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소설 당선작-동남풍(황정연)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식당으로 들어선다. 식당 안은 꽁치조림 냄새로 가득하다. 여덟 명이 앉을 수 있도록 길게 놓인 탁자마다 노인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다. '노인사랑요양원'이라는 글자가 세로로 박힌 환자복 위에 잠바를 걸치거나 스웨터를 덧입은 차림이다. 식당 바닥은 온돌식이지만 냉기가 가실 정도의 미열만 흐르기 때문에 오십 평이 넘는 공간을 데우기엔 역부족이다. 노인은 침침한 눈으로 식당을 휘둘러본다. 오늘도 오미자 여사가 보이지 않는다. 노인은 사람들이 뜸한 창가 쪽에 자리를 잡는다. 반쯤 올라간 커튼 너머로 꽃 진 화단이 한 눈에 들어온다. 노란 벌개미취는 마지막 햇볕을 받아 꽃을 피우려는 듯 화단 밖으로 아우성치며 뻗어있다. 섬초롱은 종모양의 꽃이 가득 떨어져 있는 제 발 밑만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화려하고 도도하던 매발톱도 꽃 진 대궁으로 고적하게 하늘을 우러른다. 할미꽃의 산발한 머리는 부포처럼 바람에 나부낀다. 쇠락한 화단은 쑥대머리, 귀신 형용이다.식당 도우미 안씨가 식판을 가져다 놓는다. 보리가 섞인 밥에 콩나물국, 김치, 취나물, 무를 넣어 조린 꽁치 두 토막이 칸칸이 놓여 있다. 노인은 냄새도 맡기 싫다는 듯 창밖으로 눈을 돌리며 무뚝뚝하게 말한다."새우젓이나 갖다 줘."노인은 안씨가 가져온 새우젓을 젓가락으로 조금 덜어 식판에 담는다. 통통한 육젓에 고춧가루와 청양 고추, 깨소금을 넣어 무친 새우젓 냄새가 금세 회를 자극한다. 된장을 살짝 푼 물에 야들야들하게 삶아 낸 돼지고기 수육만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노인이 막 밥 한술을 입에 넣으려는 찰나, 꽁치 뼈를 발라내기 위해 애면글면하던 얼굴들이 노인에게로 확 쏠린다."무슨 냄새가 이리 고소하단가?"엉거주춤 일어서 엉덩이를 빼고 노인의 식판을 넘겨보던 강이 얼른 식판을 들고 옮겨 앉는다."아따, 이거이 갱경이 사는 자네 딸이 보내줬다는 육젓 새우젓이여? 어디 한번 맛쪼까 보세."강은 안면몰수 덤벼들어 새우젓을 한 숟갈 가득 퍼낸다. 노인의 눈이 커진다. 나도 조깨 줘보소,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강이 노인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새우젓 병을 들고 좁은 식탁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누비고 다닌다. 강의 눈에 노인이 어떻게 비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평소에도 무골선풍이네 하며 노인의 물건을 제 것처럼 갖다 쓰던 강이었다. 지금도 노인의 새우젓으로 인기 좀 얻어 보자는 속셈이다. 새우젓이 점점 줄어들면서 이내 바닥을 보이려 한다. 노인은 슬슬 부어가 치민다. 오미자는 입도 대지 않았는데…. 노인은 다른 건 몰라도 오미자에게 줄 새우젓이 닳아 없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그만 둬!"소리에 놀란 강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다. 노인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다. 식당의 모든 눈들이 일순간 노인에게 쏠린다. 새우젓을 막 입에 넣으려던 사람들이 숟가락을 든 채로 노인의 눈치를 살핀다.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에게로 걸어간다. 식당 안에 한 순간 정적이 흐른다. 모든 눈들이 지팡이를 짚고 걷는 노인에게 고정되어 있다. 노인은 강의 손에서 새우젓 병을 거칠게 빼앗는다. 새우젓은 병 밑바닥에 얄팍하게 깔려 있다. 겨우 한 끼 거리만 남았다. 울화가 치민다. 입맛이 떨어진 노인은 새우젓 병을 들고 식당 문으로 걸어간다."아니, 그러게 강 영감님은 왜 멀쩡헌 냥반을 건드려요?"손도 안 댄 식판을 치우며 안씨가 구시렁거린다. 노인은 뒤통수가 따갑다. 그 까짓 새우젓 가지고 노인들 앞에서 속 좁은 티를 낸 것 같아 얼굴이 홧홧하다. 어제 안씨가 지청구를 해가며 새우젓을 무쳐 줄때도 잘 참았던 그다."이 사람 와서 이거 해 달라 저 사람 와서 저거 해 달라하니 이 짓도 못하겠습니다. 어디 다른 데 식당이라도 알아봐야지 원…. 병원 음식이 입에 안 맞는 줄은 알지만 그게 병원식이니 보약이다 하고 먹어야지, 반찬 타박만 하면 몸이 좋아 진답니까?"안씨의 말이 그른 것은 아니지만 식당 밥은 영 먹을 수가 없다. 노인은 식성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일 년 만에 몸무게가 사 킬로그램이나 줄었다. 잡곡을 섞은 밥이 건강에 좋다고는 하지만 삼시 세끼 잡곡이 나오니 모래알을 씹는 것만 같다. 칠십을 넘긴 나이라지만 고기 씹는 맛은 그대로인데 반찬은 푸성귀가 대부분이다. 어쩌다 나오는 고깃국도 젓가락질 두어 번이면 바닥이 드러난다.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 본 일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전에는 일요일마다 등산을 다녀 장단지가 퍽 실했는데 이곳에 온 뒤로는 근육이 풀어지고 흐늘거린다. 노인은 일 년 전의 강단진 제 모습을 오미자에게 보여주고 싶다.사실 새우젓을 무쳐달라고 한 것도 오미자를 생각해서였다. 노인은 딸 정금에게 전화를 걸어 새우젓을 보내 달라 했다. 새우를 잡으러 갔는지 싶게 목을 빼고 기다려도 오지 않던 새우젓이 어제야 도착했던 것이다. 요즘 들어 식당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오미자의 입맛을 돌려줄 깜냥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안씨 앞에서 소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수도 없이 소리를 하는 것은 풋내기들이나 하는 짓이라 여기는 노인이었다."참, 영감님, 소리 하나는 일품이라면서요? 한 자락 불러 주세요."안씨가 새우젓을 무치다 말고 노인을 올려다보았을 때 노인은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젊었을 때는 작은 무대이기는 해도 고수와 함께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소리를 했었는데, 이게 뭔가 싶었다. 나이는 들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사라지고, 병 든 몸으로 요양원에 와 있는 처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한때 잘 나가던 장우현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현재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오미자의 마음을 얻는 일 뿐이다. 노인은 오미자와 오붓하게 새우젓을 나눠먹을 생각에 육자백이를 불러주었다. 장장 십 분간을 공들여 불렀더니 뱃가죽이 등허리에 가서 붙는 듯하여 노인은 병실에 돌아와 두유를 두 개나 먹었다.병실로 돌아 온 병학 씨는 침대에 누워 머리맡의 녹음기에 손을 뻗는다. 새벽에 듣다 만 판소리 대목은 동남풍이 일어나는 대목이다.그때여 관운장은 그때여 관운장은 군령장 다짐쓰고 청도(靑道)로 들어간다. 청도한쌍, 홍문(紅門 )한쌍, 주작(朱雀), 남동각, 남서각, 홍고초, 홍문한쌍이요, 백호, 서남각, 서북각, 백고초, 백문한쌍, 현무, 북동각, 북서각, 흑신, 홍신(紅神), 황신(黃,神), 측문한쌍이요, 호초(號招)한쌍 나(?)한쌍, 고(鼓)두쌍, 쇠약(細樂)두쌍, 기파관두쌍, 군리층열 두쌍이요, 좌마독(座馬纛)이요, 난후친병(欄後親兵) 당북교사(塘報敎師) 각 두쌍이라, 둥괭 죄르르르 이리저리 가는 거동 기색은 영웅이라. 현덕공명 칭찬허고 주유용병 간심차(看審次)로 번구(樊口)에 올라가니 동남풍(東南風)이 일어나네.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키가 구척이나 되는 관우가 군악대를 앞세우고 깃발을 펄럭이며 조조를 잡기 위해 화룡도로 들어가는 모습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벌렁벌렁하다. 비록 시골 골짜기 노인 병원에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처지지만 이때만큼은 노인 자신도 유비의 군사가 된 양 우쭐해지기 때문이다. 때마침 동남풍도 불지 않는가 말이다. 유비에게 그 동남풍은 평생에 한번 불까 말까한 기막힌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노인에게도 바야흐로 그 동남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노인은 지난 봄에 오미자와 보문사로 데이트를 나갔던 일을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어버이 날이라 대부분의 노인들이 자식들을 따라 외식을 나간 날이었다. 노인은 오미자에게 가까운 절에 갔다 오자고 했다. 걸어서 이십분이라 복지 과장도 허락을 했다. 복지 과장이 눈을 찡긋하며 데이트 잘하고 오세요, 라고 활짝 웃었고 오미자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혔다. 오미자는 그날 노인에게 속내를 드러냈다."요즘에도 고려장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내가 그리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파출부로 일하며 애들을 키웠어요. 근 삼십년을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했지요. 두 아들 대학 졸업시키고 결혼까지 시켰는데 큰 애가 내 앞으로 된 아파트에 욕심을 내더군요. 몇 번 조르기에 나중에 주마했죠. 하루는 밤이 이슥했는데, 어디 꼭 가볼 데가 있다더군요. 멋모르고 따라왔지요. 눈을 떠 보니 요양원이더군요. 나는 여기가 어디에 박혀 있는지도 몰라요. 병원비와 용돈은 큰 애가 병원 통장으로 입금시키는 눈치예요. 원장과 어떻게 입을 맞췄는지 입이 궁금하면 매점에 달아 놓고 먹으며 된다고 원장이 그러더군요. 처음에는 죽고 싶었는데 인제는 포기했어요. 스스로 무덤을 판 게 다 내 업이다 싶은 것이…. 둘째가 보고 싶은데 전화번호가 바뀌었는지 영 통화가 안되네요."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오미자의 좁은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가냘픈 어깨가 가만히 들썩였다. 한참을 그렇게 절 마당에 앉아 있자니 오미자와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는 소망이 꿈틀거렸다. 노인은 몸만 우선하면 나가서 살림을 차리자고, 운을 떠 보고 싶은 생각에 오미자를 돌아보았다. 오미자는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꽃잔디가 화사하게 피어난 꽃밭을 바라보며 예쁘다, 예뻐,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었다. 오미자는 천성 여자였다.오미자는 노인이 서른다섯에 만났던 정금 어미를 닮았다. 소리를 배운다고 집을 떠나 있던 동안, 숙식을 해결하던 식당의 주인과 눈이 맞아 정금이를 낳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인지는 알 수 없다. 노인은 사랑이 통해야 합방이 이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 자신도 짐작 못할 충동, 쓸쓸한 심사… 비라도 내리는 우중중한 밤이면 그가 누구이든 그러안게 되는 것이다. 죽부인이라도 안고 넘어져야 하는 날이 있단 말이다. 그런 날 아내가 옆에 있었다면 두말 않고 아내를 안았을 것이다. 아내에게는 그리 말하지 못했지만 노인은 아내가 그 마음을 이해한 것이라 믿는다. 정금이를 딸로 거두어 키운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 아내가 죽은 지 꼭 십 년이다.오미자에게 끌리는 이유를 한 가지 더 들자면 아내와 달리 노인이 소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아내는 소리 연습이라도 할라치면 잔소리로 산통을 깨곤 했다. 노인은 오미자 앞에 서면 젊어지는 기분이다. 고희를 넘긴 나이지만 마음만큼은 기운이 펄펄 끓는 이십대 청춘 같다. 소리를 배우겠다고 전국을 떠돌던 이야기를 사골 우려내듯 되풀이해도 지친 기색 없이 들어주는 여자…. 그 여자가 며칠째 보이지 않으니 상사병이 날 지경이다.판소리는 적벽대전을 향해 잰 걸음을 떼어 놓는다. 노인은 적벽대전을 오미자에게 들려줄 생각이다. 노인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부분이기는 하나, 소리를 그만둔 이래 연습한 적이 없어 일단 듣는 일에만 몰두하는 중이다. 노인은 녹음기의 볼륨을 높이려다 말고 병실을 둘러본다.초등학교 교실을 개조한 병실은 가운데 벽을 중심으로 101호와 102호로 나뉘어져 있다. 교실 앞문 쪽이 101호이고 교실 뒷문 쪽이 노인이 있는 102호다. 앞문과 뒷문 사이의 벽에는 두 병실의 공용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은 몸이 불편한 환자들과 눈이 침침한 노인들을 배려하여 문 대신 커튼을 달아 놓았다. 그래서인지 늘 기분 나쁜 지린내가 병실 안에 퀴퀴하게 배어 있다. 시월 들어 찬 바람이 나면서 환기를 잘 시키지 않아서인지 냄새는 두통을 일으킬 지경이다.운동장 쪽 창가에 자리한 노인의 침대와 니은자 형태로 인접한 최의 침대가 텅 비어 있다. 식당에서 먼저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던 그는 노인이 적벽가를 듣기 시작하자 TV 볼륨을 줄이는가 싶더니 어느 새 병실 밖으로 나간 모양이다. 노인은 차라리 잘되었다 싶다. 특별히 군소리는 않지만 깎은 밤처럼 반드러운 최를 이물 없이 대하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노인은 다소 편안해진 눈길로 출입구 쪽 침대를 더듬는다. 언제 돌아왔는지 강이 침대 위에 앉아 벽을 보고 무언가를 먹고 있다."쭈우욱, 쭉…."그 소리는 다름 아닌 두유 한 방울까지도 남기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빨대를 빨아대는 소리다. 냉장고에 먹을 거라고는 사흘 전 노인이 넣어 놓은 두유뿐이니 이번에도 말없이 꺼내먹고 있는 중이다. 노인은 염치를 모르는 강 때문에 속이 다 뒤집어질 지경이나, 조금만 참자고 마음을 다독인다. 복지 과장에게 말해 놓았으니 병실이 곧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노인은 불편한 심사를 헛기침으로 내뱉고 녹음기의 볼륨을 높인다.조조가 제장들과 둘러앉아 잔치를 벌이다가 동남풍을 타고 나는 듯 날아오는 황개의 배를 발견하고는 식량이 온다며 좋아 어쩔 줄 모른다. 노인은 이 대목에서 비칠비칠 새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천하의 조조가 공명의 꾀에 속수무책 당하는 것도 깨소금 맛이지만 백만 대군의 수장답잖게 촐싹대는 모습이 가관이기 때문이다. 또한 박동진의 아니리는 오죽 넉살이 좋으며 소리는 생동감이 넘치는가. 박 명창은 현장을 직접 가봐야 판소리를 제대로 할 수 있다며 왜정 시대에도 중국을 세 번이나 찾아갔었다고 하지 않던가.하긴 노인도 박 명창처럼 집을 나온 적이 있기는 하다. 열다섯 살 무렵, 박녹주의 유랑극단 공연을 보고 무작정 집을 나선 것이다. 그러나 유랑 극단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고 노인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소리를 배우겠다고 광주로 전주로 떠돌았지만 가진 것 없이, 몇 년씩 걸리는 소리 공부를 계속 할 수는 없었다. 득음을 하겠다고 산에 들어간 것도 수차례였다. 크고 작은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평생을 소리 주변에서 머물던 노인의 이름이 근동에 알려지면서 노인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노인은 작은 소극장이나 대학, 평생교육센터 등지에서 고수와 함께 소리를 했다. 그러나 인생의 황금기는 길지 않았다. 어느 명창의 공연에서 이슬떨이 목에 대해 듣고 난 뒤, 채워지지 않던 소리에 대해 미련을 접은 것이었다."성음에는 방울 목, 튀는 목, 너는 목, 줍는 목, 펴는 목 등이 있는데 전라북도 부안 태생의 판소리 명창 신영채가 잘 쓰던 이슬떨이 목이라는 게 있습니다. 소리를 천천히 단계적으로 끌어 올렸다가, 잘게 꺾어 주루룩 훑어 내리는 것이지요. 하고 많은 이름 중에 하필이면 이슬떨이목일까 궁금할 것입니다. 여름날 새벽에 논을 보러 가면 나락에 이슬이 잔뜩 맺혀 있다가 바짓가랑이에 닿아 주루룩 떨어지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을 흉내 낸 소리지요. 이슬이 바짓가랑이를 적시자 처음에는 짜증이 났겠지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락에 달려 낭창거리던 이슬이 자기 바짓가랑이에 걸려 주루룩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신 명창은 그때 이슬이 떨어지면서 내지르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지요. 소리꾼의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는지요."가난하여 엿장수를 하며 소리를 익혔다는 신 명창의 이야기는 소름이 돋도록 강한 충격을 주었다. 하찮은 이슬방울에서도 영감을 얻고 자기 소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과 결코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소리는 적벽강 싸움의 한복판이다. 황개가 화선 이십 척에 불을 당겨놓자 불은 바람의 힘을 빌고, 바람은 불을 도와 조조의 배 수백 척은 불길에 휩싸이고 만다. 조조는 쇠사슬로 이어져 속수무책 불바다가 된 백만 대군의 배를 버리고 똥줄 빠지게 도망을 간다. 이때, 죄 없는 장졸들만 하릴없이 죽어 나간다.노인은 이쯤에서 녹음기를 끈다. 앞으로 죽을 목숨이 즐비하고 그 죽은 자들이 새가 되어 중모리로 울어대는 대목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 조조가 달아나며 웃음 웃을 적마다 복병이 나타나는 촌극이 아니리로 펼쳐지지만 그것만 따로 떼어 들을 수 없으니 차라리 끌 도리 밖에.노인은 엎드려 있던 몸을 힘주어 일으키다 말고 아이쿠야, 하고 다시 엎어진다. 허리께에서 시작된 통증이 숨을 쉴 때마다 쿡쿡 쑤시며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이마와 잔등에 식은땀이 배어 나온다."…많이 아픈 감. 내가 간호 과장한티 진통제라도 놔 달라고 허까?"강이 다가와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묻는다. 눈이 내린 듯 허연 머리와 거무죽죽한 피부가 제각각 겉돈다. 숭숭 빠진 이 사이로 달짝지근하면서도 비릿한 두유 냄새가 풍긴다. 노인은 구부정하게 숙인 강의 얼굴을 손사래로 물린다."일 없어."노인은 두 손으로 침대 모서리를 짚고 발바닥으로 바닥의 슬리퍼를 찾는다. 강은 침대 밑에서 냉큼 슬리퍼를 찾아 발에 끼워 준다. 노인은 부축하는 강의 손을 밀치며 근근이 휠체어에 올라탄다.휠체어를 굴려 복도로 나서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복도는 길지 않다. 101호에서 108호까지 네 개의 교실을 지난다. 병실마다 서너 명의 환자들이 침대 위에 고치처럼 누워 있다. 기저귀를 찬 채 앙상한 다리를 드러낸 노인이 텅 빈 동공으로 복도를 응시한다. 노인의 삭정이 같은 팔에 닝겔 병이 매달려 있다. 고사 직전, 수액을 달고 있는 정원의 나무와 다를 바 없다. 출퇴근을 하며 12시간 근무 하는 도우미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만이 간간이 적막을 깬다.노인은 중앙 현관에서 휠체어를 멈춘다. 중앙 현관을 지나쳐 복도를 계속 따라간다면 112호의 오미자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중앙 현관의 왼쪽에 위치한 병실은 여사(女捨)여서 그 쪽으로 발길을 돌리기가 수월치 않다. 복지과장인 김여사가 다가와 노인의 옷깃을 여며주며 상냥하게 말한다."영감님, 오미자 할머니 기다리시죠? 영감님 큰일났네. 할머니 못 봐서 상사병 나겠네요?""상사병은 무슨…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호호… 농담이구요. 며칠 전 둘째 아들 전화 받고 계속 기분이 안 좋으세요."복지과장은 죽이라도 좀 갖다 줘야겠다며 식당 쪽으로 사라진다.며칠 전, 오미자가 전화를 받던 자리에 노인도 있었다. 마침 간호사실에 변비약을 받으러 갔다가 무슨 사연인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오미자가 작게 흐느꼈다. 아마 데리러 오지 못한다는 말인 것 같았다.노인은 제 일인 양 가슴이 아팠다. 정작 노인 자신도 막내아들까지 장가보내고 난 뒤, 홀가분하게 혼자 살았는데 저녁에 운동을 하러 나갔다가 오토바이에 치여 허리를 못 쓰게 되었다. 혼자 밥을 해 먹을 수 없어 근처에 사는 막내아들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한 달 만에 아들 넷이 모여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내자는 거창한 회의를 한 모양이었다."아버지, 거기에 계시면 나이가 비슷하신 친구 분들도 계시고, 약도 꼬박꼬박 잘 챙겨준대요. 심장 약 안 챙겨 드셔서, 협심증으로 몇 달에 한 번씩 입원하시곤 하잖아요. 거기 가시면 그럴 일도 없구요. 거기에서 물리 치료를 해 준다고 하니, 아픈 몸 이끌고 움직일 필요도 없고… 저희들 부담도 그만큼 덜어주는 셈이구요."큰 아들의 말을 요약해보면 저희들을 위해 노인 병원에서 생을 마감해 달라는 말이었다. 노인은 결코 그럴 마음이 없었다. 허리만 나으면 나갈 생각으로 물리치료도 열심히 받고 있다. 요즘은 오미자와 여생을 함께 할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왔다.노인은 그날 고백을 할 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미를 요양원에 버려 둔 자식들에게 마음 주지 말고 자신하고 남은 생을 보내자고 말이다. 열 자식보다 서방이 낫다고, 늘그막에 서로 등 긁어주며 사는 것도 행복이라고, 오미자의 마음을 풀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아들자식 전화 때문에 심상해 있을 오미자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노인은 오미자가 누워있는 병실 쪽을 목을 빼고 바라본다.노인은 휠체어를 굴려 현관을 빠져 나온다. 스무 개의 계단 아래 잔디가 심어진 운동장이 펼쳐져 있고 운동장 가에는 파라솔이 사오 미터 간격으로 놓여 있다. 모두 여섯 개의 파라솔이 있는데 파라솔은 그늘 아래 흰 플라스틱 의자를 네 개씩 품고 있다. 환자들을 찾는 가족들은 이곳에 앉아 먹을 것을 펼쳐 놓고 먹거나 담소를 나누고 돌아간다. 퀴퀴한 지린내가 진동하는 병실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는다. 파라솔 하나를 차지하고 최가 앉아 있다.최의 아들도 지난 주 일요일에 왔는데 파라솔에서 만나고 갔다. 최의 자식들은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병원을 찾는다. 아들 둘과 딸이 하나 있는데 같은 시간에 온 적은 한 번도 없다. 어쩌다 같은 일요일에 오더라도 함께 오는 법이 없다. 하나가 왔다 가면 몇 시간 후 다른 자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기이한 풍경의 수수께끼는 다름 아닌 재산 때문이다. 아직 재산이 최의 앞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식들은 서로 잘 보여 유산을 더 받기 위해 눈물어린 노력을 기울인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계산적인 최는 이 병원에서 가장 대우받는, 모범적인 아버지의 상을 보여주고 있다. 아들자식 넷을 키우고 분가 시키느라 전답을 다 팔고 달랑 두 칸짜리 집 한 채만을 갖고 있는 노인은 최의 선견지명이 부러울 따름이다. 사실 오미자에게 고백을 선뜻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저축해 놓은 돈으로 둘이 얼마나 살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받을 거 다 받아간 자식들이 새어머니라고 깍듯이 모실 리 만무하다.운동장 가의 은행나무가 부챗살처럼 퍼지는 햇살을 받아 노랗게 빛난다. 노인은 경사진 길로 휠체어를 굴려 은행나무 밑으로 내려간다. 바람 한 자락이 불어와 옷깃을 파고든다. 햇살은 따듯하나 소름이 오소소 돋는 바람이다. 눈을 들어 앞산을 바라본다. 단풍이 물들 채비를 하느라 푸르던 산 빛이 누르께하다. 작년 가을에 들어올 때는 겨울만 지내고 나가자 했건만 두 번의 가을을 여기에서 맞게 되는 것이다.노인은 운동장을 돌아 최가 앉아 있는 파라솔로 다가간다. 핸드폰을 붙잡고 열심히 자판을 누르던 최가 노인을 보더니 슬그머니 전화기를 닫는다."나 때문에 방해가 되었나?"노인이 머쓱해져서 묻는다."아냐, 오여사한테 문자 보냈어. 방에만 있지 말고 좀 나오라고."노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뭐… 누구한테 문자를 보내?"최가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여사에게도 있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내가 오여사한테 핸드폰 하나 선물했거든. 마침 생일이라 길래."그러고 보니 오미자가 병실에 틀어박힌 날짜하고 최가 물건 사러 시내에 다녀온 날짜가 맞아 떨어진다. 갑자기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버린다. 최가 오미자에게 핸드폰을 그냥 사 주었을 리 만무하다. 노인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복병을 만난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진다."그래, 나온다고 하던가?"노인은 오미자가 그깟 핸드폰에 넘어갈 여자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아니 그랬으면 한다."아직 문자는 못 보내지, 아마. 어이, 저기 나오는 구먼."최의 말대로 오미자가 잔디가 깔린 운동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환자복 위에 분홍빛 스웨터를 걸친 오미자의 호리호리한 몸매가 날아갈 듯 날렵하다. 아픈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어머, 두 분이 같이 계셨네요?"오미자가 언제 아팠냐는 듯이 생글거리며 다가온다. 노인은 묘한 배신감을 느낀다."복지 과장이 어디 아프다던데…."노인은 오미자의 밝은 표정이 못마땅하여 말끝을 흐린다."호호…. 다 나았어요. 최 영감님이 사 주신 전화로 둘째와 방금 통화를 했거든요. 복지과장님이 웃으니까 보기 좋다고 사진 찍어주셨는데 좀, 보실래요?"핸드폰을 들이대는 오미자의 얼굴이 꽃처럼 환해진다. 최가 가진 자의 여유를 부리며 호탕하게 웃는다."아니, 오여사. 이거 청출어람이구만. 나는 시방 겨우 문자만 보내는 디, 사진까지 찍는단 말요? 허허허…."둘은 머리를 맞대고 문자를 같이 보네, 사진 찍는 법을 가르쳐주네, 하며 다정하게 햇살을 받고 있다. 노인은 갑자기 외로워진다. 오미자의 속내를 혼자만 알고 있는 것 같아 우쭐했는데 그 사실이 일순간에 시시해져 버린다. 그렇다면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다. 아직 때가 이르지는 않았지만 오미자의 마음을 잃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오여사, 내가 요즘 소리 연습하는 게 있는데 한번 들어 볼테요?"머리를 맛 댄 둘을 의식해서인지 노인의 목소리가 성마르게 갈라진다. 오미자가 소리, 라는 말에 반색을 하고 고개를 든다."소리요? 전부터 들려주신다던 적벽가 말씀이세요?"노인은 오미자가 적벽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아무려면 몇 푼짜리 핸드폰을 적벽가에 비할까보냐."흠흠, 아직 연습이 덜 되기는 했지만 한바탕 뽑아드릴까?"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다. 오미자가 목을 빼고 노인의 얼굴을 우러른다. 그때 최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빽 지른다."오여사! 정말 이럴 거요? 나하고 장영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란 말요. 이래도 흥, 조래도 흥, 하는 거 보기 싫으니께."최는 금방이라도 담판을 지을 기세다. 노인은 소리를 하려다 말고 오미자를 바라본다. 오미자가 고개를 떨구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리고 나직나직 입을 뗀다."저는… 두 분 다 좋아요. 최 영감님은 선물도 사 주시고, 먹을 것도 잘 사주시고…. 장 영감님은 자상하시고, 소리도 잘하세요. 장 영감님 소리를 들으면 한스러운 것도 다 잊혀지고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냥 두 분 다 여기서 저랑 같이 지내면 안 될까요?"노인은 기가 막히다. 이게 다 무슨 소린가. 둘이 같이 살자고? 지금 소꿉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노인이 폭폭한 심사를 누르고 있는데 성질 급한 최가 노인의 말을 대신한다."오여사.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요. 나는 한두 달 새 여길 나갈 건데 오여사가 결정 하슈. 내가 나가면 핸드폰 사용료도 안낼 거니께 그것도 끊길 거요. 사십 평 아파트 안주인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그것이 싫다면 오여사는 굴러 온 복을 차버리는 거나 매 한가지요. 오여사가 알아서 하슈."최가 일사천리로 말을 마치고 병실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최의 허리가 더욱 꼿꼿해 보인다. 휴양 차, 노인 병원을 들락거리는 최는 분명 노인 자신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고개를 묻고 생각에 잠긴 오미자의 등 위로 차갑게 식은 바람이 내려앉는다. 노인은 오미자의 어깨 위에 검불 같은 손을 올려놓는다. 오미자는 미동도 않는다.병실로 가는 경사면으로 휠체어를 굴리다 말고 노인은 본관 뒤편의 하얀 건물을 처음인 양 낯설게 바라본다. 중증 환자와 치매 환자들이 있는 병동이다. 포장이 잘 된 운동장과 달리 후관으로 가는 길은 발길이 뜸해 풀이 무성하다. 휠체어 바퀴가 풀에 걸려 뒤뚱거리며 잘 나아가지 않는다. 손에 힘을 주어 밀다보니 얼마 가지 않았는데도 손바닥이 축축하고 이마에 땀이 맺힌다. 노인이 끙끙대고 있는데 갑자기 휠체어가 가볍게 앞으로 나아간다. 언제 왔는지 오미자가 휠체어를 밀고 있다."거긴 뭐 하러 가려구요?"본관과 이십 미터 정도 떨어진 후관은 모두들 가기를 꺼려하는 곳이다. 본관에서 상태가 더 나빠지면 후관으로 직행하고,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수순이 이곳의 상례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후관은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한 번 가 보려는 참이요. 같이 갈 테요?""나는 안 갈래요. 돌아갈 곳은 없지만 거기는 아니에요."오미자가 노인의 휠체어를 본관 쪽으로 다시 돌린다."언젠가 한번 가 봤는데 못 봐 주겠더군요. 창문마다 창살이 쳐지고 들어가는 현관문도 열쇠가 채워져 있더라구요. 노망 든 노인들이니 밖으로 못 나오게 그러는 모양인데 내 맘이 더 이상해지더라구요. 그 사람들이야 갇혀 있는지 알기나 하겠냐마는…."오미자의 말을 듣자 노인은 울적해진다. 왜 물리 치료를 받아도 허리가 점점 나빠지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러다가 정말 저 곳에 갇히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노인은 오미자의 손을 덥석 움켜쥔다."오여사, 나랑 여기서 나갑시다. 내가 최 영감만큼 재산은 없지만 오여사 하나 책임질 정도는 돼요. 오여사 좋아하는 소리도 날마다 들려줄 테고. 응? 우리 내일이라도 당장 나갑시다."다급하게 매달리는 노인과는 달리 오미자가 담담하게 말한다."왜 자꾸 두 분 모두 나가 살자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둘째가 그러더군요. 아직은 아니지만 조금만 기다리라구요. 저는 그냥 이곳에서 둘째를 기다릴 거예요. 장 영감님, 다 그만 두고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노인은 뭔가를 부탁할 게 있다는 오미자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린다."저는 인생의 즐거움을 모르고 살았어요. 삼십 년을 남의 집에서 살았죠. 영감님이 세상을 유람하는 동안, 저는 똑같은 창문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만을 보고 살았다는 말이지요. 제 삶에는 새롭거나 특별한 날이 없었어요. 주인 내외가 생일이다, 결혼기념일이다, 음악회다, 극장이다 하며 외출을 하는 날이면 마냥 부러웠죠. 생일이라고 최 영감님이 저에게 핸드폰을 선물하는데 눈물이 나오더군요. 처음이었죠. 사실, 최 영감님이 좋은 건 아니에요. 돈이 많아 풍족하기는 해도 얼음장처럼 차잖아요. 그래도 그게 좋더라구요. 저를 챙겨주는 것이…. 장 영감님, 제가 장 영감님 좋아하는 거 아시죠? 그래서 부탁인데요, 적벽가 부르실 때 여기 병원 사람들 모두 불러서 들려주셨으면 해요. 공연을 하는 거죠. 저는 제일 예쁜 옷으로 차려 입고 맨 앞에서 들을 거예요. 그게 제 남은 소원이에요."노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병실에 들어선다. 복지 과장을 만나 소리 공연에 대해 말하고 들어오는 길이다. 공연이라 해 봤자 식당에 임시 무대를 만들고 하는 공연일 뿐이다. 그래도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공연이다. 어쩌면 이것이 살아생전 마지막 공연이 될지도 모른다. 또한 그 자리는 오미자를 위한 자리가 될 것이다. 공연을 마치고 노인은 오미자에게 꽃다발을 전하며 청혼을 할 계획이다. 복지과장에게는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노인들을 위해 위로 공연을 하는 것으로 말해 두었다. 날짜는 토요일 저녁으로 잡혔다.노인이 방에 들어서자 강이 화들짝 놀라 두 손에 든 것을 얼른 뒤로 감춘다. 강의 거무죽죽한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른다. 그 모습이 내외하는 새색시처럼 수줍어 보인다. 노인이 무얼 감추느냐고 다그치자,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하던 강이 등 뒤에 있던 것을 앞으로 내밀어 보인다. 지난 일요일에 준 사탕과 귤 세 개가 봉지에 담겨 있다."오 여사가 거동을 했다고 혀서 가볼 참이었구만. 메칠 못 먹었으니 월매나 입이 궁금하겄어. 그려서 이거라도 갖다주려구 말이지. 흐흐."강이 말을 마치고 검은 봉지를 흔들며 날듯이 병실을 빠져 나간다. 노인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는다. 먹을 거라면 자다가도 잃어나는 사람이 제 먹을 것을 오 여사에게 나눠줄 생각을 하다니…. 갑자기 강이 십 년은 젊어 보인다. 노인은 헛웃음이 나온다. 한 방에 사는 노인 셋이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최가 달려 나가는 강을 멀뚱히 바라보더니 냉장고에서 식혜 음료 한 박스를 꺼내 든다. 식혜는 오미자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다. 최는 식혜를 박스에서 꺼내 마른 수건으로 꼼꼼히 물기를 닦는다.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녹음기를 튼다. 적벽가가 호탕하게 흘러나온다. 노인은 볼륨을 최대로 높인다. 최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것을 의식하며 노인은 혼인 비행을 준비하는 수벌처럼 숨을 고른다. 가슴에 바람을 잔뜩 채우고 배에 힘을 준다. 화룡도로 들어가는 관운장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노인은 휠체어에서 일어나 쥘부채를 펼치듯 손바닥을 활짝 벌린다. 바야흐로 동남풍이 불어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