표역할을 아주 적절하게 했다. '아Q정전'은 중국의 신해혁명 시기의 농촌생활을 소재로 '아Q'라는 품팔이꾼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표사했는데, 이것이 중국 국민의 나쁜 근성을 빗대어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역사적 측면을 빼어놓더라도 아큐는 인물로서 우리에게 어떤 각성을 요구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인물로서 아큐는 무지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늘 자신을 합리화하기에 바쁘고, 착각하기에 바쁜 인물로 정신 승리법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왜 죽어가는 지도 모르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착각을 위해서 늘 최고의 생각을 만들어 내는 주인공 '아Q', 여기에서 나는 피비린내 나는 자기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달았다. 비겁한 '아Q'는 상대를 비교해 보아 약한 사람에게는 우쭐대고 깔보지만, 자신 또한 희롱당해도 정신승리법으로 자신을 무장하기 때문이다. 작가 루쉰은 깨닫지 못하는 대중을 치료하고자 했다지만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심리적 이기심과도 밀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강자에게 아첨하고 스스로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고 환성에 젖어 있는 자신의 민족에 대한 루쉼의 힐책.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이같은 힐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고전이란 시대와 상관없이 이 시대를 또한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아Q'의 처형장면은 수많은 심층적 파장과 함께 한다는 측면에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죽음에 가는 순간까지 내가 왜 죽는 지도 모르는 '아Q'는 어찌 보면 이 시대의 구조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쩌면 문명에서의 상대적 소외감은 그렇게 밖에 자신을 위로 할 수 없는 아큐라는 인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의 역사는 서양제국의 침략으로 반삭민지로 급락하는 역사를 안고 일어서야 했다. 그러나 루쉰에게 보이는 중국은 고통스럽게 그 자체로서 봉건사회의 유고적인 폐습이었다. 중국의 유교적 폐단으로 국민성의 후진성이 중국을 더욱 절망으로 내모는 원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정신을 개선하기 위한 몸부림은 1919년 문화혁명으로 들어 났지만 이러한 암흑의 시대에 내세운 아큐라는 인물은 오늘 날에도 여지없이 우리와 관련이 깊다는 것에 나는 주목한다. 가끔 눈을 뜨면 아큐가 떠오른다. 루쉰보다도 주인공 아큐가 떠오르는 것은 내 자신이 또 다른 내 자신에게 비판의 비수를 꺼냄을 시작하는 것이다. 과히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가 아니더라도 아큐처럼 자기만의 정신 승리법으로 죽음이 이르기까지 자신을 모르고 죽는 '아Q'를 통해 나 자신을 얼마나 바르게 알고 죽을 수 있는 것인지 자문한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 때 내 삶은 조금 암담하고, 그렇지만 또 다른 희망으로 시작할 수 있다. 무지는 자기기만과 함께 선행되기 때문에, 끔찍한 자기기만으로부터 깨어나야 하는 절박함은 또다시 뜨겁게 가슴에서 치밀어 오른다. 또한 이것이 희망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 이은송 시인은 인문 고전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북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 주말
  • 기고
  • 2012.08.24 23:02

당신, 지금 행복하세요?

지난달 나라에서 베풀어주는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다. "스트레스성 만성 위염입니다." 의사는 그 나이에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는 말투였다. 더 나쁘게 진행되지 않았다는 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앞으로는 정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정신건강검진까지 해주겠단다.이 대목에서 당신에게 묻는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몇 평인가. 연봉은. 아내의 명품백은 몇 개인가. 올해 가족들이 해외여행은 다녀오셨는가." 이 물음에 고개 숙인 당신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 '똥침만 맞으며' 살아온 거다. 그렇다고 아직 절망하지는 마시라. 실패는 귀한 자산이며 기회는 얼마든지 온다고 친절히 위로해주니까. (과연 이 말을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른지 모르겠지만.) 이를 위해 우선 당신이 지불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중 마음대로 골라보시라.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고 시작하는 '피로사회'(문학과 지성사)는 저자 한병철 씨가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오늘의 서구사회를 분석한 철학서이자 동시에 문화비평서다. 여기서 저자는 21세기 사회를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한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규율사회'는 금지의 부정성을 통해 '~해서는 안 된다'가 지배적인 반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음' 이라는 긍정의 도식을 통해 주인 스스로 노동하고 노예가 되는 노동수용소이며, 이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는 것이다. 올해 초 정부의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안(시간당 4860원)에 대해 아파트 경비원들이 정부에 자신들을 예외로 인정해 달라고 탄원을 냈다. 정부안대로 임금이 인상될 경우 CCTV로 대체 돼 결국 일자리을 잃느니 현재의 월 90여 만원 처우에라도 만족하겠다는 결연한 각오였다. (이 어르신들은 365일 내내 휴일도 없이 24시간 맞교대로 근무한다.) 고맙게도 누구에게나 기회는 골고루 주어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 국가에 우리는 살고 있다.현재 21세기 한국사회 역시 '성과제일주의'에 매몰돼 있고 이에 따른 폐해와 심리적 질환에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 어쩌면 그 정도는 서구를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OECD 국가 중 최장의 노동시간과 최고의 자살률은 지금 우리의 현주소이다. 1등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금메달만이 기억되며 명품 앞에 줄을 서는 우리의 삶은 '스스로를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 착취하고' 있다.저자는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고 성과사회는 우울증과 낙오자를 만든다' 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성과사회의 과잉활동과 과잉자극에 맞서 그 대안으로 '사색적인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만이 이 병폐를 치유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다시 당신에게 묻는다. 지금 행복하신가.△ 권오표 시인은 1992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해 시집'여수일지'를 펴냈다.

  • 주말
  • 기고
  • 2012.08.10 23:02

이 시대, 보통사람들의 반성문

'나 참 어리광 많이 부리고 살았네요. 내 마음에 맞는 친구는 어디에 꼭꼭 숨어있냐고, 세상엔 왜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 귀하냐고, 사람들은 왜 진실을 외면하냐고, 어지간히 어리광을 달고 살았네요.'김영 시인(52·사진)이 자전적 에세이 '잘 가요 어리광'을 냈다(도서출판 북 매니저)."다수의 자전수필의 결함이 자신의 자랑이나 은근한 과시욕에서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김영의 글은 과거의 아픔이나 부족함을 진솔하게 표현하여 독자들에게 거울이 되게 하는 선도적인 면을 만들어주고 있다." 소설가 라대곤씨가 서평에서 이렇게 적은 것처럼 산문집 제목이 된 '잘 가요 어리광'에서도 시인의 이야기는 곧 보통 사람들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내가 다른 사람 마음에 맞는 친구도 되어 주지 못했고, 내가 의리를 지키지 않은 적도 아주 많았고, 내가 진실을 외면하고 살았으면서도 항상 다른 사람을 탓하고 어리광을 부렸네요. 내가 배려하고, 내가 지켜주고, 내가 진실할 게요.'로 시인은 어리광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산문집은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면서 그곳에서 만난 자연, 사람들을 통해 시인의 어제와 오늘을 이야기 한다. '등산을 좋아했다. 많은 산들을 다녔다. 오르고 또 올랐다. 젊은 한 때 정상을 정복하는 연습을 하며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가 길을 알았다. 길을 떠나서라도 기어코 정상으로 오르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길은 질러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돌아가야 제 맛이다. 길은 황송할 만큼 공손한 기울기를 갖고 있다.'시인이 서문에서 밝힌 겸허한 삶의 자세가 글 전체를 관통한다. '흔들림이 존재 밖에서 타의로 일어나는 움직임이라면 떨림은 존재 안에서 자의로 일어나는 움직임이네요. 흔들림이 존재가 휘청거리는 시간이면 떨림은 마음이 반짝이는 시간이네요. 기대가 있는 사람만 떨림이 있데요'. 산문집 첫 글을 장식한 '떨림'에서 올레길 걷기에 나서는 기대와 설렘을 이렇게 드러냈다. 시적 감각과 동심의 순수함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즐거움이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을 한라산의 옆구리를 간질이며 지나가고 있어요. 어둑어둑한 길이지만 그녀가 해맑은 아침얼굴로 살짝 웃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한라산 머리에 별이 송이송이 매달렸어요'('꺼병이'중에서)저자가 직접 촬영한 제주도 올레길 사진들을 함께 만날 수 있다.1995년'자유문학'으로 등단한 김 시인은 시집 '눈 감아서 환한 세상''다시 길눈 뜨다'와, 수필집 '뜬 돌로 사는 일'등을 냈다. 김제 만경여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시인은 독서대상 대통령상·신지식인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전북여류문학회 회장을 활동했다. 올 연초 전북시인협회가 수여하는 제12회 전북시인상을 받기도 했다.

  • 주말
  • 김원용
  • 2012.08.03 23:02

육체와 실존, 그리고 희망의 미학…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여기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로 시작하는 한 편의 소설이 있다. 그리고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꼭."으로 끝나는 그것은 1976년에 발표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성과 힘 펴냄이하 난쏘공)이다. 이 소설은 제목이 말해 주듯, 난장이라는 기형의 육체 위에 쓰인 이야기이다. 더구나 12편의 연작소설로 묶여 1978년에 완간된 '난쏘공'은 난장이 개인을 넘어 난장이 일가(一家) 혹은 난장이 집단의 노동과 실존을 위한 일그러진 육체의 계보학이다.하지만 이들 일그러진 육체들은 결코 존재 그 자체가 아니다. 단지 거인의 시각에 의해 상대적으로 평가되어 지칭되는 그것은 신체상의 특징 혹은 장애, 하나의 차이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 체계는 이들을 난장이라 '부르며' 난장이라는 낙인, 그 기표를 한 육체 위에 새겨 놓고 타자로 소외시켜 버린다.물론 조세희는 이 난장이의 육체를 주체로 복원시키려고 한다. 재개발 지역 철거민을 둘러싼 도시 노동자의 육체가 실존을 위해 몸부림친 상황, 1970년대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과 폭력을 고발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사회사적 입장이나 계급론적 관점, 민족문학론적 문제 의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 짧은 시적(詩的) 문체 등의 형식 미학적 기법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판금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던 이 소설이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미시 서사가 자리 잡은 현재에까지도 독자층을 형성하면서 우리 문단 사상 가장 오래도록 팔린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인간의 기본권이 말살된 '칼'의 시간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난쏘공'이 바로 조세희 자신의 육체로 쓰인 서사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실제 조세희는 경제적 핍박자들이 몰려 사는 재개발 지역 동네에서, 세입자 가족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다가 철거반과 싸웠다고 한다. 돌아오다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고, 난장이 연작은 그 노트에 의해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책상 앞에 며칠 밤을 새우고도 제대로 된 문장 하나 못 써 절망에 빠졌던 것도 바로 나였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문학 현장을 육체로 직접 '살아버림'으로써 난장이 육체를 위한 이야기를 '펜'이 아닌 자신의 '육체'로 썼던 것이고, 그 이야기를 다시 '노트'가 아닌 자신의 '육체', 그 곧은 척추와 따뜻한 심장에 새겨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난쏘공'이 나온 지 30년이 넘었는 데도 우리의 삶은, 우리의 육체적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조세희는 다시 말하고 있다. 1970년대는 떠올리기도 싫다고 고백했던 그는 요즘의 상황이 그 70년대보다도 더 심하다고 부끄러워한다. 일 년에 1억 원을 호가하는 피부 관리를 받는 눈부신 육체가 있고 무상 급식을 기다리는 절박한 육체가 있으며, 바람 길과 조망권까지 고려하여 개발되는 한강변 초고층 아파트의 안락한 육체가 있고 도심 난개발로 화염병에 참사당한 용산 세입자 상인 철거민의 참담한 육체가 있음을 볼 때, 거인과 난장이라는 육체의 집단화, 계층화, 세습화 현실이 절망적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이 절망을 위해 조세희는 '난쏘공'에 두 개의 우화를 숨겨 두었다. 그것은 멸종당한 도도새와 살아남은 개똥벌레 이야기이다. 도도새는 날개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날개가 퇴화되었고, 나중에는 날을 수가 없게 되어 멸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도새보다도 작은 개똥벌레는 "이 세상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개똥벌레를 잡아죽였지"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스스로를 "나는 벌레야"라고 일컫던 난장이 이야기 '난쏘공'에서도 개똥벌레는 살아남아 그 작은 육체에 반짝이는 불을 달고 날아다닌다. 절망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희망, '난쏘공'이라는 텍스트가 아름답게 살아남은 것은 또한 이것 때문일 것이다.△ 김혜원 시인은 201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와 현재 전북대 국문과 박사 과정에 재학중이며, 백제예술대 사진과에서 사진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 주말
  • 기고
  • 2012.07.27 23:02

'이(理)'와 '기(氣)' 사상을 하나로 융합하다

우리나라 전통 사상의 큰 맥은 '풍월도' 등을 근간으로 하는 토착사상의 맥과 유불선을 근간으로 외래사상의 맥이 부단한 상호작용을 하는 가운데 이뤄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 외래사상 쪽의 유교 사상사는 크게 퇴계 이황의 '이기 이원론'과 율곡 이이의 '기 일원론'으로 대별 돼 형성되어 왔다. 물론, 이러한 말은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언급이다. 그런데 우리 고장 정읍에서 이 두 사상사적 줄기를 하나로 아우르는 새로운 사상 곧 '이기 일물설(理氣一物說)', 즉 이와 기는 하나의 사물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혁신적이고 탁월한 사상을 구축한 분이 있었다. 바로 일재 이항이다. 이러한 사상은 서양의 사상사 혹은 철학사로 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비견될 만하다. 즉, 서양의 사상사철학사의 주류가 소크라테스에서 시작되어 플라톤에 이르러 그 형이상학적 체계가 수립됐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비로소 그것의 형이하학 곧 존재론적 기초가 확립됐다. 유교 사상사의 맥락에서 보면, 한국 사상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일재 이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와 기가 한 몸에 있으니, 그것을 어찌 이물(二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이와 기는 상하의 나눔은 있으나 서로 원활하게 융통하고 있어 끝없이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기가 서로 나뉘면 거기에는 사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기대승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러한 일재의 말은 그의 사상의 핵심을 가장 쉽고도 분명하게 천명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동안 '이기 이원론(퇴계)'과 '기 일원론(율곡)'으로 양분되어온 형이상학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하나로 융합함으로써, 비로소 우리 사상사에 진정한 존재론을 수립한 위대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동안 학계에서 별로 주목받지 않아, 거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시피 했다. 물론 그동안 한 두 차례 소규모 학술대회는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4월에 정읍시에서 '호남의 큰 학자 일재 이항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큰 학술대회가 열림으로써, 그에 대한 좀 더 본격적인 학문적 접근이 시작됐다. 학문적 활성화 작업은 지난 5월에 '호남의 큰 학자 일제 이항 연구'(황의동 외도서출판 돈사서)라는 연구서로 종합 돼 출간됐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전체적종합적인 논의로 구성 돼 있다. 기조논문, 1부 생애사적 탐구, 2부 역사적 탐구, 3부 철학적 탐구, 4부 문학적 탐구, 5부 영향사적 탐구 등이 그것이다. 지역 출판사인 '도서출판 돈사서'가 이 책을 낸 것도 바람직하다. 일부 혹자들은 영남은 학문이 발달했고 호남은 예술이 발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발언은 그 실상을 잘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선입견일 뿐이다. 사상이 없는 예술이 어디 있으며, 훌륭한 사상이 탁월한 예술과 연결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번에 나온 '호남의 큰 학자 일제 이항 연구'는 일재 이항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상가이며, 그의 '이기 일물설'이 호남 및 우리나라 전체의 사상과 예술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를 되짚어볼 좋은 기회다. 일독을 권한다. / 김익두 (전북대 국문과 교수)△ 김익두 교수는 전북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제2회 '객석' 예술평론상(1991), 제3회 판소리 학술상(2003), 제3회 노정 학술상(2003) 등을 수상했으며, 우리의 전통 소리에도 조예가 깊어 '전북의 민요','전북의 노동요', '위도 띠뱃놀이' 등을 출간한 바 있다.

  • 주말
  • 이화정
  • 2012.06.22 23:02

당신이 먹는 채소 안전한가요?

요즘은 오랜 상식이 깨지는 사례가 많다. 새마을 운동의 상징이었던 슬레이트 지붕이 발암 물질 덩어리로 밝혀져 그걸 걷어내느라 골칫거리가 되었고, 고기와 계란·생선·유유를 절대 먹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중에 채소가 있다. 채소의 오랜 상식들이 깨져 나가고 있다. 채소처럼 엽록소가 많은 식품은 많이 먹으라는 말을 들어왔다. 더구나 고기를 먹을 때는 쌈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그런데 삼겹살과 쌈 채소를 같이 먹는 것은 암 덩어리를 키우는 자살행위라는 주장이 있다.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허벅지 속살같은 허연 무를 절대 고르지 말라고도 한다. 벌레 먹은 채소가 무조건 안전한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진한 초록색 채소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일반 상식가 어긋나는 얘기들이다.'채소의 진실'에 나오는 얘기다. 30년 이상을 자연재배만 해 온 일본의 가와나 히데오 씨가 하는 말이다. 이유가 뭘까? 녹즙기로 채소 즙도 내려 먹고 쥬스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바로 농약 때문이다. 비료 때문이다.허연 무에는 표백제가 뿌려진다. 딸기나 사과에는 빨갛게 보이라고 발색제를 치고 수백 가지가 넘은 토양소독제니 살충제, 살균제 뿐 아니라 농약의 지속력을 높이는 유화제, 두세 가지 농약을 섞어 칠 수 있게 하는 혼합제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등록된 제초제만 400종이 넘는다. 이런 화학합성물은 분해도 어렵고 소화·배출도 안 된다. 농약에 대한 경계심은 그래도 높다. 정작 더 무서운 것은 비료다. 채소가 왜 발암불질이 되는가 하는 점도 비료 때문이다. 농작물을 하루라도 빨리 키워 시장에 내고자 하는 돈벌이 농사는 대부분의 작물을 비닐하우스 속으로 쳐 넣었다. 그 속에서 질소 비료는 만성적으로 과다한 상태가 된다. 작물의 속성재배를 바로 질소가 담보하기 때문이다. 질소가 채소에 흡수되면 질산태질소로 변한다. 채소의 잎이 진초록이 되는 이유다. 무 잎이나 양배추, 시금치가 다 마찬가지다. 진한 색은 질소 과다 현상이다. 질산태질소가 체내에 들어가서 고기나 생선에 포함된 단백질과 결합하면 '니트로소아민'이라는 발암물질을 만든다. 메트헤모글로빈이 생겨 혈액의 산소 함유량을 급격히 떨어뜨리기도 한다. 급성 빈혈증상이 생기면서 죽기까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떤 비닐하우스에서는 채소를 한 해에 스물여덟 번이나 돌려 키운다 하니 질소의 과잉투입이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잎사귀가 부채만큼이나 크고 싱싱하면서 짙푸른 채소가 바로 이렇게 키운 것들이다. 이 책에서는 재미있는 통계자료가 소개된다. 50년도와 2000년도의 채소 성분 조사표다. 양배추는 비타민B가 90%가 감소했고, 무는 비타민C가 40%, 시금치는 철분이 85%, 당근은 비타민이 64% 감소한 것으로 나온다. 이른바 유기농 야채도 똑같다. 유기질 비료를 주는 유기농은 화학 비료를 주는 화학농작물과 큰 차이가 없다.'채소의 진실'이 말하는 자연재배 농산물의 식별법은 옅은 연두색 채소, 작지만 조직이 조밀한 채소, 살짝 데쳐보면 색상이 더욱 선명해지는 채소다. 싹을 안 나게 하여 오래 저장하고자 방사선을 쬐는 마늘, 감자, 고구마, 생강, 양파, 버섯, 효소식품 등의 이야기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음식이라는 것은 생명의 원천이다. 영양공급을 위한 원자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농사에 스며든 자본의 논리는 모든 먹을거리들의 생산과 유통, 소비까지 돈벌이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종자까지 초국적 자본이 장악 한 상태에서 밥상 위에서 우리가 하는 선택은 고도의 정치행위라고 한 '육식동물의 딜레마'의 저자 '마이클 폴란'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 전희식 씨는 경남 함양 출생으로 1994년 완주로 귀농했다. 현재 전국귀농운동본부 공동 대표로 일하면서 '보따리학교'와 '스스로 세상학교' 일에 열성이다. 귀농생활을 정리한 책'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다'(2003)과 치매 어머니와 함께한 자연 치유의 기록'똥꽃'(2008)을 펴냈다.

  • 주말
  • 이화정
  • 2012.06.08 23:02

시대의 아픔 대신한 '외침'

나는 지금도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막사 밖으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느린 걸음 펴냄)을 읽고 있었다. 첫 휴가를 나갔다가 부대 내무반에 몰래 들여온 책 중에 한 권이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슬픔과 분노 때문에 사시나무 떨 듯이 떨었다. 시집 한 권을 통털어 좋은 시 5편만 읽을 수 있으면 책값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에 첫장부터 끝장까지 숨 한번 크게 쉬지않고 읽어내려갔다. '새벽쓰린 가슴 위로 찬소주를 붓는다'라는 구절에서 밀려오는 슬픔이 '손무덤'에서는 분노가 '이불을 꿰매며'는 내 삶에 대한 반성이, 가슴 속 깊이 들숨처럼 들어왔다가 탄식이 되어 허공으로 뿌려졌다. 강원도 산골에서 군생활하던 시절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문학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감동'이라고 얘기한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 장르에서 감동이 없다면 그것은 예술작품에 문제가 있거나 감상하는 자에게 문제가 있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어떤 종류의 예술작품의 경우 특별히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감동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지만. 感動, 말 그대로 '마음의 움직임'이다. 입대 전, 그해 봄은 유난히 더웠다.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고 공대생이었고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이었다. 고등학교 문학반 시절부터 신춘문예 주변을 얼쩡거렸다. 문학은 동경이자 이상향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대학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달팠다. 1980년 5월 광주가 휩쓸고 간 대학은 전쟁터였다. 나야 한없이 좋았지만, 수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끔 시위가 벌어지면 무슨 전쟁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공중에 하얗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최루탄들, 학생들이 뿔뿔히 흩어져 달아나고, 전투경찰 최포조들이 뒤따라오고, 그러다, 시위를 구경하던 학생이 얼떨결에 대신 연행되기도 했다. 나는 가방 한구석에 시집 몇 권을 넣고 다니면서 수업거부가 있던 날은 나무 그늘이 있는 벤취에 앉아 읽곤 했다. 사회과학서적을 읽는 모임에 참여했다. 매주 정해진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모임이었다. 중남미혁명사부터 시작해서 당시 금서로 지정된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참 많은 책을 읽어댔고 시위를 따라나서기도 했다. 그날도 독서모임이 끝나고 막걸리 한 잔 걸치는 자리였는데 느닷없이 한 선배가 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엄중한 시절에 시집이나 들고 다니는 나약한 자유주의자적인 행동이 못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욱 하는 성격으로는 절대 뒤지지 않는 필자도 그게 뭐가 어떠냐고 되받아쳤다. 어수선했던 그 모임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뒤로 나는 오랫동안 내가 정말 자유주의자인지, 시대의 모순을 눈감아 버리는 비겁한 지식인인지 고민 하기도 했다.시집 한 권을 선물받았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었다. 10 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했다. 최소한 그 당시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시가 아니었다. 문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호였고 외침이었고 분노였다. 문학도 데모도 시원찮아졌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군대를 갔다. 나는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읽고 감동을 느끼는 데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군대에서 1년이 '노동의 새벽'을 받아들이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나는 박노해 이후 소녀 취향적인 문학관을 버릴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박노해 시인이 6년 여의 수감생활 이후 전향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무슨 상관인가? 계절마다 제철 과일이 있듯이 시대에 따라 시인의 세계관이 변한다고 해서 시인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시인은 그 시대의 유정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 유정란은 그 시대가 품고 보살펴서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것일 뿐이다. 정동철 우석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는 2006년 전남일보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전기전자공학과장, 기획팀장 등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으로 활동해왔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5.25 23:02

울음은 나를 위로하는 마술

'울음'은 인간의 첫 호흡이다. 울지 않고 태어난 인간은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울지 않는 갓난아이는 엉덩이를 때려서라도 울음을 열어줘야 한다.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도 모두 그 다음 일이다. 그러므로 '울음'은 우리 생애의 첫 스토리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참 잘도 운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걸리는 게 있으면 일단 울고 본다. 세상이 끝장나는 것처럼 서럽게 펑펑 잘도 운다. 이제 세 살인 우리 조카도 열심히 운다. 좀 잦아드나 싶으면 또 울고, 이제 끝이 보인다 싶은 데 또 운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아이들은 더 이상 온 몸으로 울지 않는다. 눈물이 나려고 하면 꾹꾹 참기도 하고, 눈물이 흘러도 손등으로 쓱 닦아내고는 짐짓 울지 않은 척하며 씩씩댈 것이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울지 않는, 아니 잘 울 줄 모르는 어른이 된다. 울 줄 몰라서, 잘 웃지도 못하는 어른이 된다. 사계절 그림책 시리즈 제31권 '눈물바다'(서현 저). 표지에 보이는 밤톨머리 아이가 주인공인데 웃고 있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게다가 눈물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건물과 사람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시험을 봤다. 아는 게 하나도 없다."시험은 망치고, 점심은 맛없고, 짝꿍이 먼저 장난쳤는데 선생님은 나만 혼내고, 비는 오는데 우산은 없고, 흠뻑 젖어서 집에 갔더니 공룡 두 마리는 싸우고, 밥 남겼다고 여자공룡한테 혼나고. 억울하고 속상한 하루를 겨우 마치고 침대에 누우니, "눈물이 난다. 자꾸. 자꾸만. 훌쩍. 훌-쩍. 훌─쩍"창밖의 달님도 슬퍼서 함께 우는데, "어? 바다다. 눈물바다!"하루 동안 자신을 속상하게 했던 사람들은 모두 눈물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아이는 침대를 타고 파도를 넘으며 한바탕 신나게 논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을 건져서 빨랫줄에 나란히 널어놓고 말려주며, "모두들, 미안해요. 하지만 시원하다. 후아!"슬픈 하루를 눈물바다로 말끔하게 씻어낸 '눈물바다'는 슬프거나 힘들 때는 울어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강한 그림책이다. 그림이 유쾌하고 단순하지만 은유적이며 상상할 수 있는 여백이 넓어서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특히 눈물바다에서 헤엄치는 인어공주, 목욕하는 선녀, 눈물바다에 뛰어드는 심청이, 고래 입속으로 들어가는 피노키오, 토끼의 간을 갖고 용궁으로 향하는 토끼와 자라, 굴뚝에 끼여 있는 산타할아버지 등을 눈물바다에 함께 끌어다 놓음으로서 이야기의 범위를 훨씬 넓혀준다. 이제 앞표지에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던 아이는 후련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다. 눈물을 통해 스스로 마음을 달래고 토닥이며 슬픔을 모두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울음은 내가 나를 위로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며, 그렇기에 누구나 하나씩은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울고 싶을 때는 울자. 울음은 울기위한 것이지 삼키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울음을 삼키기만 한다면 분명 언젠가는 마음이 체하고 만다. 울지 않은 눈물은 결국 가슴에 맺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가슴속에는 얼마만큼의 눈물이 맺혀 있을까. 눈물바다, 가끔은 만나도 좋지 않을까. △ 이현수 시인은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200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 주말
  • 이화정
  • 2012.05.18 23:02

오라,창조적 파괴자가 이끄는 세상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찾는다. 아니 방랑기가 심했던 시퍼런 20대 시절의 흔적을 찾는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어디 갔을까! 한때 보물 1호였는데. 현란했던(?) 젊은 시절을 입증해줄 만한 단서를 잃은 듯 허망하다. 세월의 중력에 늘어지고 균열진 얼굴만 확인하고 나니 씁쓸하다. 낡은 세월의 두께 때문인지, 영민하지 못한 탓인지 책 내용도 가물가물하다. 다만 생의 어떤 출구도 통로도 없는 막막한 체제 속에서, 일체의 가치가 탕진되어 버린 부조리한 세계에 분노했던 '뜨거운 혈기'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다. 나약하고 소심한 인간에서 체제 순응자들이 지배하는 세계를 거부하고, 일그러진 자아들에게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투척하게 했으니 '아웃사이더'는 나의 삶 전반을 뒤흔든 책이었음이 분명하다.20대 때 청춘은 바닥을 모르는 그 어떤 목마름으로 늘 허기가 졌다. 그 배경엔 암울한 정치적 상황도 한몫 했겠지만, 질풍노도의 시기에 가슴을 흥분시키기에 필요한 조건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결핍의 나날들로 내 삶은 척박했다. 청춘의 삶을 통과해 버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영웅주의, 지적 허영심으로 지칠 줄 몰랐던 강박적인 난상토론 끝에 내린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결론들에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그러나 치기어린 내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사실 아웃사이더(국외자)란 말의 처절함을 모르던, 유약하고 자기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시기였기에 콜린의 영국 주류사회에 대한 분석과 '아웃사이더'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이라는 불합리한 세계는 당시 한국사회의 단면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았기에 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특히 니체, 반 고흐와 같은 실제인물들을 '아웃사이더'란 관점에서 분석했고 카뮈의 '이방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온 작중 인물들에 대한 분석은 소름이 돋았다. 지리멸렬한 날들을 보내며 뜻도 모르는 철학서를 탐닉하는 현학취미가 있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콜린은 아무도 병에 걸린 것을 깨닫지 못하는 문명사회에서 자기가 환자임을 자각하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아웃사이더'라고 말한다. 콜린이 언급했던 아웃사이더들은 지루하고 불만족스러운 일상의 세계를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일상이 따분하게 되풀이 되는 것은 고역이며 노예들에게나 알맞다고도 일갈한다. 즉 '아웃사이더'는 인간성의 폭과 깊이가 있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치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소비사회의 행복을 좇는 지옥 같은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타인과 깊이 연결되지 못해 쓸쓸한 가운데 범죄를 저지르는, 맹목적인 증오심과 섬뜩한 눈빛의 아웃사이더를 수없이 만난다. 일상의 허무와 무의미에서 탈출하려는 육체적 쾌락주의가 성행하고 무한경쟁의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의 낙오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콜린이 말했던 진보적 유토피아가 아닌 것이다. 새로운 가치와 윤리, 국가와 민족의 장래같은 거시적 담론은 사라지고 맹목적 소비주의와 계산적 합리주의가 팽배해가고 있다. 체제에서 낙오한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아웃사이더' 즉 루저(loser)로 인식될 뿐이다.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유연한 사람, 창조적 아웃사이더만이 자신과 주변을 객관화할 수 있다. 균형감각을 가지고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치유불능의 징후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아프지 않다고 멀쩡하다고, '뻥'칠 수는 없다. 콜린이 말했던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아웃사이더'가 나타나 자기쇄신을 거듭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인사이더'의 세상은 유통기한이 다한 통조림이다. 따라서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역전은 가능해져야 한다.세월이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가 버렸다. 지금 나는 '아웃사이더'의 행방을 모른다. 그걸 찾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다. 그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벅찬 감동이나 세상을 향한 '변혁의지' 대신 스무 살 무렵의 치기와 해후할 것이고 그것이 부끄러워 질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 익명의 청춘시절을 다시 거닐어 보고 싶다.△ 기명숙 시인은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북어'로 등단, 전북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5.11 23:02

사랑·그리움…오래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추

이따금 고서점(차라리 헌책방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에 들른다. 거기 쌓인 책들이 내가 보기엔 참 쓸모없는 게 많은 것 같은데, 굳이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 고적한 분위기 혹은 버려진 책들의 사연이 궁금해서다.헌 책방엔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도, 이사를 다닐 때마다 버린 책들도 있다. 한때는 누군가에게 필요했고, 사랑받았을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가운데 기웃거리거나 쪼그려 앉아 들춰보다 보면, 제법 괜찮은 글이 눈에 띈다. 간혹 1950~60년대에 출간된, 누렇게 바랜 책들을 보면 조상님이라도 만난 듯 진중해진다. 잘 아는 작가의 책, 그것도 그때는 미처 몰라서 읽지 않았던 책이, 그것도 고스란히 전집으로 꽂혀 있기라도 하면 반색을 하며 사온다. 그런가 하면 절친 작가의 책이 처박혀 있을 때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혹 어느 구석에서 내 책이 눈에 띌까 뜨끔해하다가 그럴 만큼 책을 내지 못했던 것에 금세 위안을 얻기도 한다.그렇게 헌책방을 순례하던 어느 날,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을 발견했다. 이 시집은 내가 애장하는 것으로 책장의 맨 윗칸에 늘 꽂혀 있다. 흔히 말하던 '문지'즉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된 것이다. '사는 모양새가 어수선해서 한동안 잊고 있었구나' 하는 심정으로 시집을 꺼내 한두 장 넘겨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멈칫했다. 한때 잘 알고 지냈던 사람의 싸인이, 그것도 선명하게 찍혀 있었던 것이다.그 사람은 한때 시인 지망생이었다. 나보다 더 시를 많이 읽었고 사랑했다. 그의 시를 본 적은 없지만, 시에 대한 애정과 탁월한 해석력으로 보아 허투루 쓸 사람은 아닌 듯 생각되었다.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꽃처럼 아름다운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녀와 결혼했다. 바닷가 근처에 멋진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집에 있는 나무며 꽃이며 식탁이며 심지어 강아지까지 모두 어여쁘지 않은 게 없어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우연히 그의 소식을 들었다. 가족과 헤어져 혼자 먼 나라로 떠난 지 오래라고 했다. 어린 두 아이를 외국에 유학시키기 위해 아내가 데리고 가 있어서 이른바 '기러기 아빠'가 되었는데, 아내도 아이들도 끝내 돌아오지 않아 우울증이 심했다고. 그러다가 혼자 여행을 떠났는데 그 뒤로는 아무도 소식을 모른다고. 1980년대, 그러니까 벌써 이십여 년 전 나는 시 속에 푹 파묻혀 지냈다. 그 중에서도 이성복의 시를 참 좋아했다. 그의 시들은 너무도 치열하고 낯설어 고통스럽게 하면서도 나를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집 맨 끝에 실린 시 '남해 금산'을 대했을 때, 가래처럼 나를 막고 있던 그 고통들이 울컥, 목울대를 건드렸다. 시인과 독자의 심장이 똑같은 형상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미사여구나 현학이란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가.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두어 번 남해에 간 적이 있다. 거기가 금산이었나? 멀리 산 위에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가 보이자, 내 차에 동승했던 유상우가 혼자 중얼거렸다."누님! 저 돌 속에 갇혀 있던 그 여자가 떠났단 말이지요? 저기 가면 남해가 보일까?"그의 아내 이경은이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난 여기서도 남해가 다 보인다, 보여." 그날 헌책방에서 나는 이 시집을 굳이 사들고 나왔다. 그리고 오래오래 길을 걸어보았다. '사랑','그리움'. 참 오래 잊고 있던 언어들이, 이성복의 시가, 줄곧 나를 따라왔다. 나이 들면서 삶의 목표만이 확실해져서 운전대를 꽉 잡고 앞만 주시하며 살고 있는 내 모습도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돌 속에 묻혀 있던 '그 여자'는 마음의 감옥을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만났을까.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바로 그 하늘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경계가 아닐까.△ 부안 출생인 김저운씨는 수필과 소설을 쓰며 전북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산문집'그대에게 가는 길엔 언제나 바람이 불고'가 있으며, 현재 전주영상미디어고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5.04 23:02

한국인의 생존력 어디서 오나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도 반만년을 지구상에서 살아남아 오늘날 세계 일류 국가를 넘볼 만큼 성장한 한국인의 생존력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그 답을 어떤 이는 '은근과 끈기' 혹은 '선비 정신'에서 찾는 이도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조상들이 어떤 눈물과 사랑 그리고 소망을 안고 반만년을 이 땅에서 살아 왔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오늘날 세계화의 조류 속에 휩쓸려가고 있다. 이러한 무국적 무정형의 글로벌 시대에 '우리가 누구이며', '한국인의 정신적 고향은 어디인지?'를 되묻고 싶을 때 우리는 '삼국유사'를 먼저 찾지 않을 수 없다. 고려 충렬왕 7년(1281년)에 일연 스님이 편찬한 이 책에서 우리 민족의 연원과 조상들의 정신적 초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고기(古記)'가 원형 그대로 기록되어 우리 민족이, 국조(國祖)가 뚜렷한 배달의 단일민족임을 확인시켜 주는가 하면, 우리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이 총망라되어 명실 공히 우리 민족의 얼이요 혼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우리는 한국인이 태어난 고향을 모른다. 누구나 어머니의 태내(胎內)에서 태어났으면서도 그곳이 어떠한 곳인지 모르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은밀하게 속삭이는 하나의 신화가 있어, 잃어버린 옛날의 아득한 기억을 일깨워주고 있으니' 그것이 '삼국유사'라고 이어령 선생도 말한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단군신화'에 나온 '환웅과 곰'의 이야기도, 다른 나라의 신화들처럼 그들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아래 신과 인간 그리고 짐승들과의 조화와 평화라고 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화쟁관(和諍觀)이 담겨 있다. 또한 '미륵사지'와 '사자암'에 얽힌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설화가 아닌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밝혀진 사실, 그리고 '처용가'(향가)에서 처용이, 아내와 역신이 동침한 장면을 목격하고도 분노와 증오 대신 오히려 이를 노래로 지어 부르고 춤을 추면서 절제와 관용으로 역신을 감복케 한 장면 등은 다른 나라의 신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윤리적 미덕이 아닌가 한다. '삼국유사'를 읽다보면 어느 것 하나 오늘 날 우리네 삶과, 아니 내 어렸을 적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삶과 닮지 않는 장면이 없다. 거기에서 그분들의 숨결을 다시 만난 듯 낯익고 정겹다. 한 민족의 본적지는, 다시 말해 한 민족의 정신적 고향은 그 민족이 만들어낸 신화 속에 있다고 한다. 신화는 어제의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일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신화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집단 무의식이요, DNA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삼국유사'는 천손(天孫)의 후예인 '한국인의 원초적 상징' 아니 '한국인들의 마음의 고향'으로서 아직도 우리의 마음 저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한국 최고의 고전이요, 인문서가 아닌가 한다. / 김동수 시인(백제예술대 교수)△ 김동수 시인은 남원 출생으로 1982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하나의 창을 위하여', '말하는 나무' 등 평론집 '한국현대시의 생성미학', 시창작 이론서 '시적 발상과 창작', '한국비평문학상', '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주말
  • 이화정
  • 2012.04.27 23:02

이 시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내가 사랑한 것은 여우였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 내가 만난 여우들은 삶의 중요한 순간에 찾아와 내 옆에 조곤히 앉아 이야기 하곤 했다. 진정성과 삶의 의미에 대해.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로 여유가 없어지고 여우는 점점 잊혀졌다. 여우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제는 전설과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여우, 보드라운 털이 생각나는 날이다.프란치스카 비어만의 동화 '책 먹는 여우'는 읽기와 쓰기에 관한 이야기다. 여우는 책을 좋아했다. 좋아해도 아주 많이 좋아해서 책을 꿀꺽 먹어치울 정도였다. 식성이 얼마나 좋은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매일 책을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책으로 교환할 가구도 다 사라지자 여우는 눈여겨 본 건물을 털기로 한다. 구수한 종이 냄새가 솔솔 풍기는 도서관이다. '으음 맛있겠어, 맛있겠어!' 서가의 책을 한 권씩 먹어 치우는 여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서는 책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다.'배고파, 배고파'하며 책을 먹어치우던 여우는 중학생 시절 내 모습이다. 그 시절 나는 200원짜리 도서관 매점 라면을 300그릇 쯤 비웠다.(가끔 한 번에 두 그릇을 먹은 적도 있었다.) 친구들은 '수학정석'이며 '성문종합영어'를 펴 놓고 머리를 쥐어짰는데, 나는 '맨투맨' 보다 '좋은 냄새가 나는' 다른 책들이 더 좋았다. 독서는 우울한 사춘기를 건너는 방법이자 다른 세계로의 모험이었다.그 도서관에 후줄근한 관리인 아저씨가 있었다. 종종 낮술에 취해서 직원에게 지청구를 듣던 그는, 도서관 로비를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허우적거리며 쫓곤 했다. (놀려주고픈 마음이 절로 들었다.) 언젠가 도서관 담에 기댄 그를 본 적이 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가 필터까지 타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젖은 눈으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다닥다닥 붙은 금암동과 인후동의 낮은 지붕들이 보였다. 어른이 된 후, 꼬질꼬질했던 관리인에 대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빨간 눈의 여우처럼 우리의 기억에서 잊힌 '휴전선'의 시인 박봉우였다. 어느덧 나도 후줄근한 나이가 되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지 않던 결핍과 규율에 저항했던 시인의 시대는 가고, 경쟁과 성과 위주의 시대에 산다. 시집을 읽는 대신 지식과 정보를 습득(먹는)하는 데 급급하다. 요즘 나의 독서는 허기를 넘어선 강박증 같은 것. 먹고 사는 문제로 책을 읽다가 가끔 여우를 생각했다. 주차장 나뭇가지에 맺힌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다가, 막힌 욕조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집어내다가 문득, 여우의 울음을 들을 수 있었던 때는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생각한다. 누군가의 울음에 귀 기울였던 여우의 시절이 나에게 있었다. 눈물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깨끗하게 하는지 오래 잊고 살았다.봄이라지만 저녁 바람이 아직 춥다. 나는 아파트 유리창에 충혈된 눈을 대고 어두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 여우를 생각한다. '책 먹는 여우'의 여우처럼 아직 절박함이 부족하더라도, 나는 안다. 내가 사랑한 것은 여우였다고./ 박태건 (시인, 원광대 글쓰기센터 교수)

  • 주말
  • 전북일보
  • 2012.04.20 23:02

아이들의 순수한 기도

첫 동시집을 내게 되면서 동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 그 와중에 읽은 시집이 바로 '일하는 아이들'이라는 어린이 시집이다. 이 시집은 교사이자, 우리말 연구가이며, 아동문학가인 이오덕이 생전에 엮은 시집이다. 자신이 몸 담았던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쓴 시를 모은 것인데, 여기에는 글뿐만이 아니라 어린이 그림도 함께 실려 있어서 읽는 재미가 한층 쏠쏠하다. 또 거기에 덧붙여 사투리에 대한 풀이가 곁들여 있고, 간혹 아이들의 집안 사정을 엿볼 수 있는 글도 있어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아니 그런 것들조차 거추장스러울 만큼 이 어린이 시집은 너무 맑고 투명하고 아프다. 손끝이 시리도록 맑은 도랑물 같다. 어떤 시인은 우리나라 시인을 둘로 나눈다면,'일하는 아이들'을 읽어본 시인과 그렇지 않은 시인으로 나눌 수 있겠다고까지 말한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씌여진 연대는 1950년부터 1970년대까지 걸쳐 있으나, 1960년대의 어린이 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니까 우리 60년대 가난한 농촌 아이들의 생활이 이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이 책 앞표지에도 '농촌 어린이 시집'이라고 적혀 있다. 책 제목 아래 오윤의 판화 '고무신을 신고 지게를 짊어진 가족'의 모습이 그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오줌이 누고 싶어서 / 변소에 갔더니 / 해바라기가 / 내 자지를 볼라고 한다. / 나는 안 비에 줬다.'('내 자지'전문) 이 시는 당시 안동 대곡분교 3학년이던 이재흠 군이 쓴 시이다. 다음의 시 역시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인 백석현 군이 쓴 시이다.'청개구리가 나무에 앉아서 운다./ 내가 큰 돌로 나무를 때리니 / 뒷다리 두 개를 펴고 발발 떨었다 / 얼마나 아파서 저럴까? / 나는 죄 될까 봐 하늘 보고 절을 하였다.'('청개구리'). 이 두 시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동심이 무엇인지 확연히 보여준다. 이 동심이야말로 하늘에 닿아 있는 마음일 것이다. 이 시집 속에는 또 고추밭 매기, 담배 심기, 인동꽃 따기, 나물 씻기, 조밭 매기, 콩밭 매기, 비료 지기 등 일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순박하고 꾸밈없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도 아기를 업고 다니다가 방바닥에 내려놓았을 때의 느낌을 '() 그래서 나는 아기를 / 방에 재워놓고 나니까 / 등때기가 없는 것 같다.' ('아기 업기'일부) 고 하거나, 공부를 못해서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나는 공부를 못 해서 걱정이다 / 집에 가마 맞기마 한다 / 내 속에는 죽는 생각만 난다.' ('공부를 못 해서'전문)고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낸다. 이뿐만 아니라 때로는 빨래 거품에서 무지개를 건져 올리고 구정물 속에서 별을 발견하기도 한다. 요즘 여기저기 난무하고 있는 성적 비관, 왕따, 자살, 학원 폭력, 스펙, 이런 말들 속에서 이 어린이 시집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 어른들에게 많은 것을 묻는다. '참되고 아름다운 시의 세계를 지닌 아이들'을 그 지옥의 세계로 내몰고 간 어른들의 책임을 이 시집은 조용히 묻고 있다. '청개구리'란 시를 쓴 백석현 군도 성장한 뒤 부산 지역으로 떠났다가 좌절 끝에 결국 자살하고 만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버섯을 따 생긴 돈으로 한문 배우던 선생님에게 소주를 사가지고 가던 아이였다. 그와 관련된 글을 읽고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이 시집의 초판 머리말에서 이오덕은 '순진한 어린이의 말과 행동, 느낌과 생각은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린이는 시인임을 나는 믿는다.'라고 적고 있다. 나는 고침판'일하는 아이들'(2002)을 다시 읽으며 내가 어른인 게 한없이 부끄럽다.△ 유강희 시인은 1968년 완주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어머니의 겨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불태운 시집','오리막', 동시집'오리발에 불났다'를 펴냈다.

  • 주말
  • 전북일보
  • 2012.04.13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