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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⑦품새·시범경연 활성화

60년대까지 주로 관(館, 도장) 중심으로 이뤄지던 태권도 수련이 70년대 이후부터 학교 등으로 옮아가면서 태권도 수련자들도 바뀌게 됐다. 60년대에는 일반 성인과 중고생들이 도장에서 태권도를 수련하면서 각종 대회에 출전했으나, 요즘에는 학교나 실업팀 등에서 수련하는 선수들이 대회에 출전하고 일반 도장들은 유치원생과 초등생 등만을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다.전북이 주도했던 태권도의 경기화(스포츠화)가 올림픽 종목 채택 등 태권도의 세계화에는 크게 기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태권도의 전문화(엘리트화)라는 한계를 초래하기도 한 것이다. 즉, 태권도가 경기화되면서 경기에 참여하는 소수의 전문수련자들만의 스포츠로 변질되고, 일반인들이 즐길 수 있는 생활체육의 역할은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질과 양의 균형이 깨진 이러한 편향적인 발전은 사실 태권도의 경기화가 시도될 때부터 제기됐던 우려이기도 하다. 무술로서의 태권도는 원래 품새(형)와 겨루기, 격파 등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경기화된 태권도는 이 중에서 품새와 격파 등 경연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겨루기만을 채택했다. 게다가 선수의 안전과 운영의 효율 등을 이유로 무술의 일부 요소들이 경기에서는 제한됨으로써 원래의 태권도와는 거리가 있는 경기의 모습을 띠게 된다.태권도를 보다 풍성하고 가치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도로써의 태권도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반성이 언제부턴가 시작됐다. 전북에서도 이러한 바람은 일고 있었다. 한 때는 전국을 호령했지만, 겨루기에서는 더 이상 수도권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도 작용했다.그 결실은 2003년 우석대 총장기 전국 품새대회 형태로 나타났다. 대한태권도협회가 인준한 이 대회는 겨루기가 아닌 품새와 경연을 대상으로 했으며, 대한태권도협회는 이듬해인 2004년에 제1회 대한태권도협회장기 품새대회를 열게 된다. 태권도의 경기화(겨루기)를 이끌었던 지역에서 전국 최초로 품새대회를 열게 됐게 된 것이다. 우석대는 또 2013년 대학연맹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태권 체조와 시범에서 1, 2, 3위를 차지했으며, 대통령기국방부장관기, 대한연맹, 여성부장관기 등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매년 품새대회에서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하는 등 지금까지 품새와 시범 등에서 전국적으로 우뚝 서게 된다. 우석대는 태권도의 문화콘텐츠화에도 앞서 가고 있다. 2007년 시범단을 창단해 태권도 뮤지컬로는 최초로 서울 국립극장에서 45일동안 상설공연을 했으며, 200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시범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오는 26일부터 시작되는 우석대 총장기 겨루기대회에서는 전국에서 최초로 5인조 단체전 경기를 도입했다. 1999년 체육학과 선수 3명으로 시작해서 2005년 태권도학과를 창설한 우석대는 올해는 전국의 태권도학과 중에서 처음으로 특성화 사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2006년 태권도 전공으로 시작해서 2010년 학과로 독립한 전주대는 매년 40명의 학생을 모집하고 있으며 현재 각종 대표 시범단에 12명이 활동하고 있다. 대태협 5명, 세계태권도연맹 4명, 국기원 1명, 태권도원 2명 등이다. 올해는 -54㎏급 최현근이 세계대학선수권 대표로 출전하게 됐다. 3년전부터 미국 7개 체육관과 협약을 맺고 미국에서 인턴십 교육을 받고 있다.2003년 창단된 비전대는 도내 전문대에서는 최초로 2008년부터 3~4학년 심화과정 학사인준을 받았다. 심화과정을 거치면 4년제 인정받아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다. 품새와 시범단을 위주로 운영하고 있으며, 여수엑스포와 상해엑스포 개막식, 그리고 제8회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 폐회식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세계대회 7연승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서영애 사범이 품새를 가르치고 있다. 작년 국민생활대제전에서 두드러진 성적을 보였으며, 태권체조에서 우수성을 보이고 있다. 한마당 대회에서는 격파왕을 낳기도 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품새 실업팀을 가지고 있는 곳도 전북이다. 완주군청은 지난해 12월 서영애 8단을 비롯한 5명의 선수로 품새팀을 창단했으며, 이후 각종 대회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다.전북일보사는 10년전부터 무주군과 함께 매년 11월말에 웰빙태권댄스 및 시범경연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겨루기가 아닌 생활체조의 일부로 태권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남녀노소 누구가 태권도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또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조직위와 전북태권도협회의 공동 주관으로 매년 7월에 열리고 있는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는 태권도인과 일반인이 함께 할 수 있는 문화관광상품으로서의 태권도 축제를 지향하고 있으며 올해 8번째 행사를 치렀다. 이처럼 전북에서는 대학들을 중심으로 언론과 기관 등이 힘으로 합쳐 시범공연과 품새, 체조 등에서 태권도의 새로운 부흥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 태권도
  • 이성원
  • 2014.07.16 23:02

제6회 세계청소년태권도캠프 19일 '개막'

태권도를 연마하는 지구촌 청소년들의 축제의 장 제6회 세계청소년태권도캠프가 이달 19일부터 25일까지 무주 태권도원과 서울 일원에서 펼쳐진다. 태권도진흥재단(이사장 배종신)과 세계태권도연맹(총재 조정원이하 WTF)이 공동 주최하는 이 행사는 다섯 번의 행사를 치르는 동안 태권도 수련을 통해 태권도 정신과 올림픽 가치를 배우고 세계 태권도 수련 청소년들이 문화교류를 하는 장으로서 호평을 받아왔다. 이번 캠프에는 2016년 올림픽 개최지인 브라질을 비롯해 크로아티아, 말레이시아, 통가, 호주, 남아공, 엘살바도르 등 세계 17개국 128명의 청소년들이 참가한다. 캠프에 참가한 청소년들은 태권도원의 수련 교육 프로그램과 전문 지도 교수로부터 품새, 겨루기 강습을 받게 되며 2000년 시드니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경훈 선수의 특별 수련도 경험한다. 또한 WTF가 준비한 올림픽 가치 실천교육에 참가해 태권도수련인 신조 낭독을 통해 평화와 화합을 지향하는 올림픽 정신을 익히고 태권도원 전망대에서 태권도 시범과 격파 퍼포먼스도 펼칠 예정이다.태권도진흥재단 배종신 이사장은 세계 태권도인의 성지인 태권도원에서 최고의 교육 서비스와 시설을 마음껏 누리길 바란다며 여러 가지 경험들을 통해 태권도 수련인의 자부심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23일 한국전통문화체험, 전주한옥마을 관광, 민속의상 경연 및 장랑 시간 등 태권도원의 일정을 거쳐 24일 서울 국기원 방문과 WTF의 만찬을 끝으로 캠프 일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 태권도
  • 김효종
  • 2014.07.14 23:02

무주 태권도원, 세계적 명소 '한발짝'

무주 태권도원이 지난 9일로 개원 100일을 맞았다(4월 1일 개원). 애초 4월 26일로 예정됐던 개원식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국빈이 참석하기로 돼 있었지만, 세월호 사고로 모든 축하 행사가 무산됐다.10일 태권도원 관계자에 따르면 개원 후 이날까지 태권도원에는 5만7000여명의 관광객이 찾았다.(외국인 4000명, 비율 7%) 지난 4월에는 1만2000명, 5월 2만1000명, 6월부터 현재까지 2만4000명이 찾아 점증세를 보였다. 수익은 4월 5000만원, 5월 8000만원, 6월부터 현재까지 1억1700만원으로 총 3억원 상당을 나타냈다.이에 대해 전주의 직장인 이모 씨(59)는 세계 태권도의 성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만족할 만한 성적표는 아니지 않나라고 반응했다. 그러나 개원일부터 보름간 무료입장 행사를 벌였다는 점, 교육부가 수학여행을 일괄 금지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반인들은 개원 후 100일이 지난 태권도원을 미완의 대기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 각 부처와 공기업, 전북도와 무주군 등 유관기관들은 활성화에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실제 태권도원으로 향하는 2차선 도로는 시속 60㎞로 15분 이상을 달리는 동안 계속되고, 전국에서의 무주 직통 버스 역시 드문데다, 철도 교통망도 전무한 상황이다. 또 전북에 국제공항이 없어 세계 각 곳에서 장시간 비행해 한국에 온 태권도인들이 2시간의 추가 차량 이동을 해야 한다는 점 등 태권도원은 교통망 미흡만 갖고도 아쉬움이 겹겹이 쌓여있다.태권도원 실무자 역시 해외 현장 홍보를 통해 관광객을 유치하긴 하는데, 1회성에 그치는 게 아쉽다며 여러 분야의 상황이 개선됐으면 더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얘기했다.태권도원은 오는 19~25일 세계 청소년 태권도 캠프를, 29~31일 국제 청소년 야영대회를 개최한다. 또 오는 9월 4일에는 태권도의 날을 맞아 못했던 태권도원 개원식을 거행하며, 행사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국빈 다수가 참석할 예정이다.

  • 태권도
  • 이영준
  • 2014.07.11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⑥1970년대 침체기

태권도는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극한 관심 속에 고속도의 발전을 맞는다. 대태협과 국제태권도연맹, 국기원이 잇따라 만들어지고, 해외사범 파견 등 태권도의 세계화 활동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태권도를 가르치는 학교가 급속히 늘어나고, 대통령배를 비롯한 각종 국내외 대회도 활발하게 펼쳐졌다.그러나 이 시기 정부의 고도성장 정책이 전북도에게는 상대적인 침체와 낙후를 가져왔듯이, 우리나라 태권도의 전반적인 발전은 반대로 전북 태권도의 침체기의 시작을 의미했다.한 때 전국에서 다섯 번째, 여섯 번째에 들던 전북의 인구가 계속 줄고 경제는 타 지역에 비해 뒷걸음질을 계속하다보니 전북의 태권도, 더 나아가 전북의 체육이 전반적으로 고전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대한태권도협회가 70년대부터 계간지 형태로 발행해온 태권도지를 보면 70년대에 태권도가 얼마나 급속하게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매 회마다 각종 대회소식과 함께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의 태권도, 학교 순례, 나의 수련기 등을 담고 있다.소년체전, 전국체전, 중고연맹회장기 등의 전국대회뿐만 아니라, 서울을 시작으로 각 지역마다 크고 작은 태권도대회가 잇따라 생겨나 담을 소식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각종 대회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일선학교의 태권도 보급이 그만큼 활성화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6년에 김제 만경고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학교체육 정규시간에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서울, 경기 등 타지역의 학교들도 잇따라 태권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70년대 초반부터는 수도권의 많은 학교들이 태권도를 시작했다.60년대말부터 정부가 활발하게 추진해온 해외사범 파견의 결과도 각종 국제대회의 개최로 이어졌다. 74년 서울에서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열린데 이어 76년에는 호주 맬버른에서 제2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와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제1회 유럽선수권대회가 열렸다.그러나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태권도가 활성화됨에 따라 전북의 태권도는 상대적인 낙후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전북에서 활약했던 많은 선수들이 지도자로 변신해 일자리를 찾아 해외와 국내 타 지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전북의 지도자가 가르친 학생이나 전북출신 학생들이 다른 지역의 선수로 뛰는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전국적인 평준화가 이뤄졌다.74년 열린 대통령기 제9회 전국단체대항 경기에 대한 태권도지의 기사에는 경기는 처음부터 결승전까지 우열을 가릴 수 없어 전국적으로 실력의 평준화가 꾀해졌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날 벌어진 결승전 일반부 8체급은 () 묘기의 연속이었는데 연장전 빅승(비김)이 세 게임이나 되었다고 나와있다.이대회에서 고등부 우승은 서울체고, 일반부 우승과 준우승은 경기 B팀과 경기A팀이 각각 차지했는데, 전북에서는 입상팀이 없었다. 태권도도 이제는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기할 점은 서울체고가 팀을 만든지 불과 1년만에 이 대회에서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로 고등부 우승을 차지했다는데 있었는데, 서울체고를 이끈 사람이 바로 전북출신 오주열 사범이었다. 오주열 사범은 61년에 전북과 서울팀의 겨루기에도 참가했던 태권도 1세대로 한양대 체육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변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체육고둥학교에 태권도부를 만들어 코치겸 감독 역할을 했다. 서울체고가 대통령기 대회에서 센세이셔널을 일으킴에 따라 다른 시도 지역의 체육고등학교에도 잇따라 태권도부가 생겨나게 됐다고 한다. 오 사범은 브라질을 거쳐 87년 미국 마이애미에 정착했다.그러면 1970년대 중반 이후 전북 태권도는 어떠했는가? 71년과 72년 서울에서 열린 전국체전 종합우승으로 정점을 찍은 뒤 73년 6위, 76년 7위, 77년와 79년 9위, 80년과 81년 8위 등으로 내려앉았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전국이 11개 시도로 나뉘었던 시절이었다. 70년대 중반까지 선두권을 거의 놓치지 않았던 전북의 태권도가 7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중위권도 유지하지 못하고 거의 바닥권까지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전북의 태권도는 이후에도 부침을 계속하고 있지만,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한때 270만명에 이르렀던 전북의 인구가 180만명으로 줄고, 전북의 경제력은 최하위권이다. 인구와 경제력이 떨어지면 좋은 선수와 지도자가 나오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북의 태권도가 최하위권까지 추락하지 않고 그나마 버티는 것은 일선 지도자들의 열성적인 노력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지만 태권도 종주도로서 태권도원을 유치한 전북으로서는 현재의 위치에 만족할 수 없다. 화려했던 옛날은 아니더라도 자존심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필요하다.

  • 태권도
  • 이성원
  • 2014.07.09 23:02

세계인 열기가득…태권도 성지 '자리매김'

전세계 태권도인들의 축제 한마당으로 열린 제8회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가 8일 폐막했다.태권도원 T1경기장에서 열린 이날 폐막식에는 조직위 고문인 배종신 태권도진흥재단 이사장과 부회장인 황정수 무주군수, 부위원장인 유형환 전북태권도협회 회장, 이한승 무주군의회 의장을 비롯한 군의원들, 이현곤 사범을 비롯한 태권도계 인사와 각국 선수단 등 2000여 명이 참석해 전주비전대 태권도시범단의 시범에 이어 기념식, 환송만찬, 낙화놀이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황정수 군수는 환송사를 통해 이번 엑스포는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참가자 모두가 하나라는 확신을 안겨준 무대였고 여러분의 열정은 이번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며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의 열기를 가득 담은 태권도원 역시 태권도 성지로, 무주군의 대표 명소로, 한류의 상징으로 당당히 자리 잡게 될 것을 믿는다고 밝혔다. 지난 5일 막을 올린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는 수준 높은 세미나와 완벽한 경기운영, 깔끔한 진행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태권도 시연단의 개폐막식 퍼포먼스와 반디랜드, 머루와인동굴, 덕유산리조트를 연계한 무주투어, 전통 불꽃놀이 낙화놀이 시연 등으로 참가자들로부터 박수를 받아냈다.또 경기와 학술이 접목된 수준 높은 국제행사로 태권도의 명품화, 세계화, 공식화를 주도하며 세계인들의 이목을 태권도원으로 이끈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참가 선수들은 태권도원에서 개최된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라며 태권도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더 열심히 연마해야겠다는 열정을 품을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제8회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는 전라북도와 무주군, 태권도진흥재단, 대한태권도협회가 주최하고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 조직위원회와 전라북도태권도협회가 주관했으며 태권도원과 올림픽 공식종목으로서의 태권도를 전 세계에 알린다는 취지에서 해마다 무주에서 열리고 있다. 이성원

  • 태권도
  • 이성원
  • 2014.07.09 23:02

태권 성지 찾은 네팔 아이들 '행복'

NGO의 후원으로 우리 아이들이 태권도문화엑스포에 참가할 수 있게 됐습니다. 매우 고맙습니다.12~16살의 고아들 9명을 이끌고 태권도문화엑스포에 참가한 네팔의 아속 카드카 사범(ASHOK KHADKA, 29)은 내년에도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이 한국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이렇게 말했다.아속 사범이 태권도문화엑스포에 참가한 것은 올해로 4년째. 그러나 올해는 특별한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어서 그 어느 해에 비해 감회가 남다르다. 갱단의 손아귀에서 어렵게 벗어났거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고아 등이다.아속사범은 1년 2개월전부터 이들에게 무료로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했기 때문에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는 점차 현실이 됐고, 보람은 점점 커졌다. 아이들이 정신적 학대의 충격에서 점차 벗어나 행복감을 찾기 시작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이들에게 한국의 태권도원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전적인 부담이 너무 커서 선뜻 결정하지는 못했다. 여러가지 궁리 끝에 페이스북과 인터넷 등을 통해 사연을 알리며 도움을 호소했고, 100여명의 시민들이 후원에 응했다.어렵게 비행기를 탄 아이들은 이번 행사에서 겨루기와 품새 종목에 출전한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행복감이 교차한다.품새를 즐긴다는 비샬 그룽(Bishal Gurung, 14)양은 태권도를 배우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단련이 되고 나 자신을 방어할 수 있게 돼서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아속 사범은 많은 시민들이 후원을 해줬지만, 비용을 100% 충당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내년에도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아이들을 반드시 데려오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 태권도
  • 이성원
  • 2014.07.07 23:02

세계 태권도인 대축제 무주서 막 올라

제8회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가 지난 5일 무주 태권도원 T1경기장에서 개막식을 갖고 4박 5일간의 일정에 돌입했다.개막식에는 송하진 전북도지사와 김광호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 조직위원장, 정만순 국기원장, 유형환 전라북도 태권도협회장, 유진환 태권도진흥재단 사무총장, 김광수 도의회 의장, 황정수 무주군수와 이한승 군의회 의장을 비롯해 전 세계 26개국 4000여 명의 선수단과 사범, 심판 등 태권도 관계자들이 참석했다.황정수 무주군수는 태권도원이 개원하고 개최되는 첫 행사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지난 대회를 마무리하며 태권도원에서 만나자고 했던 약속을 지키게 돼 기쁘다며 태권도에 대한 이론과 실기를 함께 배울 수 있는 수련의 장이자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연마의 장인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가 대한민국의 얼과 태권도 정신이 깃들어 있는 태권도원을 통해 더 크게 발전하기 바란다고 전했다. 지난 4일 무주에 들어와 등록을 마친 참가자들은 5일 개막식 후에는 6일까지 품새와 겨루기, 태권체조, 호신술, 시범 등 분야별 세미나에 참석했으며 7일과 8일에는 무주군을 비롯한 전라북도 일원의 주요 관광 명소들을 둘러보고 품새와 겨루기, 익스트림 경연대회에 참가한다.한편 지난 5일과 6일 무주국민체육센터에서 열렸던 제6회 태권도원 배 전국 태권도대회는 우수한 국내 선수들을 발굴하고 세계 태권도인들에게 태권도 종주국의 훌륭한 기량을 보여준 좋은 기회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성원

  • 태권도
  • 이성원
  • 2014.07.07 23:02

태권도 첫 '태그매치' 열린다

태권도에서도 레슬링처럼 여러 선수가 팀을 짜서 상대와 번갈아가며 겨루는 태그매치 경기가 열린다. 전국에서 처음 시도되는 종목으로 태권도의 흥미를 한껏 높여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우석대학교는 오는 18일부터 시작되는 제12회 우석대총장기 전국태권도대회 겨루기를 5인조 단체전 경기로 치른다고 밝혔다. 우석대학교와 대한태권도협회가 주최하고 우석대 태권도학과가 주관하는 이번 대회는 품새(18~20일)와 겨루기(26~27일)로 나눠 우석대 실내체육관에서 열리며, 전북일보사와 전라북도, 전주시, 완주군, 무주군, 전라북도체육회, 전라북도태권도협회 등이 후원한다.5인조 경기는 정선수 5명과 후보 1명 등 6명이 한 팀을 이루며(5명 선수로도 출전 가능) 전반전은 체중이 낮은 순서로 5명이 각 1분씩 경기를 치르며, 후반전에는 3회 이상 공격후 체급에 관계없이 무제한 수시교대가 가능하다. 대전순위의 선수중 경기중 부상으로 출전할 수 없을 경우에는 패배하며, 경기중 한명의 선수라도 KO패하면 그 팀이 진다. 또 총점수 50점을 먼저 득점하거나 30점차 이상 벌일 경우, 또는 상대방의 누적감점이 10점이 넘으면 승리하게 된다. 전후반 동안에 승부를 가리지 못할 경우에는 양팀의 대표가 한 명씩 나와서 2분 단회전 개인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연장전(서든데스)을 치른다. 경기에 출전하는 5명 선수의 체중에도 제한이 있는데, 중등 남자부는 5명의 체중이 362㎏, 중등 여자부는 331㎏, 고등 남자부는 424㎏, 고등 여자부는 359㎏이내여야 한다. 우석대 최상진 태권도학과장은 5인조 경기는 선수 선발에서부터 경기 운영까지 치밀하고 정교한 작전이 필요하다며 한층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는 경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이에 앞서 18일부터 열리는 품새 대회는 개인전과 단체전, 페어전, 태권체조 등으로 나뉘어 개최된다.

  • 태권도
  • 이성원
  • 2014.07.04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⑤전북 태권도를 일군 사람들

전북의 태권도가 지역을 넘어 우리나라 태권도의 발전을 이끌게 된 것은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열성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특히 전북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보인 지도관은 때로는 타 관들의 불만과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도내 5개관이 협회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하는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전북태권도협회를 이끈 사람들전북태권도협회는 1963년 회장 전일섭, 부회장 김혁래설명희, 전무 이병무 체제로 시작했다. 제3대에는 기업인 김재욱씨, 4대는 권용수씨가 회장을 지냈으며, 이때 전일섭오용균설명희 관장이 부회장, 유병룡 사범이 전무를 맡았다. 5대에는 다시 태권도인인 전일섭 관장이 회장을 맡았고 유병룡 사범은 이때까지 20년 가까이 전무이사를 거의 독차지하면서 후진 양성에 많은 힘을 쏟았다. 6대 회장은 기업인인 이진수씨가, 7대 회장은 태권도인 오용균 관장이 맡았으며, 이때 전무이사는 허용 관장이었다. 8대에는 기업인 진홍철씨가 관장, 윤진일 관장이 전무이사를 맡았고, 9대에는 강상원 전주시장이 회장을 맡았으며 이때 수석부회장은 문창균 사범, 전무이사는 장한철 사범이었다. 이후 14대까지 최용복, 강상원, 육종진, 조명근, 이상칠 등 전주시장들이 회장을 맡았으며, 91년에는 기업인 이건수씨가 협회장에 올랐다. 93년에는 다시 태권도인 유기대 사범이 회장을 맡았으며, 이때 전무이사는 강영수, 강동하 사범다. 99년 전북태권도협회가 관리단체로 지정되면서 기업인인 김광호씨가 17대와 18대 회장을 맡았으며, 이때 전무이사로는 김정헌, 강영수, 고봉수씨가 활동했다.2009년 19대와 2013년 20대는 유형환 현 회장이 맡고 있으며, 전무이사는 고봉수씨이다. 유형환 회장은 줄포고 교사로 근무했으며, 77년에 전북체육고에 태권도팀이 창단된 이후 79년부터 체육중고 감독을 맡아 학생들을 지도하다가 퇴직했다.△지도관1954년 시작된 지도관 전북본관은 초기부터 전일섭 관장을 맡고, 유병룡 전임사범 체제를 유지해왔다. 80년에는 문창균, 93년에는 유기대, 98년에는 이영기 사범(완산중고 지도자), 2003년에는 장수의 임재봉 관장, 2006년에는 장한철 관장이 맡았으며, 2012년부터 황영택 관장이 맡고 있다. 2003년부터 지우회장 제도가 생겨 임재봉 관장 때는 최동열 도협회 상임부회장(64)이, 장한철 관장 때는 강영수 현 도의원이 지우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김찬경 관장(67)이 지우회장을 맡고 있다.지도관은 초기에 각 지역에 사범을 뒀는데, 익산에는 장연준 사범, 정읍에는 장남용, 신재섭 사범, 남원에 박인수 사범, 김제 노영현, 원용현, 노병인 사범 등이었다. 후에는 전주 이병하 사범, 군산 최동렬 사범, 만경 박재석 사범 등이 활동했다.군산지역에서는 전일섭 관장이 전주로 떠난 뒤 김혁래 사범이 계속해서 체육관을 운영하다가 뒤에 임인수 사범, 김혁종 사범 등이 이어받아 후진양성에 힘썼다.장수의 임재봉 관장은 애초에 산서에서 도장을 운영하다가 부인의 고향인 장수읍으로 옮겨 평생 동안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2013년에 타계했다. 사진에 대한 조예가 깊고 취미가 많아 많은 자료를 남겼다. 현재는 아들이 도장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창무관개성출신의 피난민인 설명희 사범(고인)이 1950년 3월에 개설했으며, 초대 관장은 김삼만(삼남극장 사장), 2대 관장은 박성문 헌병대령이 맡았다. 3대는 설명희 관장이 수석사범을 하면서 겸임했고, 윤석구 사범이 전임 사범을 맡았다. 60년대초부터 70년까지 고창(박동근), 금마(이완승), 여산(오학수), 부안(임동진), 신태인(윤석구), 줄포(김재표), 함열(조현호), 흥덕신림(안길영, 고석원), 이리 송학동(김정환, 이성진), 이리지관(이보인, 윤석구) 등 각 지역에 지관을 두고 사범을 파견했다. 4대 전북본관장은 78년 윤석구 관장이 취임했으며 부관장은 임동진, 송충남, 박홍기, 김종성 관장 등이 맡았다.2000년에는 박종윤씨가 5대 본관장으로 취임했고, 2001년 4월에는 윤석구 관장이 6대 본관장에 올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청도관병무청에 근무하는 현역 중사 박청금이 1950년 병무청 동편 창고(현 테니스 코트)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2대 관장은 35사단 현역 대위인 김천태, 3대는 우제림 관장이었으며, 우재림 관장은 후에 익산 오도관으로 옮겨 허용 관장과 함께 했다.4대 본관장은 이병무 관장이 맡았으며 최홍희 장군이 말레이시아 대사로 발령된 뒤 이병무 관장을 초청함으로써 공석이 된 5대는 정역택 사범이 관장으로 임명됐다. 6대는 인경환 관장이 맡았고, 7대는 무주정읍경찰서 사범과 전주상무관 사범, 풍남체육관장을 지낸 정금수 관장이 활동으며, 이어 8대에는 아중리상무체육관장을 맡고 있는 전정술 관장, 9대에는 부안상무체육관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창석 관장이 맡고 있다.4대 이병무 관장 당시에 각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했으며, 그 지역은 남원 박종수, 김제 박규산, 정읍 서완득, 순창 서정운, 임실 송완섭, 군산 홍한수(오도관에서 전관), 부안 인경환, 고창 김시곤, 무주 정금수, 진안 정삼진 사범 등이었다.△오도관현역 대위인 우종림 관장이 전주에서 오도관을 열었으며, 초창기 사범은 홍한수씨였다. 홍사범은 뒤에 경찰에 투신하면서 청도관으로 전관, 청도관 군산사범을 맡게 됐다. 이후 송용호 관장이 맡았으며 그 뒤 김복남 관장이 맡아오다가 70년대 중반에 한정수 관장이 지금의 코아백화점 뒷편 전주주물공장 자리에서 명맥을 이었다. 그 뒤 정선진, 김동진(현 전북도태권도협회 부회장) 관장에 이어 2013년말부터 강주현 관장(팔복체육관)이 맡고 있다. 오도관은 전주보다는 군산이 빨랐는데, 홍한수-문한종-문승연 사범 등으로 이어졌다. 익산지역은 59년 우재림 사범이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많은 유단자를 배출했고, 곧이어 허용 관장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크게 번성했다. 허용 관장은 또 77년에 중앙 본관장을 맡기도 했다. △무덕관무덕관은 철도공무원인 오용균 관장에 의해 익산에서 문을 열었으며, 초창기에는 김수길(사범학교 출신 교장으로 정년퇴직). 최낙환(전 익산진안 교육장), 임순호, 이승수(전북공대 졸), 김응길(총경 퇴직) 사범 등이 오 관장을 도와 가르쳤다. 63년에 이리역 앞에 태권도전용 체육관이 생기면서 정식으로 월급을 주는 사범을 둘 수 있었으며 정철우(미국, 프로태권도 창시자), 이경환, 김부길(철도청 직원) 사범 등이 있었다.60년대부터는 각 지역에 지관을 두었는데, 정읍은 조규수사범, 고산은 김정수 사범, 신태인은 박효준 사범, 대야는 박장규 사범, 익산 정의도장은 이상인 사범 등이 맡았다. 70년대 후반에 세력이 커지기도 했으나 현재는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이다. 오용균 관장이 계속 도 본관장을 맡아오다가 95년께부터 윤진일 관장(73)이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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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7.02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④전북을 빛낸 선수들

60년대 학교 체육으로 퍼지기 시작 최권열 5년양동철 등 3년 연속 우승 조현호 4번조점선 최동진 등 3번'金' 70년대 우수 선수지도자 역외유출 90년대 중반부터 여자부도 금메달 2000년대에도 유망주 꾸준히 나와1963년 전주에서 열린 전국체전부터 태권도가 전국체전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태권도가 도장 중심에서 점차 학교체육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물론 초기에는 학교에 전문적인 지도를 두고 가르친 것은 아니며, 체육관의 지도사범이 관원들 중에서 자의적으로 학교별 팀을 만들어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또 일부학교에서는 태권도에 관심있는 교사들의 주도로 체육관의 사범들이 학교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특히 김제 만경고는 1966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학교체육 정규시간에 태권도를 가르쳐 많은 훌륭한 선수들을 배출하게 됐다.전국체전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적을 남긴 사람은 전국체전 5년 연속 금메달리스트인 최권열(68)이다.최권열은 만경 출신으로 지도관에서 운동을 했는데, 65년 광주에서 열린 46회 대회에 고교생으로 출전해 라이트급 우승을 차지한데 이어 66년년부터 69년까지는 미들급 우승을 차지했다. 이러한 동일체급 연속 우승은 전국체전 역사에서도 극히 찾아보기 힘든 경우로, 최권열은 69년에 전북도체육회가 선정한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전일섭 관장의 전북종합체육관 1기생들인 문창균, 조점선, 최동진 등도 전국체전을 빛냈다. 옆차기가 주특기인 문창균은 63년 전주에서 열린 44회 대회에서 전북대팀의 우승을 이끈데 이어 이듬해 45회 인천체전에서 라이트급 우승에 올랐다. 또 양발차기의 달인 조점선은 전주체전 일반부에서 금메달을 따낸데 이어 45회 인천체전과 46회 광주체전에서 미들급 금메달을 추가했다. 미들급인데도 마치 플라이급처럼 날렵했다는게 조점선에 대한 문창균 원로의 회고이다. 경찰에 투신해 30대때까지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최동진은 44회 전국체전에서 전북대 우승에 이어 45회 인천체전과 46회 광주체전, 48회 서울체전에 플라이급으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47회 체전에서는 플라이급 3위를 했다.63년 전주 체전에서 고산중팀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유형환은 전주공고에 진학한 뒤 46회와 47회 체전에서 고등부 밴텀급으로 우승했으며, 48회와 49회 체전에서는 일반부로 출전해 동메달과 은메달을 추가했다.유형환과 함께 고산중 팀으로 전국체전 금메달리스트인 이형노는 고등부로 출전한 48회와 일반부로 출전한 49회, 50회 체전에서 페더급 금메달을 추가했다.비교적 늦은 나이에 운동을 시작한 장수 출신 미들급 임재봉은 46회 체전 은메달에 이어 48회 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냈다.익산 창무관 출신의 조현호(70)는 44회 전주체전 일반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데 이어 45회와 47회, 49회 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48회 체전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양동철은 68년 서울에서 열린 49회 대회에서 고기부 밴텀금 금메달을 따낸데 이어 50회와 51회 대회에서 플라이급 금메달을 추가했다.무덕관 출신의 안영빈은 50회와 52회 대회에서 페더급 금메달을 따냈고, 김제농고를 졸업한 라종열은 51회 대회 라이트급 은메달에 이어 52회와 56회 대회에서 라이트급 금메달을 따냈다.69년 11월 24일자 경향신문은 69년도 태권도 우수선수 16명을 선발한 기사를 싣고 있는데, 그 이름 중에는 양동철과 이형노, 손주몽 등 전북출신이 포함돼 있다. 손주몽은 73년 부산에서 열린 54회 전국체전 고기부 플라이급 우승자이다. 헤비급 서동현은 71년과 72년(52~53회)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낸데 이어 이듬해에는 동메달을 추가했다.70년대 중반 들어서는 우리지역 우수 선수와 지도자의 역외유출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75년 대구에서 열린 56회 전국체전에서 선수 빼돌리기 사건이 발생했다. 일반 중기부 페더급 결승에 진출한 전영인이 결승전을 앞두고 갑자기 잠적해 기권패했는데, 이는 전영인이 소속된 인천체전(인천체육전문대)의 학장이 전영인의 출전을 막았기 때문이었다(당시 전북은 종합 3위를 놓고 경기도와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인천체전이 경기도에 소재하고 있었다). 도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사회문제화되자 백인엽 인천체전 이사장이 전주로 찾아와 사과하고 학장의 사표를 받기에 이르렀지만, 전국체전에서 지역간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신재근은 78년 인천에서 열린 59회 체전에서 고등부 페더급 은메달을 따내더니 60회와 61회 대회에서는 미들급에서 금메달을 추가했다. 82년 경남에서 열린 63회 대회에서는 일반부 페더급에 출전한 고봉수(현 전북태권도협회 전무이사)만이 유일하게 금메달을 따냈으며, 고봉수는 이듬해 인천체전에서 라이트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했다. 63회와 64회 고등부에서 은메달을 따냈던 최상진은 69회 웰터급에서 금메달, 72회 대학부에서 은메달, 73회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냈다.권기문은 83년 인천에서 열린 64회 대회 대학부 밴텀급 금메달과 67회 대회 페더급 은메달, 69회 대회 밴텀금 은메달을 따냈으며, 김종석(원광대)은 64회와 66회, 68회 대회 금메달과 67회 대회 은메달을 따냈다.64회와 66회 대회에서 고등부 동메달을 딴 함준은 69회와 73회 대회 은메달, 75회 대회 동메달, 76회 대회 금메달을 추가했다.윤철은 69회 대회 금메달, 71회 대회 은메달, 72회 대회 동메달을 땄고, 70회 대회 고등부 페더급에서 동메달을 딴 정을진은 91년 전북에서 열린 72회 체전에서 대학부 페더급 금메달과 74회 대회 금메달, 75회 대회 은메달, 77회 대회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90년대 중반부터는 여자부 태권도에서도 메달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보인(경희대)은 95년 경북에서 열린 75회 대회에서 여자일반부 핀급 금메달, 77회 대회에서 플라이급 금메달을 따냈다. 이지은(경희대)은 78회와 79회 여자 일반부 밴텀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국현진(고창여고)은 79회 여고부 밴텀급과 80회 여고부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2000년대 들어서도 유망주들이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이승용은 전북체고 학생때인 2001년 82회 대회에서 남고부 플라이급 우승을 차지한 뒤 경희대에 진학해 85회 체전에서 밴텀금, 그리고 89회 대회에서는 육군체육부대 소속으로 라이트급으로 우승을 차지했다.또 전북체고의 박민우는 84회와 85회 체전에서 미들급 우승을 차지했고, 김진경(전북체고)은 84회와 86회 대회에서 여자부 미들급 우승을 품에 안았다. 또 류근무는 84회와 85회 남자일반부 헤비급 우승에 올랐고, 이리고생인 김배훈은 88회 대회에서 페더급 우승에 이어 경희대에 진학한 뒤 90회와 92회 대회 남자대학부 우승을 차지했다. 완산여고 장희영은 92, 93회 우승을 차지했고, 신동윤은 전북체고 학생으로 92, 93, 94회 전국체전 3관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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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6.25 23:02

무주 태권도원 '첫번째 국제행사'

세계 태권도인의 축제인 제8회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가 올해 문을 연 태권도인들의 성지인 무주 태권도원의 첫번째 국제행사로 기록된다.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 조직위는 다음달 49일 무주 태권도원에서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를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전북도무주군대한태권도협회태권도진흥재단이 주최하고, 세계태권도문화엑스포 조직위와 전북태권도협회가 주관하는 이번 엑스포에는 세계 24개국 태권도인 900여 명이 참가해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겨룰 예정이다. 태권도원에는 4600석 규모의 태권도 전용 T1경기장과 실내공연장, 1000여명이 숙박할 수 있는 태권도 연수원, 수련연수원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특히 엑스포에서는 태권도원 안의 모든 시설을 이용해 태권도 시합과 태권도 공연, 학술세미나, 경연대회 등 각종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조직위는 엑스포의 성공을 위해 오는 30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무주 반딧불청소년수련원에서 자원봉사자 교육을 실시한다.박병익 조직위 사무처장은 제8회 태권도문화엑스포를 무주 태권도원의 첫번째 국제행사로 치르게 돼 기쁘다며 엑스포가 무주를 태권도 메카로 정착시키는 초석이 되고, 세계 태권도인의 축제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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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우
  • 2014.06.20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③전북을 빛낸 선수들

우리지역에서는 태권도의 겨루기(대타)를 중시함에 따라 일찍부터 여러 가지 종류의 대회가 많았다.특히 지도관에서는 전주와 군산 지역간 교환경기가 활발했다. 김혁래 관장도 직접 대회에 참가했으며, 김 관장은 팔 전체 부위를 단련한 방어 기술이 뛰어나 상대가 공격을 하다가 지칠 정도였다고 한다. 1956년에는 서울 창경원에서 서울과 전북팀이 겨루기를 했는데, 전북팀은 전주역에서 밤 10시에 기차를 타고 10시간 걸려서 서울에 도착한 뒤 경기를 치르고 당일에 내려오는 스케줄이었다. 이처럼 피곤한 상황에서도 전북팀은 오히려 서울팀보다도 우수해 이 대회를 통해 김혁래, 장점동, 최동진, 이승완 등이 중앙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장점동의 주특기는 점프하여 양발차기로 요즘 프로스포츠 K1에서 일부 선수가 사용할 정도의 고난도 기술이었으며 투지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최동진은 작은 체구지만 힘과 펀치력에서는 매우 파괴력이 있었고 겨루기 기술도 다양했다고 전해진다. 전주상고와 전북대를 졸업하고 해병대에서 선수생활을 했으며, 안기부 감찰실에 근무했다. 전주고 주장 출신 이승완은 1962년 전북인 최초로 4단을 받았으며, 전북종합체육관 사범을 맡아 63년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체전에서 전주고가 우승하는데 기여했다.1961년 5월에는 전주공설운동장에서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한일 격투기 경기가 열렸으며, 이는 뒷날 한일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대회에는 한일 양쪽에서 20명씩 참가했는데, 겨루기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연무시범도 있었다. 이때 문창균은 여러 사람을 나란히 엎드리게 하고 그 위로 뛰어넘어 옆차기 시범을 보여줬는데, 일본인들이 이를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문창균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전주상고 3학년때부터 도장에 나갔으며 전북대 법대 58학번이다.이 당시 우리지역의 태권도는 전북을 단일팀으로 하고 전북을 제외한 우리나라 전체를 상대팀으로 하더라도 결코 밀리지 않을 만큼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는 63년과 66년에 일본에서 열린 한일전에 파견하는 우리나라 대표선수 선발 결과만을 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63년에는 일본 동경에서 열린 일본권법회와의 한일전에 참가할 한국 대표팀 10명을 처음으로 뽑았는데, 주장인 이승완(전 국기원 원장)과 이문성, 황대진, 최영렬, 안대섭, 조점선 등 전북출신이 6명을 차지하고 있다. 이중 이문성과 황대진은 대표선수로 선발되긴 했지만 병역문제로 인해 실제로 일본땅을 밟지는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병역을 필하지 않은 남성이 해외에 나가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당시의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전해지는데, 자신의 아들이 일본에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황대진 선수의 아버지가 부랴부랴 서울에 찾아왔다. 이승완 주장 등과 함께 다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처음으로 커피를 마시게 됐다. 한 사발을 쭉 들이킨 황대진 선수의 아버지는 다방 종업원을 부르더니 이봐, 여기 서너 사발씩 더 갖다드려하고 말했다고 한다. 시골에서 마시던 막걸리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66년 제2차 국가대표 선발전은 지금의 선발전처럼 엄격한 체계를 갖춰 진행됐다. 국가대표 1, 2차 선발전을 통과한 선수와 그해 최우수 선발전 우승자가 최종전에서 맞붙어 각 체급별 대표를 선발했다. 모두 14명의 대표를 뽑았는데, 박동근, 최동진, 박연희, 유기대, 유형환, 최동진 등 6명이 전북출신이었다. 박연희는 이 경기에서 일명 따발총으로 불리는 화려한 앞차기 기술로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여 곧바로 일본 코치로 초청을 받았다. 동아일보 66년 12월 28일자 4면에는 한국 원정팀이 일본 관서대팀을 7-5로 이겼다는 소식과 함께 이긴 선수들의 이름이 올라있는데, 이들 7명중 4명이 전북 출신이다(박동근, 박연희, 안대섭, 유형환).이에앞서 1964년에는 전일섭 관장과 유병룡 사범의 제자인 최영렬(전 경희대 학장), 유기대(전 전북태권도협회 회장) 등이 경희대에 진학하여 당시 우리나라 체육의 산실인 한국체육관 태권도부에서 운동했다. 또 66년에는 유형환과 최권열 등이 경희대에 진학하여 선배들과 합류하면서 경희대가 대통령기 단체전에서 3연패라는 금자탑을 쌓게 됐다.김제 만경중학교 출신의 최영렬은 고등학교때 태권도에 입문했으나 열심히 노력해서 빠른 성장을 보였다. 1965년에는 전국체전 스타플레이어로 중앙일보에 소개됐고, 66년부터 70년까지는 대통령배 전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그는 또 1983년에 최초로 경희대학교에 태권도학과를 개설하여 학과장을 맡게 되는 등 후진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오늘날 경희대 태권도의 명성은 이처럼 전북출신들이 그 길을 트고 기반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최권열은 김제 진봉 출신으로 키 183㎝의 장신이었다. 긴 다리를 이용해 발바닥과 뒤꿈치로 상대의 가슴 부위를 주로 공격하는 무적의 선수였으며, 서울에서 교장으로 퇴임했다. 경희대 출신의 유기대, 유형환, 최권열, 최동진 등은 그 뒤 해병대에 입대해 대통령배 대회 5연패의 신화를 이루었으며, 이때 해병대의 초대 코치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전북인 이승완이었다.이처럼 초창기 전북출신 선수들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됨에 따라 후배들인 이상철, 이형노, 양동철, 박연환(박연희의 동생) 등이 서울 소재 우석대(현 고려대)에 진학해 막강 전북태권도의 전통을 빛내게 되었다.이 같은 선배들의 화려한 전통은 그 뒤에도 면면히 이어져 태권도가 시범경기로 치러졌던 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임실 오수 출신 김종석이 헤비급에서 은메달을, 94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12회 아시안게임에서는 진승태(플라이급. 한국체대)와 정광채(웰터급, 한국체대)가 각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98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13회 아시안게임에서는 남자 72kg급의 김병욱과 67kg급의 감남원, 여자 59kg급의 이지은이 각각 금메달을 따냈다. 김종석은 87년 전국체전 미들급에서 금메달을 획득, 전북체육회가 선정한 우수선수에 뽑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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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6.18 23:02

[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 ② 스포츠화 시작

전북의 태권도 역사는 우리나라의 태권도 역사이다. 오늘날과 같은 스포츠화 된 태권도가 전북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기 때문이다. 전북에서 개발된 태권도 기술이 곧 우리나라의 기술이 됐고, 전북에서 적용된 경기규칙이 우리나라 경기규칙의 한 부분이 됐다.전북의 태권도가 경기화(스포츠화)를 선도하게 된 것은 전일섭 관장이 이끄는 지도관이 전주에 자리를 잡은 뒤 다양한 종류의 대회가 자주 열렸기 때문이다. 한일 교류전 등은 물론 지역내 대회도 적지 않았다. 특히 전주와 군산지역 지도관끼리의 겨루기는 지역의 자존심을 건 치열한 양상을 띠었고,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전주-군산-익산 간 대회로 발전했다. 군산시태권도협회 김혁종 고문은 군산과 전주의 시합이 있을 때면 일주일 전부터 잠을 못 잤다. 전주에서 대회가 열릴 때 전주가 이기면 뒤탈이 없는데, 군산이 이기기라도 하면 버스터미널까지 쫓아 와서 버스를 못 타게 하고 텃세를 부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추억거리다고 회고했다.체육관별로도 연 2~3차례씩 대회가 열렸으며, 그해의 왕중왕을 뽑는 대회도 있었다. 지도관의 경우에는 전주 본관에서 분관이 분리돼 나가면서 도장별 경쟁의식을 부추기기도 했다(전북뿐만 아니라 서울, 강원, 부산 등의 지도관에서도 운동을 심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운동했던 곳은 전북이며, 지도관은 전북에서 꽃을 피웠다).전북의 태권도 겨루기는 다른 지역과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의 태권도에서는 실전 타격이 금지돼 있었다. 때리는 시늉만하고 주먹이나 발이 상대의 몸에 닿기 직전에 멈추는 것(유형환 도태권도협회 회장은 이를 끊어치기라고 표현했다)이 일반적인 겨루기 방식이었다. 그러나 우리지역에서는 실제 타격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겨루기가 일반적이었으며, 누적된 타격보다는 단 한방으로 상대를 이길수록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생체연구를 바탕으로 한 일발필살기가 개발되기 시작됐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강도 높은 단련이 뒤따랐다. 유단자와 수련생이 마주보고 횡렬로 서서 상대방을 계속해서 바꿔가면서 하는 겨루기도 하나의 훈련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문창균 원로는 당시에는 상대를 바꿔가면서 훈련하는데 하루에 한명씩 KO시켜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렇지 않으면 운동을 한 것 같지 않았다고 회고했다.전북태권도협회 황영택 고문은 박연희 선수는 양쪽에 철봉으로 기둥을 만들고 가운데를 스프링으로 연결한 기구를 만들어서 수도를 단련했다. 스프링의 강력한 탄력을 이용한 훈련이었는데, 나중에 TBC 방송에 출연해서 차돌을 깨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같은 선수가 나오게 된 것은 우리지역의 태권도가 그 만큼 적극적인 운동이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겨루기 대회가 계속되면서 발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발을 이용한 공격의 파괴력이 주먹에 비해 4배가량이나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점선의 돌려차기, 박연희의 양발 앞차기(일명 따발총 공격), 유형환의 앞차기 등이 이때 나왔다.당시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의 발기술은 옆차기와 뛰어차기 수준이었다. 그러나 전북의 기술은 이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상대가 옆차기로 공격하면 돌려차기와 뒤차기로 허를 찔렀다. 또 상대가 뛰어차기를 하면 메치기 기술로 발을 걸어서 쓰러뜨렸다(당시에는 이런 기술이 허용됐고 점수도 부여됐으나 다른 지역선수들은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상대방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내팽겨쳐지기 일쑤였으며, 기가 질려서 더 이상 경기를 계속할 의욕을 잃곤 했다는 게 유형환 회장의 회고다.겨루기 대회를 하다보면 일정한 규칙과 제한이 필요하고, 약속된 용어의 사용이 불가피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오고 상호간의 불신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전북의 태권도인들은 일찍부터 수신호와 용어 등을 만들어서 사용했고, 이는 초기 우리나라 태권도 경기규칙의 일부가 됐다.1961년 대한태권도협회가 창설되고 1963년 대한체육회 가맹단체로 가입하면서 그해 10월 전주에서 열린 제44회 전국체전에서 태권도가 처음으로 공식경기로 치러졌다. 이에 앞서 62년 대구 체전에서는 전북과 대구 선수들이 시범경기로 태권도를 겨뤘으며, 이때의 경기규칙 등은 전북의 것을 참고하고 반영했다. 전국체전 정식종목화를 전북이 주도했고, 전북에서 사용하던 수신호와 용어 등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전국체전은 또한 호구의 개발을 촉진했다. 사실 호구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다. 워낙 격렬하고 과격한 운동이다 보니 그만큼 부상 등 불상사의 위험이 높았다. 처음 사용된 호구는 일본에서 검도용이었다(유병룡 원로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한일친선경기를 위해 일본에 갔다가 가져왔다고 증언했고, 문창균 원로는 59년에 일본팀이 가져왔다고 기억하고 있다) 태권도에는 잘 맞지 않았다. 검도 호구를 차면 움직임이 둔하여 태권도의 빠른 동작을 할 수 없었다. 또 검도 호구는 칼날을 막기 위한 것으로 너무 단단하게 만들어져 자칫하면 손이나 발가락이 부서지기도 했다.그래서 태권도에 알맞은 호구의 개발이 필요했는데, 많은 고민과 연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대나무 호구였다. 전일섭 관장과 유병용 사범 등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전일섭 관장의 부인이 바느질을 했다. 신문지로 본을 떠서 입어보고 만들었는데 애초에는 뒷부분이 없이 옆구리까지만 가렸다. 대나무를 쪼개서 세로로 배열하고 솜으로 감싼 뒤 베를 대고 누볐다. 이처럼 만들어진 호구는 대한태권도협회의 승인을 받아 62년 대구체전 시범경기 때 처음으로 사용된 뒤, 63년 전주체전부터 본격적으로 활용됐다.애초에는 위-아래 2단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위험성을 깨닫게 됐다. 대나무가 부러지면서 헝겊을 뚫고 삐져나와 손을 다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2단 호구는 중간에 접혀지는 곳이 명치 부근이어서 자칫하면 장기가 다치는 등 큰 불상사의 위험도 있었다. 따라서 나중에는 2단의 호구를 3단으로 개조했고, 그러다보니 활동성도 훨씬 좋아졌다. 호구에는 페인트로 색깔을 칠했는데, 홈팀은 청색, 원정팀은 빨강색이었다. 전북도태권도협회는 우리나라 호구를 처음 개발한 지역답게 전자호구 도입도 빠르다. 2009년 전자호구가 국제대회에 처음 등장하자 지역에서는 드물게 곧바로 이를 마련해 이듬해부터 사용하고 있다.이처럼 전북의 태권도는 우리나라 초창기 스포츠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그 중심에는 전일섭 관장이 있었다. 김혁래 관장이 군산지역 태권도의 대부라고 한다면, 전일섭 관장은 전북도를 넘어 초창기 우리나라 태권도를 이끈 대부라고 할 수 있다.

  • 태권도
  • 이성원
  • 2014.06.11 23:02

전북대표 꿈 향한 '불꽃 발차기'

제34회 전라북도교육감배 태권도대회 및 제95회 전국체전 전북 대표선수 선발 예선대회가 선수 및 가족 등 7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지난 6일과 7일 순창군민체육관에서 열렸다.겨루기 및 품새 부문으로 나눠 열린 이번 대회의 각 부별 1, 2, 3위에게는 상장과 메달이 수여되며, 고등부 및 대학부 각 체급별 겨루기 1, 2위 입상자에게는 제95회전국체전 전북 대표선수 선발 최종선발전 출전 자격이 부여된다.각 부문 1위 입상자는 다음과 같다.◇겨루기 남자 초등△저학년부= 핀급 정영훈(설천초), 페더급 황준혁(군산용문초), 라이트급 박원우(삼례초), 웰터급 박민준(김제중앙초) △중학년부=핀급 변은석(군산동초), 플라이급 김태연(군산미성초), 밴텀급 윤준혁(〃), 페더급 김다선(삼례초), 라이트급 신강민(군산푸른솔초), 웰터급 양찬우(전주남초), 미들급 박주원(김제검산초), 헤비급 김민재(삼례초) △고학년부=핀급 유희서(삼례초), 플라이급 정우진(군산동초), 밴텀급 이승환(봉동초), 페더급 왕도현(군산나운초), 라이트급 김훈민(〃), L-웰터급 김찬희(전주남초), 웰터급 김준구(전주초), L-미들급 이민수(전주남초), 미들급 배성국(〃), L-헤비급 성복규(삼례초), 헤비급 손태환(전주남초)◇겨루기 여자 초등△중학년부=밴텀급 노솔이(삼례초), 라이트급 이지원(군산푸른솔초), 웰터급 안효빈(무주안성초), 헤비급 양서희(삼례초) △고학년부=밴텀급 박소정(전주초), 라이트급 유명랑(전주남초), L-웰터급 엄다은(전주우림), L-미들급 박성글(〃), L-헤비급 박유미(전주남초)◇겨루기 남자 중등=핀급 이찬현(전주양지중), 플라이급 박진범(남원한빛중), 밴텀급 조진현(삼례중), 페더급 이형민(전주기린중), 라이트급 이현남(전주양지중), L-웰터급 유청명(〃), 웰터급 송주찬(삼례중), L-미들급 박효민(군산동원중), 미들급 홍승우(전주양지중), L-헤비급 정원호(남원한빛중), 헤비급 하관용(전주양지중)◇겨루기 여자 중등=핀급 강예빈(정읍학산중), 플라이급 김세연(익산부천중), 페더급 김도연(완산중), 라이트급 김태희(〃), L-웰터급 황태희(〃), 웰터급 신희정(〃), L-미들급 오하은(전주기린중), 헤비급 이주희(완산중)◇겨루기 남고부=핀급 소준성(전북체고), 플라이급 우도규(〃), 밴텀급 신재훈(전주영생고), 페더급 강현석(삼례공고), 라이트급 차준규(이리고), 웰터급 유재민(전북체고), 미들급 서광원(〃), 헤비급 이선기(전주영생고)◇겨루기 여고부=핀급 문미래(완산여고), 플라이급 차인경(〃), 밴텀급 천재이(〃), 라이트급 문수빈(〃), 웰터급 김애선(〃), 미들급 김현지(전북체고)◇겨루기 남대부=핀급 김민규(전주대), 플라이급 동지훈(〃), 밴텀급 김범수(우석대), 페더급 이현수(〃), 라이트급 신진혁(〃), 웰터급 김혁인(전주대), 미들급 김무성(우석대), 헤비급 방인찬(전주대)◇겨루기 여대부=핀급 이주영(우석대), 플라이급 강나영(전주대), 밴텀급 왕남지(〃), 페더급 박영지(우석대), ◇라이트급 박미진(우석대), 웰터급 김주하(〃), 미들급 송미성(〃), 헤비급 유아란(〃)◇개인품새 △남초= 저학년 이동주(송천초), 중학년 정윤성(이리동산초), 고학년 김원빈(김제중앙초) △여초= 저학년 고이은(김제검산초), 중학년 이서하(이리동산초), 고학년 정영주(이리동산초) △남중=김동관(설천중) △여중= 최영원(원광여중) △남고=선우정(고창북고) △여고=김인선(학산고) △남자성인1부=김지용(고창희망미래태권도) △여자장년1부=김연화(국민체육관) △남자 장년6부=오영복(국민체육관)

  • 태권도
  • 이성원
  • 2014.06.09 23:02

[창간 64주년][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 속의 태권도원] 1부 태권도 종주도 전북 ① 전북 태권도의 시작 - 1950년대 초 군산체육관서 시작…전주 지도관서 꽃 피워

올해는 무주 태권도원이 문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전북일보는 전북 태권도가 발전해온 역사와 전북 출신 사범들의 해외에서의 활약, 그리고 태권도원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준비했다.도장 중심으로 수련하는 태권도는 1940년대 말에서 50년대 초 사이에 시작됐다. 서울에서 먼저 문을 연 무도관들이 전북에 도장을 낸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전에 태권도가 어떤 식으로 존재했었는지는 자료로 입증하기 어렵다. 일제 치하 36년 동안 무술단련은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술은 곧바로 독립운동의 전투력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를 엄격히 금지했다.지도관은 1950년 초에 군산을 통해 들어왔다(서울인천과 같은 해인 1947년에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다). 군산이 도내에서 도장 중심 태권도 수련이 가장 이른 것은 사실인 듯하다. 서울에서 운동을 하던 군산 출신 김혁래 사범이 전일섭 사범(황해도 출생)과 함께 군산시 장미동 군산체육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관원을 모아 운동을 시작했다. 전일섭 사범이 치안 담당으로 군산 세관에 발령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전일섭 사범은 윤쾌병 박사와 함께 중앙 지도관을 만든 전상섭씨(후에 월북)의 친동생이며, 김혁래 사범의 선배다. 초기에는 전일섭 사범, 김혁래 주장으로 불렸다.군산체육관 건물은 원래 포목점을 하던 가게로, 2층 건물이었다. 1층에서는 역도를 했고, 2층에서는 태권도와 권투, 유도를 했다. 초기 관원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호구지책으로는 힘겨운 형편이었다. 그래도 태권도에 대한 애정 하나로 무도관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군산체육관에서는 당시 겨루기를 많이 하면서 격파, 품새(형)를 가르쳤다. 운동 선후배의 관계가 엄격해서 나이가 어리더라도 운동을 먼저 시작한 사람을 대접했다고 한다.김혁래 사범은 태권도의 세계화에 대한 공로자이기도 하다. 전일섭 사범이 전주로 떠난 1950년대 중후반(또는 1952년)부터 군산 미공군기지에서 미군들을 대상으로 15년여 동안 태권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김혁래 사범은 젊은 나이(40대 중후반 또는 50대 초반)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미군부대 출근을 준비하며 찬물로 세수하다가 발생한 일이었다. 그 뒤 체육관과 미군부대 교육은 동생인 김혁종 관장(73현 군산시태권도협회 고문)이 이어받았다. 김혁종 고문은 형님(김혁래 사범)이 미군 부대에서 가르친 사람만도 수천명이라며 김혁래 사범에게 배운 독일 스포츠계의 한 저명인사가 있었는데, 몇 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런데 이분이 생전에 가족들에게 군산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고, 당시의 추억이 담긴 태권도 유품을 잘 간직해왔다. 유족들이 이를 알고 김혁래 사범 가족에게 유품을 전달해온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군산에서 4년여 동안 활동하던 전일섭 사범은 유수복 도의회 의원(전주)의 초빙을 받아 1954년(52년이라는 주장도 있음) 전주시 고사동에 새로운 도장을 차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겨루기를 하더라도 실제로 사람을 때리지는 않고 때리는 시늉만 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지도관은 달랐다. 발차기, 정권치기 등 대타(겨루기)를 과감하게 했고, 그 해의 왕좌를 놓고 대회도 치렀다. 호신술도 많이 했다.1950년대 후반부터 서울에서는 일본에 거주하던 윤쾌병 박사의 주관으로 한일전 겨루기 시합이 치러졌는데, 전북출신 선수가 한국 대표 선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서울과 전주에서 격년으로 번갈아가며 대회가 치러지다가, 나중에는 아예 서울과 전주로 분리돼 별도의 대회를 치렀다. 이처럼 겨루기 대회가 잦다보니 기술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졌고, 한 방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죽기살기식으로 운동을 했다.창무관은 개성 출신으로 해병대를 제대한 설명희 사범에 의해 1950년 3월 익산의 이리극장 자리에 문을 열었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했으며, 통학생이 많은 지역의 특성으로 인해 중고생 수련생이 많았다. 지도관과 마찬가지로 실제 대련을 중시했으며, 호신술과 실질적인 기술을 많이 보급했다. 60년대 들어서는 고창과 줄포, 흥덕 신림 등 다른 지역에 지관을 두고 운동을 보급했다.청도관은 병무청에 근무하던 현역 중사 박청금 사범이 1950년 전주병무청 창고에서 시작했다. 그 뒤 1955년에 이병무 사범이 경찰서 사범에 위촉된 뒤에는 남원, 김제, 정읍, 순창, 임실, 군산, 부완, 고창, 무주, 진안, 장수 등 도내 각 경찰서에 사범을 파견해 보급했다.처음에는 군인과 경찰을 주요 대상으로 했으나, 나중에 민간인에게도 개방했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격렬하게 하지는 않았으며, 겨루기보다는 품새와 격파 등을 많이 다뤘다. 경찰의 날이나 도의 주요 행사 때 시범도 많이 했다.오도관은 청도관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군부대를 중심으로 보급됐다. 전주에서는 현역 군인인 우종림 관장(현 예비역 소장)이 문을 열었고, 익산에서는 허용 관장이 이끌며 활성화시켰다. 군산은 문한종 관장이 맡았다.무덕관은 철도청 직원인 오용균 관장이 1958년 익산역 내 목욕탕 내 빈공간에서 시작했다. 당시 열차는 석탄을 때는 증기기관차가 끌었기 때문에 역사마다 목욕탕이 있었다. 애초 철도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했으나 58년 8월부터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됐다. 60년대 들어서는 삼례와 신태인, 김제 등의 역사에도 관을 열었고, 63년에는 도내에서 처음으로 익산역 앞에 50평 규모의 전용 체육관을 지었다. 품새와 자기방어식 대련 등을 많이 했다.50~60년대 도장들은 공수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초기에는 일본에 유학을 가서 공수도를 배워온 사람들이 주로 도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태권도 도장들은 관원을 모집하기 위해 전단지를 만들어 전신주 등에 붙이거나 극장 등을 빌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파 등의 시범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전단지도 많이 부착하지는 못했다. 전북태권도계 원로인 문창균 씨(76)는 전일섭 관장이 이끄는 지도관도 100장 넘게 전단지를 만들기는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도장 내 운동기구도 거의 없어서 역기나 단련봉, 샌드백 정도가 거의 전부였다. 역기는 시멘트를 활용해서 직접 제작하거나 철도 레일 등을 구해다 사용하기도 했다. 군산 화력발전소에 가서 쇳덩이를 구해와 아령 등을 만들어쓰기도 했다고 한다.여름철에는 변산 등으로 극기훈련을 겸한 모서훈련을 갔으며, 여기서는 특강과 호신술, 수중훈련 등이 이뤄졌다. 겨울철에는 줄을 맞춰 시내를 달리는 등 모한운동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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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6.0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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