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용의 기행에세이] (22)덕유산~뜬봉샘~용담댐
잘 알려지지 않은 릴케의 말년 시 중에 대략 이런 내용의 시가 있다. "삶이란, 삶이란 항상 나의 밖에 존재한다"이 시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 또 크게 궁금하지도 않다. 때로 시인의 말은 우주적인 관통, 찰나의 깨침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니… 그런데도 내가 이 구절을 지금도 흥얼거리는 것은 아마도, 내가 금강 상류 지역인 진안에서 나고 큰 탓이라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지금은 용담댐으로 고인 물이 되었지만, 진안읍내에서 상전 월포, 수동을 거쳐 용담을 향해 세차게 흘러가던 금강 지류는 어린 시절, 내 상상력의 발원(發源)이었다. 내가 다니던 진안동국민학교는 그 물줄기를 따라 이어진 긴 방둑을 걸어야만 당도할 수 있었던 곳… 저 물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나는 아침 저녁으로 그게 늘 궁금했다. 왜 가만 있지 못하는 것일까… 어디로 저리 바쁘게 자신을 휘몰아가는가… 구름이 이슬이 되고, 마침내 한바다에서 다시 수증기로 피어오르는, 현기증 나는 윤회(輪廻)가 저 강은 싫증나지도 않는다는 것인지… 무한한 시간과 공간 앞에서 절망하거나 궁금해 하는 사람이 어찌 파스칼 한 사람 뿐이겠는가.어떤 역사적 기점부터 한양을 겨냥한 활시위 같이 흐른다 하여 금강을 역수(逆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아마 중학교 때쯤 들었을 것이다, 중학교는 초등학교보다 더 진안천 상류에 위치했다, 나의 강이 조금 더 길어졌던 시기… 그 이야기가 좀 우습게 들렸다, 여기서 보면 순행인 것을 어떤 이들은 역행이라고 부른다니…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지세로부터도 이처럼 자유롭지 못 하다.자신을 늘 밖으로 밀고 나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난 어렴풋이 이 시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금강 휘돌이는 덕유산으로 인해 시작된다잘 알려진 말이지만, <산경표>의 국토관에 의하면, 산은 물을 넘지 못 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못 한다. 금강의 태극형 휘돌이는 바로 이와 같은 산과 강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덕유산과 백두대간이 높이, 단단하게 휘감은 상류 지역을 '진안고원'이라 부르고, 금강과 섬진강이 여기서 발원, 하류 지역을 향해 흘러간다. 섬진강은 남행이고, 금강은 북행을 하다가 돌연 휘어져 서행한다. 이 또한, 지리학자들만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한반도의 동고서저 지형, 땅의 기울기와 관련 있을 것이다.이와 같은 물줄기의 흐름에 따라 사람살이가 좌르륵 펼쳐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상의 문명은 모두 강기슭에서 피어났다. 여기에 '훈요십조'에서 이야기했다는 '차령 이남'과 같은 조건이 합해지면서 금강이 흘러가는 길에는 백제와 후백제의 역사가 함께 흘렀다. 우리가 교과서에 배운 한, 백제 전성기에는 한강~금강~만경강-동진강~영산강 유역까지 국력이 미쳤고, 미약할 때는 금강, 만경-동진강, 영산강 수계로 오그라들었다. 이를 크게 규정하는 것은 백두대간의 흐름, 더 좁혀서는 덕유산 자락이었다. 견훤의 후백제 역시 이 강줄기와 산줄기를 경계로 삼았다. 덕유 산자락 '나제통문'이 잘 보여주듯 백두대간은 신라와 백제를 나눈 국경이었고, 강 유역은 자고 나면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공방전의 현장이었다.이런 지리적, 역사적 조건은 우리의 국토관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다. 금강 유역에 핀 백제와 후백제의 역사에 선홍핏빛이 스민 것은 주지의 사실, 금강 또한 우리에겐 붉은 해거름의 강이 되고 말았다. 의자왕이나 견훤의 고사는 물론, 근세 곰나루 동학군의 혈진 함성까지…향적봉에서 남덕유로 이어지는 덕유산 종주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절로 한숨이 나는 것은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그 덕유산 자락 저쪽 한 편에 뜬봉샘이 있다.◆ 물뿌랭이라는 말과 뜬봉샘이라는 말장수 신무산 기슭, '수분령' 바로 옆에 있는 뜬봉샘은 금강의 발원지로 공인된 곳이다. 장수(長水)라는 지명, 수분령(水分嶺)이라는 고갯마루,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천천(天川) 월곡(月谷)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마을까지… 이 근처 지명은 온통 '물'의 이미지와 관련 있다.뜬봉샘을 오르는 동안, 이곳 주민들이 친절하게 붙여놓은 안내판을 읽는다. 거기, 이곳이 예전부터 '물뿌랭이마을'이라고 불렸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옛사람들도 여기가 금강의 시원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겠다. 이곳을 오르는 동안, 난 왜 이 아름다운 이름 '물뿌랭이'를 버리고, '뜬봉(鳳)샘'이라는 해괴한(?) 명칭을 채택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기 말고도 전라도 여러 산하에 두루 자취를 남긴 조선 개국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를 드렸더니, 봉황이 훌쩍 날아갔다고 해서 '뜬봉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인데… 설령 이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뜬봉샘은 600살 남짓, 물뿌랭이는 그보다 더 나이를 먹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개악(改惡)된 지명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한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 또한 부질없다. 물뿌랭이든 뜬봉샘이든, 우리가 그 무엇이라 부르든, 그 훨씬 전부터 저 샘은 여기 샘솟아 흘러내렸다. 몇 만 년, 몇 억 년 내리 여기 흘러 목마른 생명들의 목을 축였을, 성스러운 어머니 강 앞에서 고작 우리끼리 붙인 이름을 두고 맞네, 틀리네 왈가왈부하는 것이야말로 경망스러운 일.◆ 용담호, 탑돌이 하는 길난 용담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나도 모르게 흥분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를 시정하고픈 마음은 없다. 수몰된 고향 이야기를 하면서, 무덤덤한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다고 무엇이 바뀌는 것이 아닌 줄 번연히 알지만, 난 내 고향에 대해 최소한 그 정도 애정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 나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하여, 내게 용담호 주변을 둘러보는 길은 언제나 탑돌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용담호나 그 주변 풍경만 둘러보는 이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으리라, 곳곳에 세워진 물망(勿忘), 비망(備忘)의 기록들.난 거기 새겨진 글 혹은 명단을 찬찬히 더듬을 때마다 진진한 떨림을 느낀다. "천 년 만 년 흘러가도 잊지 못할 내 고향아 / 꿈속에서나마 다시 보면 내 어찌 그 꿈 깰고"라는 투박한 새김에 가라앉아 있는 마음의 격한 떨림, '강**'부터 '최00'에 이르는 이향민들의 이름까지…잊지 못 하는 것 혹은 잊지 않겠다는 그 마음이 나를 아프게 한다. 투사(投射) 대상을 잃은 사랑만큼 애절한 사랑도 없다. 마음은 넘치는데, 보듬을 수 없는 사랑… 대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랑이 희미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여기를 떠난 사람들에게 시간은 물속에 갇혀버렸고, 땅은 사라졌다. 즉, 그리워할 고향이 사라진 것이다. 고향에서 늙어가면서 어린 시절 잘 몰랐던 풍경들을 눈에 익히며, 마침내 그 자신이 풍경의 일부로 스며드는 것… 산다는 것은 그처럼 공간과 친화하고, 친화된 공간 속에서 소멸하는 일이다. 낡은 풍경, 늙은 얼굴들이 서로 교환(交歡)하는 곳이 고향이다.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일을 물길을 거슬러 근원에 당도하는 것과 같이 비유한다면, 여기를 떠난 사람들을 물길이 막혀 거슬러 오를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흘러갈 수도, 거슬러 오를 수도 없는 생애… 용담호가 생긴 뒤로 아침 안개가 부쩍 늘었다. 새벽에 이 길을 지나가다 보면 마치 수룡의 한숨처럼, 실향민들의 한숨이 엉겨 저 안개가 된 것처럼 보인다.물론, 아무리 한스럽게 생각해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담수된 용담호의 물은 완주군 고산의 배관 터널을 통해 전주, 익산, 군산 시민들을 향해 흘러가고, 새만금으로 인해 수질 보전이 더 크게 문제되는 동진강과 만경강의 역할 부담을 다소나마 줄여준다.새로운 물의 흐름을 우리들이 만든 것이다. 결국, 하나의 흐름이었던 금강은 용담호를 통해 고산 쪽으로 흐르는 새로운 용수 환경과 1980년대에 준공된 대청댐 수계로 나뉜 셈이 되었다. 한 나라였던 백제의 강역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들의 구획에 의해 충청도와 전라도로 나뉜 것처럼, 금강도 이제 대청호와 용담호 주위로 구분되게 된 것이다.강의 생애도 이처럼, 강의 바깥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내 걸음은 이제 금강 물줄기를 따라, 백제의 흔적을 찾아간다. 나는 다시 나를 바깥으로 밀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