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청춘예찬] 원광대 약학과
원광대 약학과는 선후배간 정이 끈끈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재학중 종종 이뤄지는 무의촌 봉사 활동 탓인지 희생 정신이 강한것도 약학과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이다.선착장을 보수하다 허리가 다치는 등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감수하며 펼친 고군산 열도에서의 봉사 활동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학과 특성상 2학년 과정 오후는 실험 실습 시간이다. 더욱이 3·4 학년의 경우 실험 시간이 많아 늦은 시간까지 연구실에 옹기 종기 모여 있는게 일상사다. 이러다 보니 타 지역 거주 학생들은 막차를 놓치기 일쑤여서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는 일도 흔치 않았다.학년당 40명의 많지 않은 정원임에도 과외 활동을 통한 사회 참여 역시 풍부한 편이다.지금은 전통이 끊겨 사라졌지만 지난 80년대 초까지 이어져온 개미반과 삼동반은 선배 약사들과의 무료 봉사를 통한 참 봉사를 몸소 실천하는 값진 학교 생활로 간직되고 있다.지금까지도 약학과의 전통으로 맥을 잇고 있는 원약제는 긍지와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행사중에 하나다.약학과 출신들로 구성된 홀론팜과 율동반, 클래식 연주반, 사진반은 졸업 이후에도 줄곧 계속되고 있다.장구한 역사만큼이나 약학과에는 톡톡 튀는 명물들이 많았다.지금은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장발 머리에 통키타 둘러메고 잔뜩 째를 부리던 아무게부터 미군 바지를 칼날처럼 세워 입고 다니던 사람에 이르기까지.굶주림에 허덕이던 시절 시골에서 대학에 입학했다고 하여 잔치까지 벌였던 65학번 안년형씨는 줄곧 약학과에 남아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펼치고 있다.70학번으로 과대표를 맡으며 똘똘이로 불리던 임종필씨도 면학에 정진, 우석대 약학과 교수로 활동중이다.성실하면서도 꼼꼼해 톱을 독차지했던 71학번 김주영씨는 원광보건대학에서, 73학번인 정종갑씨 역시 같은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원광대 한약학과에 몸담은 이후 연구에 몰두하며 신약 개발의 명수로 널리 이름을 날리고 있는 김형민씨는 74학번으로 재학 당시에도 끼가 다분했다는 것.74학번으로 유별난 봉사 활동을 좋아했던 신태용씨는 우석대 약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으며 학창 시절 인기를 독차지하며 성적 또한 우수했던 78학번 김윤철씨도 원광대 약학과에서 후배 양성에 몰두하고 있다.이밖에도 77학번 김성환씨가 중부대 식품과학부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는 것을 비롯 81학번 채병숙씨는 우석대 환경공학부에서, 84학번 이영미씨 역시 원광대 한약학과에서, 그리고 85학번 한명관씨도 전북대 의과대학 교수로 후학 양성에 눈코뜰세 없다.지난 65년 닻을 올린 이후 1천5백여명에 달하는 졸업생들의 현주소도 개성이 강했던 학창 시절만큼이나 다양한 곳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대부분이 정치인이나 학교 또는 식품 관련 행정 기관에 많이 진출해 있다.전북도 보건환경국장으로 활동중인 이기동씨가 66학번이다. 국립과학연구소 서부분소 구기서소장도 67학번의 이 학과 출신이다.식품의약품안전청 연구관으로 의약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김도훈박사(84년 졸업)와 김영옥박사(85년도 졸업), 고용석박사(92년도 졸업), 김춘래약사(94년도 졸업) 모두가 원광대 약학과를 전국에 알리고 있는 장본인 들이다.제약 업계에서도 원광대 약학과 출신들이 많은 족적을 남기고 있다.일동제약 이사인 부학재씨는 72학번이다. 같은 학번인 조진호씨는 현재 한국파마 상무이사로, 78학번 백흠영박사가 정우약품 상무이사로, 77학번 박용수씨는 근화제약 공장장으로, 한국릴리 개발 담당이사인 김종호씨도 79학번이다.지역 의료 진흥에 선두적 역할을 다하고 있는 원광제약의 상무이사 함성호씨도 82학번의 약학과 출신이다.원광대 약학과 출신들의 사회적 참여는 곳곳에 분포돼 있다.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전북지부장과 경찰청 협력위원회 위원장인 황의옥씨(70년도 졸업)를 비롯 전북도 약사회장 김승곤씨(69년도 졸업) 역시 학창 시절만큼이나 화려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대전시 약사회장 문상돈씨(73년도 졸업), 전주시 약사회장 백칠종씨(78년도 졸업), 익산시 약사회장 김창영박사(83년도 졸업), 장광호 군산시 약사회장(76년도 졸업), 정읍시 약사회장 신동우씨(85년도 졸업), 김권종 김제시 약사회장(77년도 졸업), 장시조 무주군 약사회장(75년도 졸업) 등 졸업생들마다 지역 곳곳에서 맹활약을 떨치고 있다.67학번 이기운씨는 전북도 약사회 총무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72학번으로 전북도 약사회 총회 부의장인 백인숙씨, 서효현 부안군 약사회장(77년도 졸업)도 약학과를 빛내고 있다.도내 크고 작은 병원에서도 이들의 활약은 눈부시다.원광대학병원 약국장 김은숙박사(71년도 졸업)를 필두로 전북대학병원 약국장 김행순씨(81년도 졸업), 제주 한라병원 약국장 한상수박사(86년도 졸업)가 이대학 출신이다.의약품 유통 업계에 진출하여 굴지의 회사로 탈바꿈 시킨 제주 지안약품 고응배사장(75년도 졸업)과 리드팜 부사장인 김좌진박사(78년도 졸업)도 이 학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 인사다.정계에 입문하여 한나라당 총재 특보로 눈부신 활약을 보인 오양순 전 국회의원(70년도 졸업)은 국민 건강 증진에 노력해온 동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원약동문 장학재단원광대 약학과에서는 특별한 장학금이 수여되고 있다.지난 95년 7월 이재윤 동창회장을 비롯한 몇몇 동문들이 뜻을 모아 성적이 우수한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 위한 원약동문 장학재단을 설립했다.지역별, 동기별로 연락을 취해 장학재단 준비위원회를 구성한 이후 10개월만에 무려 1천2백여명의 동문들이 속속 참여하면서 총 2억2천3백만원의 거금이 조성됐다.특히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많은 동문들은 물론 이재윤, 황영수, 장윤식, 김동복, 송태규 동문들이 각각 1천만원씩을 쾌척, 일약 명실상부한 장학 재단이 설립된 것이다.지난 96년 65학번으로 원광대 약학과 교수인 안년형동문을 이사장으로 추대한 원약동문 장학재단은 14명의 학생을 선발, 1천만원의 장학금을 수여한 바 있다.이후 6년동안에 걸쳐 1백70명의 후배들에게 총 1억4백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근래 보기드문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는 원약동문 장학재단은 65학번인 1회 졸업생들이 3천만원을 조성, 흔쾌히 전달하는 등 기부자가 잇따르면서 현재 3억원에 이르는 기금이 만들어졌다.해마다 이뤄지는 장학금 전달식에서 동문들은 바쁜 일과를 뒤로한채 직접 참석, 장학금을 수여함으로써 선후배간 훈훈한 정을 싹틔우고 있다./ 나의 대학시절 / 66학번 오양순前 국회의원나는 66학번인데 그 당시 우리 약학과는 선배가 한 학년 뿐인 신설과였다. 학교에서도 약학과를 최고의 명문과로 육성하겠다며 교수진을 대부분 그 당시로는 꽤 획기적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 교수들로 구성, 우리 약학과가 서울대 약대 지방 캠퍼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교수님들의 강의도 엄격했고(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실험 실습도 엄격하여 밤늦은 시간까지 실습실에서 정량 분석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학점 또한 매우 깐깐하여 힘들었지만 우리는 과에 대한 자부심만은 대단했었다. 그리고 선배들과도 학년을 떠나 동기같은 정으로 뭉쳤고 당연히 과 대항 체육대회에서도 우리과가 결승까지 진출하며 단결을 과시하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데 새내기 시절에 나는 지방대학에 다닌다는 것이 어쩐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은 용렬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해 방황했으며 당연히 학과 수업에도 별 흥미를 갖지 못했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가면서 좋은 과친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며 친해지고 그 친구들이 나처럼 집안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방대에 들어왔거나 아니면 자신의 소신을 갖고 당당히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됐다.따라서 그들이 결코 나보다 못하지 않은 아니 훨씬 더 우수한 학생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비로소 내가 얼마나 철없는 자만에 빠져있었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자존심이란 내가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을 때 상하는 것이지 누구와 위치를 비교해서 상하는 것이 아니라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자존심이 세다는 것은 자만심이 강하다는 말도 된다. 자만심이 강한 사람은 대인 관계가 원만할 수 없고 결국은 외로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좋은 친구들과의 만남과 이 깨달음은 내 학창시절의 가장 큰 소득이며 보람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의 지표가 되어 내가 사회 활동을 할 때나 정치 활동을 할 때 항상 나를 깨어있게 만든다. 자기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과 친구들을 통해 나의 자만을 깨달아서인지 지금도 나는 그 친구들을 만나면 마음이 편하고 따뜻하다. 그래서 나는 원광대 약대를 졸업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