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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들의 일자리 활짝

21세기를 이끌 창조경제의 성장동력으로 감성과 문화예술의 창의성에 주목하게 되면서 문화콘텐츠산업으로 대표되는 창조산업은 문화선진국을 중심으로 국가성장의 주요 전략자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는 창조산업의 생산 유발효과와 부가가치 유발효과, 고용 유발효과 등 다른 산업에 미치는 경제적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순수 문화예술, 창조산업 핵심으로그동안 순수 문화예술은 시장경제의 낙오자로 전락해 국가의 정책적 지원에 의해 명맥이 유지돼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수의 성공한 예술가들에게 부가 집중돼 임금격차가 말할 수 없이 크고, 전문성을 가졌음에도 그에 비해 수입은 턱없이 낮아 우리나라 대부분 문화예술인들은 빈곤의 악순환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경제 패러다임 변화에 따라 순수문화예술이 창조산업 즉 문화콘텐츠산업의 핵심동력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이번 정부가 ‘문화융성’이라는 비전을 통해 문화강국의 길을 가고자 국가적이고 전방위적인 문화예술지원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이런 일련의 환경 변화는 우리 문화예술인들에게 새로운 소명을 부여하고, 또 지속가능한 양질의 일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문화예술분야의 일자리 창출은 단순히 일용직이나 프로젝트 단위의 부정기적인 고용에서 안정된 정규직으로의 전환 뿐만이 아니다. 이를 통해 미래의 문화예술에 대한 잠재적 수요층을 확대해서 문화예술 분야의 외연을 확대하고 일자리가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문화예술체험을 통해 사회생활에 필요한 감성과 소통능력을 향상시켜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예술소비자를 양성하는 문화예술교육인들과 문화예술에 소외된 계층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할 수 있는 문화복지사나 문화매개자의 육성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또한 지역에 산재한 다양한 형태의 문화자원을 발굴해 가공하고 해석함으로써 경제적 의미가 있는 문화콘텐츠로 만들어내는 문화원형 창조인력의 육성은 이들이 창출하는 새로운 사업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인문학과 순수예술이 창의성과 첨단기술의 활용을 통해 스토리화하고 상품화함으로써 관련 산업의 발전과 관련분야 고용창출을 수반해 자연스럽게 우리 예술인들의 사회적 역할을 증대시켜 줄 것이다.우리나라는 문화복지정책 차원에서 전문 예술가의 성과물을 다수의 문화향유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의 문화촉매자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그 역할이 더욱 다양화되고 확대되는 추세이다. 이들은 지역문화기반시설에서 시민의 능동적 참여활동과 주민들의 자율적 문화활동을 활성화하고 지역문화자원을 문화관광자원으로 발굴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역 주민의 문화예술적 역량을 키우고 지역의 문화자생력을 높이고 있어 이와 관련한 인력수요도 꾸준히 증가하리라고 예상된다. 전라북도는 이런 문화콘텐츠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전통문화자원이 유독 많은 편이다. 그런만큼 전북예술인들은 전통문화를 콘텐츠화하고 이를 유·무형의 문화상품으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공예인들이든 디자이너이든 나름의 분야에서 활동여건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의미있는 일자리들을 만들어내는데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분야가 전공과 타분야간 융합을 통해 긍정적 시너지가 극대화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북 전통문화, 콘텐츠 상품 개발을도내 문화예술인들은 이제 더 이상 지자체에서 보조되는 문화예술진흥기금에 의존해서 전시회를 열고 회원들 상호간의 친목과 교류에만 만족하지 말아야 겠다. 그보다는 창의적인 문화기획과 참여를 통해 국민들의 문화향유 욕구를 충족시키고 다양한 문화사업에 적극 개입해 자생력을 확보하고 미래 문화예술의 수요를 만들어 내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문화예술 공급자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기에 앞서 공익을 위한 다양한 문화봉사활동에도 앞장서고 사회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재능기부 운동에서도 역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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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22 23:02

사극 '정도전'

사극 정도전이 ‘백성이 주인인 세상’,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개혁’올 화두로 올초부터 KBS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얻고 있다. 요즈음 사극들은 옛 역사에서 소재를 찾아내, 과거 사실과는 다른 지금의 이야기를 하는 팩션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비추어 ‘정도전’ 드라마를 정통사극의 부활이라고 치켜세울 수는 있다. 하지만 사극이라고 하더라도 역사관을 왜곡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드라마도 역사관 왜곡 안돼지난 주말에 위화도 회군 후 조민수에 의해 창왕이 세워지자 이성계가 사직을 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이성계가 나라를 살리겠다는 일심으로 회군한 후 정치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동북면으로 돌아가고자 사직소를 올렸으며, 정도전과 정몽주가 이를 극구 말려서 조정에 다시 복귀한다는 식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성계는 새왕조 개창에 뜻이 없었고, 조선은 정도전이 세운 나라라는 이야기가 맞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회군은 곧 역모인데 역모의 주도자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군권을 내놓고 사직을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무리한 설정이다. 요동정벌을 단행할 때 팔도도통사는 최영이고, 좌도도통사가 조민수이다. 이성계는 서열 세 번째인 우도도통사이다. 요동출정에 조민수와 이성계가 같이 했고, 회군 단행은 조민수가 참여해 가능했다. 회군후 주도권은 조민수에게 돌아갔고, 조민수에 의해 우왕의 아들 창왕이 옹립되었다.얼마안가 조민수는 이성계세력에 의해 내쳐졌다. 회군후 이성계의 사직과 복직 등 일련의 정치적 과정은 치밀한 전략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계의 사직소는 창왕을 압박하는 정략일 수는 있어도, 정치를 떠나겠다는 의미는 적어도 아니다. 극의 전개상 회군후 사직 장면이 이성계의 속생각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설정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성계에게 위화도회군과 역성혁명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구국의 일념만을 부각시키려 한 것이라면 지나치다. 필자가 창왕 옹위 후 이성계의 사직건에 대해 조금은 장황하게 언급하는 것은 이 논조가 정도전 드라마의 기본 시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정치적 욕심이나 새왕조 개창에 뜻이 없고, 정도전은 오직 백성을 위해서 개혁을 외쳤다는 논조가 앞으로는 어떻게 변모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방영된 것으로 보아 바꿔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정도전에 대한 이해도 좀 더 넓어질 필요가 있다. 그가 새질서 구축에 앞장선 데에는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다. 정도전 집안은 본래 향리였다. 그의 고조부는 경상도 봉화현의 호장이었고, 그의 아버지 정운경 때 과거에 급제해 중앙에 진출하였다. 정도전도 태조처럼 권문세족과는 기반을 달리하는 신진세력이었다. 거기다가 정도전은 노비의 피가 흐른다고 하여 과거 급제후에 벼슬에 나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의 외할머니가 노비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도전을 조선 3노가(三奴家)의 하나라고도 한다. 또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에 정도전의 부인을 최습의 첩 소생이라고 하였다. 정도전에게 고려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 어려운 세상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지배세력은 달라벼슬에 나온 후에도 시련은 이어졌다. 정도전은 친원정책에 반대하다가 나주목 회진 거평부곡으로 유배되었다. 3년간 유배생활을 한 후 삼각산 아래 서실을 열어 생활하는 등, 이성계를 함주막사로 찾아갈 때까지 10여년간 유배와 유랑생활을 하였다. 이 때 가난과 외로움 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정도전이 새왕조 창업이라는 대업에 나선 것은 그의 이런 형편과도 무관하지 않다. 필자는 고려와 조선의 지배세력이 같다는 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려의 구세력들이 조선건국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역은 바로 이들 신진세력들이었고, 거기에는 이런 그들의 형편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이런 점들을 같이 살펴야 정도전과 이성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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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5 23:02

얼굴을 본다는 것

최근에 늘어난 영화의 흐름 중 하나는 전기영화다. 대다수 전기의 주인공은 20세기 인물들이다. 작년 미국에서 개봉돼 혹평을 받았던 〈호밀밭의 파수꾼〉 작가 ‘셀린저’에 관한 작품,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바 있는 〈입센 로랑〉, 올해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는 모두 전기 영화임을 강조한다. 그레이스 켈리를 비롯한 유명인들에 대한 영화가 늘어나는 것은 그들의 삶이야말로 극적인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평생 은둔자로 알려진 셀린저의 뒷모습이 궁금할 것이고, 배우와 왕비의 자리를 오간 그레이스 켈리의 두 가지 삶이 궁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기 영화, 매력적인 소재20세기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고, 그와 함께 유명세를 치른 영웅들이 있었다. 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인해 스타라는 새 신분이 생겼고, 온갖 정보의 네트워크는 넓어졌다. 하지만 그의 진짜 사생활을 들여다보기는 쉽지 않다는 점에서 ‘전기 영화’는 매력적인 이야기의 소재처럼 비춰진다. 그러나, 전기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적인 삶 뒤에 있는 이면, 즉 사적인 삶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 예술이 지닌 본질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발터 벤야민 식으로 말하자면 ‘기술적으로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의 예술작품’들의 속성과 관련을 맺는다. 벤야민은 사진에서 제의가치(종교적 가치)가 완전히 추방당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제의가치가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요새에 들어가서 저항한다고 강조한다. 이 최후의 요새가 바로 ‘인간의 얼굴’이다. 초창기 사진의 역사에서 초상화가 유행을 했던 것도 예술의 제의가치가 물러나 전시가치로 전환되는 과정 중에 저항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얼굴의 아우라를 강조하는 것은 신비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제의가치의 저항과 맞물린다. 그런데, 이 얼굴의 영역은 쉽게 조작이 가능해진 디지털화된 시대에 차원이 다른 갈등을 일으킨다. 카카오톡의 대문 사진이나 페이스북의 초입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 얼굴은 저항을 할 것 같은 아우라의 압도감보다는 인위적으로 조작되어 있거나 포토샵으로 처리되어 있는 방부제가 가미된 이미지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우리는 카카오톡에 실린 사진을 쉽게 믿지 않는 단계로 이미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전기영화’의 유행도 이러한 태도를 대변한다. 더 이상 한 인간의 이면이나 사생활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기 보다는 저 이미지가 과연 진실일까 하는 의구심과 그 사람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다는 열망의 뒤엉킴 속에 한 편의 전기 영화가 완성된다. 한국영화 〈변호인〉 역시 그러한 이미지의 대표작일 것이다. 그의 진짜 얼굴을 보고 싶다는 열망과 그것이 정말 진짜일까 하는 저항을 오고 간다. 진실은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는다. 적당한 사실과 적절한 허구를 가미했을 뿐이다. 이 미묘함 속에 흥행의 추구와 정치적 가치들이 뒤엉킨다. 진실은 저 안 깊숙이 있는 것지금 시대는 더 이상 맨얼굴이 불가능해진 시대다. 흔히 연예인들이 민낯이라고 공개하는 사진도 대부분 자연스럽게 화장된 얼굴들이다. 그 한꺼풀의 양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촌스러워지는 시대다. 그러므로, 수많은 전기영화는 사실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와 촌스럽지 않은 얼굴을 구현해야 하는 상황에 복무하는 것이다. 그 속에 인간은 맨 얼굴은 은막 뒤에 깊숙이 숨어 버린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안 깊숙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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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08 23:02

가마우지를 응원하다

바닷가에서 검은 새를 본다. 바위 위에 갈매기 무리와 함께 앉아있다. 갈매기들은 날개를 접었는데 검은 새는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가마우지란다. 갈매기는 뽀얗고 뽀송뽀송해 보이는데 가마우지는 거무스레하고 추레하다. 갈매기는 기름기 좔좔 흐르는데 가마우지는 거칠고 초라해 보인다. 기름샘 없는 새, 약점이자 강점물에 사는 새들은 꽁지에 기름샘을 갖고 태어난다. 기름샘의 기름을 온몸에 골고루 바르면 깃털은 기름으로 막이 씌워져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체온도 일정하게 유지된다. 가마우지는 기름샘이 없다. 다른 새들보다 가난하게 태어난 가마우지는 물속에 들어가면 깃털이 젖어 체온이 떨어지기 때문에 젖은 깃털을 말려야 다시 사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약점은 강점도 되기 마련이다. 가마우지가 날개를 활짝 펴 말리느라 수면 위에 그늘이 생기면, 그늘 아래로 물고기들이 모여들고 가마우지는 그 물고기들을 재빨리 사냥하기도 한다. 날개를 말린 가마우지가 다시 잠수한다. 가마우지는 다른 새보다 고기를 잘 잡고 잠수 실력은 웬만한 새는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잘한단다. 가마우지를 구경하던 우리들은 잠수한 가마우지가 물속에서 나오는 순간을 제일 먼저 발견하는 사람에게 저녁밥을 사주기로 내기를 했다. 맞춘 사람은 없다. 가마우지가 물속에서 나오는 순간은 번번이 놓치고 한참 떨어진 곳에서 유유히 헤엄쳐 가고 있는 가마우지의 뒤꽁무니만 보았다. 가마우지를 이용하여 고기잡이하는 사람들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그들은 가마우지가 잡은 고기를 삼킬 수 없게 가마우지 목에 넥타이 같은 줄을 감고 겨우 숨구멍만 열어준다. 기름샘이 없는 가마우지의 몸은 바다의 어둠 속을 뒤지는 동안 짠물에 젖고 얼간이 든다. 그러나 제가 잡은 물고기를 제가 먹지 못한다. 가마우지의 목에 줄을 감아 놓은 사람이 가마우지가 사냥한 물고기를 빼앗아 간다. 일을 열심히 해도 가마우지의 살림은 늘 달랑달랑하다. 가마우지가 둥지를 틀던 해안가에 이제는 사람들이 별장을 짓고 찻집을 낸다. 가마우지는 삶의 터전을 점점 잃어갔다. 사람들에게 제 집 자리를 뺏긴 가마우지는 도시의 어두운 구석에 마른 쑥과 삭은 나뭇가지로 둥지를 튼다. 그 둥지에서 알을 품고 새끼를 기른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가마우지는 종종 도시의 낯선 구조물에 부딪히기도 하고 회오리바람을 만나기도 한다.우리들 일터에도 파란 하늘 내려오길바다 속으로 잠수하는 가마우지를 응원했다. 그에게 목줄을 매놓은 사람이 없으므로 그가 잡은 고기는 온전히 제 것이다. 그가 고기를 잡아 제 목구멍으로 삼켰는데 내 허기가 든든하게 채워진다. 햇볕으로 달궈진 바위 위에서 젖은 날개를 말리는 가마우지를 응원한다. 날개 그늘 아래 물고기가 모여드는 것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마 그랬으리라. 우리가 숙소에 들 시간이면 하루 종일 짠물 속을 들락거렸던 가마우지도 둥지에 들리라. 새끼를 품에 안은 그의 잠이 평안하리라. 내일도 가마우지는 바다로 출근하리라. 깊은 어둠을 헤치고 먹이를 구하리라. 그러나 가마우지의 일터에는 흰 구름 몽개몽개 피는 하늘도 내려와 가마우지와 함께 있으리라. 아침마다 넥타이 매고 출근하여 세상의 어둠속으로 자맥질하는 우리들의 일터에도 파란 하늘이 내려와 우리를 응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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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01 23:02

창조경제시대 문화정책과 예술인의 대응

최근 경제 발전의 패러다임이 지식기반 중심에서 디자인과 창의성이 강조되는 창조기반 중심으로 변화되고 있다. 따라서, 선진 각국들은 국가정책의 우선순위를 ‘국민행복’과 ‘삶의 질’에 두고 패러다임 변화를 반영한 다양한 문화예술정책을 펴고 있다.문화융성 국정기조, 예술인에 호기우리나라에서도 글로벌 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국민의 삶 질을 제고와 새로운 성장 동력의 확보를 위해 ‘문화융성’을 국정기조로 제시하며, 지난 시절 압축적이고 비약적인 경제성장 증가에 반해 턱없이 낮은 행복지수를 높여 문화가 있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정책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정부의 문화강국에로의 노력은 문화가 국가이미지 및 브랜드 가치에 미치는 영향력에 주목하고 문화적 가치의 사회적 확산에 노력함으로써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 가치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국가 이미지가 한 등급이 상승될 때 상품의 수출가격이 10%가 상승된다고 하니 말해 무엇 하랴.최근 국가차원의 문화예술분야 육성정책이 전방위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문화예술인들 입장에서는 새로운 기대에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겠다. 그러나 작년 문화예술인 실태조사에 의하면 예술인들의 소득이 임시·일용직 근로자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아예 소득 자료가 나오지 않는 수많은 전업 작가들은 창작활동과는 별개로 생계를 위한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문화 예술 인력을 양성하는 대학에서도 전공하는 학생들이 급감하고, 이는 대학내 경쟁력 약화로 이어져 통폐합 대상이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정부의 다양한 문화정책은 그동안 소외감을 느끼던 우리 예술인들 입장에서는 호쾌한 역전타를 날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이렇게 문화예술 분야가 창조경제의 핵심 영역이 되고 예술적이고 감성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 융합형 인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이 때, 우리 예술인들의 자각과 참여의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정부에서 계획하고 시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주도하고 경쟁력 있는 문화콘텐츠를 활용한 문화상품 개발과 영역간의 확산 등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국가적인 고용창출의 여건을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예술인 복지증진에 투자되는 막대한 경제적 제도적 노력들이 진정한 예술인들의 자생력을 키울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우리 예술인들의 적극적인 대응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우리 예술인들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또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술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것이 아닐까? 즉 우리 예술인 스스로의 자존감을 유지하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재능기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저작재산권을 기증해 이를 콘텐츠화한 다양한 고부가가치의 문화상품 개발에 활용되도록 한다거나 직접 체험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봉사함으로써 창작의 기쁨을 공유하고 자신의 재능으로 문화소외 계층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정부차원의 지원도 국민의 행복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다는 궁극적인 목표에도 부합하게 될 것이다.문화예술인 재능기부 봉사활동을요즈음 장인으로서의 명예와 권위를 국가가 인정해주는 명장이나 무형문화재 등을 선정하는 데도 봉사실적이 중요한 평가항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최고의 영예와 함께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에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우리 문화예술인 단체에서 전시회나 발표회를 통해 분야별 창작활동이나 회원들 간의 소통의 장을 넘어 재능기부와 같은 봉사활동을 사업의 주요목표로 제시하고 실천하는 단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문화융성을 국정기조로 세우고 다양하고 풍부한 지원이 이루어지는 이 때가 바로 우리 문화예술인들이 사회를 향해 문화예술의 가치와 파급효과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시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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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25 23:02

조선 국왕의 시호와 실록의 표제

경기전내 어진박물관에서 〈조선왕조실록〉 복본 특별전이 ‘조선왕조 500년, 천년 한지에 담다’라는 주제로 열리고 있다. 이번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비록 원본이 아닌 복본이지만 흥미로운 전시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복간된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등 3대 실록이 실록편찬사를 보여주는 특이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인조 실록 표제에 시호 없는 이유선조실록은 서로 다른 2개의 실록이 존재한다. 광해군대 집정세력인 북인들이 선조실록을 편찬했고, 인조반정후 집권한 서인들이 이를 개수해 선조수정실록을 새로 편찬했다. 따라서 선조실록은 정권의 변동에 따른 역사기술의 차이를 보여준다. 광해군일기는 정초본 이전의 중초본이 남아 있는 유일한 실록이다. 실록은 초초, 중초, 정초 3단계를 거쳐 편찬되고, 편찬이 완료되면 초초와 중초는 세검정에서 물에 씻어버린다. 광해군일기만 중초본이 남아 있어서 중초본과 정초본의 차이를 읽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전시를 오픈하고 새로운 점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어진박물관에서 해설사로 봉사하고 있는 유정애 선생이 하루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선조실록은 표제(책 제목)에 〈선조소경대왕실록〉이라고 해 선조의 시호(諡號) ‘소경(昭敬)’이 들어 있는데, 인조실록은 왜 인조의 시호가 없고 〈인조대왕실록〉이라고만 되어 있느냐는 것이었다. ‘선조’, ‘인조’라는 왕의 호칭은 묘호(廟號)이다. 묘호는 임금이 죽은 뒤 삼년상을 치르고 위패를 종묘에 모실 때 올리는 존호이다. 〈선조소경대왕실록〉이라고 할 때 ‘선조’는 묘호이고, ‘소경’은 승하한 선조에게 명나라 황제가 내려준 시호다. 유선생의 질문을 받고 살펴보니 실제로 각 왕대별 실록명이 태조에서 선조대까지는 묘호 뒤에 시호가 있는데, 인조이후에는 묘호만 있고 시호가 없었다. 인조실록이 편찬될 때는 효종대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고 있을 때다. 그러면 인조이후 실록 표제에 중국에서 내려준 시호가 빠진 것이 청나라가 조선의 승하한 왕에게 시호를 내려주지 않아서일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통문관지’를 분석한 글에 의하면, 청나라에서도 시호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청나라 황제가, 예컨대 인조에게는 장목왕, 효종에게는 충선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조선의 왕들이 이를 애써 감추고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조실록 이후 실록 표제에 중국 황제가 내려준 시호가 빠진 것도 이런 연유로 추정된다. 이전 같으면 인조장목대왕실록이라고 해야 하는데, 청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를 꺼려해 ‘장목’을 빼고 인조대왕실록이라고 표기를 바꾸었던 것이다. 실록에 기록된 왕의 호칭에도 신하들이 올린 시호는 있지만 청에서 내려준 시호는 없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섰음에도 사가(私家)에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崇禎)’ 연호를 조선이 망할 때까지 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실록에도 청 황제가 내려준 시호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이를 청나라가 알았다면 용납했을지 의문이다.청나라 인정하지 않은 조선 사대정책조선은 청의 힘에 굴복했지만 청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사람들에게 청나라는 임진왜란때 우리를 도운 명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이고, 무지하고 예를 모르는 오랑캐였다. 조선은 작은 나라이지만 이런 청나라를 상종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무조건 힘이 있다고 섬기지 않았다. 조선 사대정책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조선은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지만 정신까지 청나라 만주족에게 내주지 않았다. 청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해서 발전된 문물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폐단이 있었다. 그리고 청에 강경대응한 데에는 인조반정의 명분 또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선 선비들의 이런 기개와 정신만은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식민통치하에서, 광복후 경제발전과정에서 조선의 선비정신은 묻히고 홀대됐지만 이제라도 되살려 계승해야할 우리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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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8 23:02

알랭 레네를 추모함

2월 1일의 일이다. 로테르담 영화제의 일정을 정리하고 프랑스의 클레르몽 페랑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클레르몽 페랑 국제 단편 영화제가 있다. 기차는 파리의 북역에 정차했고, 장병원 프로그래머와 나는 짐을 끌고 지하철을 이용해 ‘베르시역’으로 향했다. 베르시에는 이탈리아로 가는 야간기차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중부와 남부로 가는 열차편들이 출발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파리 시네마테크가 있다. 지하철의 출구로 나올 때 우리는 표지판에서 시네마테크의 방향을 잠깐 바라보기도 했다. 90세 넘어서까지 영화감독 활동베르시에서 출발한 기차는 빠르지 않은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파리를 벗어나 보이는 작은 도시들은 오히려 정감이 있었다. 느베르를 지날 때였다. 쟝(나는 자주 그를 ‘쟝’이라고 부른다)은 이 도시가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이 촬영된 곳이라고 말을 했다. 영화 속 여주인공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던 도시, 강물이 흐르던 정경이 새겨진 도시가 바로 느베르였다. 이 기억은 현실이 되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2014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의 경쟁부문 상영작 중에는 〈라일리의 삶〉(Life of Riley)이 있었다. 알랭 레네를 유난히 좋아하는 쟝에게 표를 양도했다. 영화를 보고 온 그가 숙소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생각이 난다. 〈스모킹/노스모킹〉처럼 연극적인 영화의 계보에 속하는 이 작품은 한 인물의 삶을 독특하게 조명하고 있었다. 90세가 넘은 알랭 레네는 베를린을 찾아오지는 않았다.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시상식 장면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분주하게 지내던 3월 1일. 알랭 레네가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쟝과 나는 이 영화를 올해의 영화제에서 상영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중이었다. 우리는 20세기 영화의 한 페이지가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 아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그는 현역의 감독으로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알랭 레네의 영화 중 하나는 국내에 개봉된 적이 있는 〈나의 미국인 삼촌〉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그의 실험적인 작품이라 불리는 뒤라스의 각본을 옮긴 〈히로시마 내 사랑〉이나 로브그리예의 각본을 옮긴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는 차라리 뻔하고 뻔한 영화였다. 〈나의 미국인 삼촌〉은 쥐를 갖고 실험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면서 프랑스의 과학자 앙리 라보리의 이론을 설명한다. 행동 이론에 관한 과학적 설명이 끝나면, 라보리의 내레이션과 함께 세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영화는 그의 이론에 따라 인물들이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진화론 혹은 진화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라보리의 이론과 그것을 영화에 적용하는 방법은 흔히 기억과 시간을 다루는 알랭 레네의 스타일의 확장이라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설득력이 없는 말이다. 인간 탐구한 고집스러운 예술가이 작품은 최근까지 선보이고 있는 그의 연극적 스타일의 확장에 가깝다. 과학의 실험실을 인간의 삶이라는 무대로 옮겨 놓고, 그 속에서 행동하는 인간 쥐들을 관찰해 보는 것이다. 연극이라는 무대가 인생을 시연하는 실험의 장소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레네 영화의 상당수는 이와 같은 실험을 관객에게 전하면서, 당신의 삶은 안녕한지를 질문한다. 레네는 영화예술의 혁명가라기보다는 인간을 탐구하는 고집스러운 예술가였다. 부디, 그의 마지막 영화를 5월에 만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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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1 23:02

도도새를 돌아보다

영국의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뼈마디를 다 드러낸 채 내게 돌진하는 듯한 공룡을 보며 주춤주춤 뒷걸음을 놓았다. 대단했다. 암모나이트며 삼엽충, 도도새 등을 만나며 박물관에서 이틀을 보내는 동안 처음의 놀라움은 차츰 돌아봄으로 바뀌어갔다. 생각 없이 자연을 훼손하며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았다. 전시실 구석에서 장감장감 내게 건너오는 도도새와는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도도새가 멸종된 이유를 생각하며도도새는 날지 않았다. 땅 위에는 먹이가 풍부했고 천적이 없었다. 타고난 제 본성을 잊고 땅 위의 생활에 만족했다. 날개가 퇴화되어갔어도 걱정도 하지 않았다. 천적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쓰거나 진화하지도 않았고 경쟁도 하지 않았다. 제 환경이 저를 퇴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도도새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멸종되었다.며칠 전 아이들과 연을 날렸다. 갖가지 연들이 텅 빈 겨울 하늘을 날아오르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한 아이의 연실이 끊어져 버렸다. 뱅글뱅글 회오리치다 사라지는 연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는 외할머니와 둘이 산다. 말투와 생각, 심지어 앉는 자세도 영락없이 할머니다. 어머니는 정신 장애가 좀 있고 아버지는 바람 속에다 둥지를 튼 지 오래되었다. 또래들은 그 아이를 오차원이라고 부른다. 꾀죄죄하고 얼룩이 많은 옷을 입고 다니는 그 아이의 장래 꿈은 패션모델이다. 말이 없고 편식도 심하지만 인형을 돌보는 것과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 오랜 직장 생활에 물린 사람들은 일어나고 싶은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은 때 먹는 것이 작은 꿈이다. 반면에 생활에 얼마간의 통제를 받으며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직장에 출근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몇 해 전 겨울, 전력난이 심각하여 공공기관들이 실내온도를 많이 낮춘 적이 있다. 인터넷 여기저기에 너무 추워서 업무능률이 오르지 않는다는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여러 사람들이 공감과 격려의 댓글을 줄줄이 달았다. 그런가 보다며 별 생각 없이 화면 여기저기를 뒤적이던 내 눈을 확 잡아 끈 댓글 하나에 오래 마음이 머물렀다. ‘나는 그 안에서 얼어 죽어도 좋으니 근무나 한번 해 보고 싶다.’ 연은 묶여 있어서 하늘을 나는 꿈을 꿀 수 있다. 묶인 끈에서 풀리면 날 수 없다. 곧 진창에 처박히거나 가지에 걸려 삭아 가리라. 외할머니와 사는 아이가 인형에게 이 옷 저 옷 입혀보고 색색의 그림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제 꾀죄죄한 입성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회색빛으로 묶인 환경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지금 직장이 없는 사람은 직장에 근무하는 꿈을 갖고, 긴 직장생활에 지친 사람은 직장을 벗어나는 꿈을 갖는다. 우리는 모두 현실에 묶여있다. 자식에게 묶인 부모, 부모에게 묶인 자식, 자유롭고 싶은 직장인, 그렇게라도 묶여보고 싶은 취업준비생, 모두들 이것저것에 묶여있어서 이런저런 꿈을 갖는 것이다.새싹이 아름다운 건 꽃피울 꿈 때문지금 무엇엔가 묶여서 꿈을 포기했는가? 지금 생활이 만족스러워 더 이상 꿈이 필요 없는가? 도도새를 돌아보자. 날아야 한다는 자기 본성조차 잊고 살다가 날개는 퇴화되고 몸뚱이는 박제되어 컴컴한 박물관 구석에 처박혀있다. 새싹이 아름다운 건 꽃피울 꿈이 있기 때문이다. 꽃이 아름다운 건 열매 맺을 꿈이 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이미 이룬 삶보다 이뤄가고 있는 삶이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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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04 23:02

전주 한옥마을 명품화와 공예인 역할

한국의 전통문화체험 1번지인 전주한옥마을은 누가 뭐라 해도 전통문화도시 전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임이 분명하다. 테마파크가 아닌 실제 주민들의 거주공간에 다양한 고풍스런 전통문화시설이 어우러져 특히 한류문화관광을 원하는 외국인들에게는 꼭 들러야 할 명소로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친화적인 한옥에 머물면서 지척에서 다양한 우리 먹거리와 전통문화를 즐길 수 있고, 주변의 특색 있는 관광지와 연계한 관광코스들을 돌아보는 것만으로 한옥, 한식, 전통혼례나 전통공연 및 전통공예 등 한류의 모든 요소를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다는 장점은 쉽게 맛볼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관광명소 되기 위해서는그 덕에 전주한옥마을은 연 관광객 500만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화려한 성과를 더욱 확산시키고 지역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넘어야할 산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공간적으로 이미 포화상태인 한옥마을의 외연을 넓혀 새로운 문화관광 콘텐츠를 추가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의견에서부터 이미 구석구석 상업시설이 들어서면서 천정부지로 올라있는 임대료로 인해 상업화가 극성이며, 각종 기념품점에는 문화상품이라고 하기에는 함량미달의 국적을 모르는 상품들로 가득 차 전주한옥마을의 정체성이 흐려지고 있는 일들은 자주 지적되고 있는 문제들이다. 이러한 문제들 중 우리 공예인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 어느 조사 자료에 보니 한옥마을 방문후기 중 아쉬운 점의 하나로 전주한옥마을을 제대로 기념할만한 기념품을 찾기 힘들었다는 점을 꼽고 있다. 한옥마을에는 지역공예인들이 많이 거주하거나 체류하면서 다양한 공예체험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도예체험관 등 몇몇 체험시설들은 관광객들의 다양한 수요에 맞춘 맞춤형 공예체험프로그램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성공적인 몇몇 공예인들의 경우도 경제적 차원에서는 아직 한참 미흡하다. 대부분의 공예인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고가에 사갈 관광객을 만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거의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한정된 작품을 관광객들이 쉽게 사갈 수 있도록 저렴하게 팔기도 어려워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관광객을 모으는 역할에 그치고 기념품 판매는 기념품 잡화상에게 맡기고 있는 게 현실이어서 경제적 수익을 발생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지속되면 체험프로그램의 수준도 점차 낮아질 것은 뻔한 이치일 것이다. 한옥마을의 세계적인 관광명품화는 단순히 한옥이라는 거주공간만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한다. 생활공간으로서 다양한 문화콘텐츠들이 씨줄 날줄로 거주공간을 채워줄 때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한식도, 판소리나 민요도 꼭 필요한 부분이며 우리의 전통공예체험과 공예문화상품도 꼭 필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공예문화상품을 개발하는 일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북공예인들에게 부여된 큰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전북 대표 공예문화상품 만들어야소치 동계올림픽을 치른 러시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통인형 마뜨료쉬카(인형 안에 같은 모양의 인형이 여러 개 들어가 있는 전통공예품)가 있다. 마뜨료쉬카는 러시아의 다양한 민족의 민속의상을 입혀 교육용 목각인형으로 시작해 최근에는 만화캐릭터, 유명인과 연예인 등 다양한 소재를 이용한 관광 상품을 제작하고 있으며 수집가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우리 공예인들도 각각의 전공으로 한정하는 제품을 고집하지 말고 도태칠기(도자기에 옻칠하여 소성), 나전칠기와 도자기를 융합한 나전칠기도자기와 전통염색법과 현대적 디자인의 결합 등 전통기술을 현대화하고 더 나아가 현대기술과 디자인까지 접목함으로써 공예인과 디자이너, 마케터 등이 협업하는 차세대 공예상품 개발에 나설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공예문화상품의 전문성과 다양성을 실현하면서 전주한옥마을의 세계 관광명품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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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25 23:02

태조 이성계와 전북

모방송국의 사극 ‘정도전’이 주목을 끌고 있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와 함께 새왕조 조선을 건국한 주역으로 낡고 부패한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창출한 개혁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전주는 조선 왕실의 본향방송의 여파가 지역문화정책에도 영향을 준 것인지 전라북도가 이성계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한다. 도내의 이성계 관련 유적지를 재조명하고 이를 문화관광자원화 하겠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전북은 조선의 왕도도 아니고 건국자 태조가 태어나거나 산 곳도 아니지만 태조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와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전주는 조선왕실의 본향이요 뿌리이다. 조선왕실의 시조 사당 조경묘가 전주에 있다. 지금은 뿌리의식이 약해져 본향의 가치를 헤아리기 어렵겠지만, 조선사회에서 본향은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였다. 조선사회의 특질을 잘 담고 있는 족보를 보면 중심이 내가 아니라 시조이고, 나는 구성원일 뿐이다.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른을 뵈면 처음 묻는 말의 하나가 본향이 어디냐는 것이었다. 어느 국회의원이 본관이 분명치 않아 모임에서 창피를 당하고 유명한 분을 찾아가 손이 끊긴 명문가의 후예로 본관을 삼았다는 말도 있다. 전주가 조선 왕실의 본향이라는 것만으로도 전북이 태조 프로젝트를 추진할 만한 이유가 된다. 우리가 다른 시대에 살고 있어서 조선왕실의 본향으로서 전주와 전북의 위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조선은 건국직후 태종 10년(1410) 태조 어진(왕의 초상)을 전주 경기전에 모셨다. 한양 외에 지방 다섯 곳에 모셨는데, 그 중 평양·경주·개경 세 곳은 한시대의 수도였고, 나머지 두곳이 태조가 태어난 영흥과 그 선조들이 살았던 본향 전주이다. 현재 전주는 태조 어진과 어진을 모신 진전(경기전)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태조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기 전까지 살았다는 이목대와, 태조가 황산대첩을 거두고 귀경길에 일가친지를 불러 잔치를 벌였다는 오목대도 주목된다. 태종 이방원과 맞섰던 2차 왕자의 난의 주역 회안대군 이방간의 묘소도 전주에 있다. 전북은 또한 황산대첩과 관련해 태조 이성계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남원 운봉의 황산대첩은 변방의 무사 이성계가 그 이름을 온 고려에 알리고 중앙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던 싸움이다. 황산대첩은 위화도회군과 함께 태조가 새왕조 건국으로 갈 수 있는 세력성장의 발판이었다. 왜의 소년장수 아지발도가 활에 맞아 죽으면서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피바위, 달을 끌어당겼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인월 지명 등 이성계의 대승을 기리는 많은 이야기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스토리텔링으로 이만한 소재도 드물 것이고 게임의 소재로도 검토될 만하다.진안 마이산은 또 태조가 건국의 계시를 받은 몽금척의 무대이기도 하다. 태조가 하루는 금척을 받는 꿈을 꾸었는데 그 무대가 마이산이라는 것이다. 금척은 자를 말하는 것으로 통치자의 상징이다. 마이산 용암 아래에는 태조가 머물렀음을 기념하는 주필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마이산자락에 건립된 이산묘는 이런 조선건국의 정기를 이어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남원 운봉은 황산대첩의 무대임실 성수산 상이암에는 태조의 글씨로 전해지는 삼청동이라 쓰여진 비가 있다. 성수산은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향해 내려오는 명산으로 고려태조 왕건과 조선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해 새왕조를 세우는 천명을 받았다는 곳이다. 순창에는 태조가 무학대사를 만나러 만일사에 가다가 고추장 맛을 보고 임금이 된후 진상해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추의 전래시기와는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순창고추장의 유래로 전해지는 설화다.이처럼 전북은 조선왕실의 본향이요 황산대첩의 무대로서 태조 이성계와 관련해 많은 유적과 설화들이 있다. 차제에 이런 조선 태조의 이야기와 유적들이 꿰어져 후백제 견훤과 함께 왕도로서의 전주와 전북의 자존심을 세우고 또 한편으로 문화관광자원으로 육성되어 역사와 문화의 도시 전주와 전북을 키워나가는 한축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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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8 23:02

로테르담 영화제 체험기

지난 번에 이어 ‘로테르담 영화제’ 이야기를 또 다시 꺼낸다. 이번에는 올해의 로테르담 체험기다. 영화제의 폐막을 이틀 앞두고 시상식에 행사에 참여했다. 이곳의 시상식은 배지만 있으면 쉽게 참석이 가능하다. 여러 부문의 시상이 이어졌지만 대표적인 경쟁 부문인 ‘타이거상’시상이 관심을 모았다. 15편의 후보작이 소개됐다. 그 중에는 한국영화 〈한공주〉가 있었다. 이 작품은 이수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이름의 느낌과는 달리 그는 남성 감독이다. 훌륭한 영화인·좋은 관객과의 만남로테르담에서 그를 만난 것은 돌른(Dolen) 센터의 아침 식사 자리였다. 영화제는 공식 게스트에 한해서는 간단한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쿠폰을 제공한다. 반가움을 표하는 그에게 습관처럼 인사를 받아 넘겼다. 그가 누구인지를 인식하는데는 대화가 필요했다. 그와 인연을 맺은 것은 단편영화 〈적의 사과〉를 코닥필름의 단편지원작으로 결정하는 자리에서였다. 코닥의 필름이 사라진 시대이니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던 이 지원 제도가 역시 사라져 버렸다. 단편 〈적의 사과〉는 당시 회자된 영화로 화제를 모았다. 그 후 이수진 감독 한 메이저 회사에서 장편영화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의 장편 데뷔작은 회사를 나와서야 가능했다. 〈한공주〉는 부산영화제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 마라케시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마라케시 영화제는 상금이 많기로 소문난 영화제였는데, 이번에 갑작스레 제도가 바뀌어 상금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좋은 경험을 간직하게 됐다. 심사위원장였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그를 따로 불러내어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다. 영화제의 만남이란 그런 것이다. 좋은 관객들, 훌륭한 영화인과의 만남은 무형의 자산을 제공한다. 물론, 상금도 중요하다. 〈한공주〉는 장건재, 양익준, 박정범 등에 이어 로테르담 영화제의 타이거상을 수상했다. 올해 상금은 1만 5000 유로다. 종종 해외 평론가나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의 말처럼 한국은 매년 새로운 감독들이 쏟아지는 ‘놀라운’ 영화 생산국가 중의 하나다. 하지만 과정을 알게 되면 놀랍다고만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국의 새로운 데뷔작은 거의 개인의 투자와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렵게 만들어진 독립영화는 영화제에 잠시 소개가 된 후 사라져 버린다. 젊은 감독들의 영화를 ‘영화제용 영화’라고 싸잡아서 말하고는 하지만, 영화제가 없다면 그나마 공개될 수 있는 공식적인 기회를 잡기도 어렵다. 각종 지원이라는 것도, 영상위원회나 제도를 유지하는 명목상의 구조로 전락한지 오래다. 미디어 역시 마찬가지다. 천만 관객을 기사화하는 데 지면을 할애하다 보니 ‘천명’ 관객을 동원할 수 밖에 없는 영화에 대해서는 지면이 없다. 현실이 그러할진대 새로운 한국영화가 도래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우연과 기적에 가까울 것이다. 영화 미래 보여줄 실속 잔치 필요지난해 전주에서 소개된 한국의 장편 영화 중에 현재까지 개봉되거나 예정인 작품은 대략 다음과 같다. 〈환상 속의 그대〉, 〈마이 플레이스〉, 〈레바논 감정〉, 〈디셈버〉. 그리고, 영화제는 물론이고 극장에서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던 〈천안함 프로젝트〉 정도다. 올해는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 폐막식을 대신해 시상식을 영화제 후반에 진행한다. 그것은 영화제에 소개되는 영화에 대한 관심을 조금 더 모으는 형식일 것이다. 올해 바라본 로테르담 영화제는 소문난 잔치가 아니라 미래를 보여줄 실속 있는 잔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또렷하게 환기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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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1 23:02

오리 구하기

“야아, 내가 날짜 계산 다혀서 모이도 몽땅 주고 나 없는 동안 수영도 허라고 물도 큰 함지박으다 많이 받어놓고 왔다. 추울 깨미 오리를 빈 돼지막으다 디려놓고 왔응게 갠찬을 것인디 그도 니가 한번 가봐라, 날씨가 호랭이도 잡게 생겼다.”막내 이모의 투병소식을 듣고 서울에 가신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리한테 한 번 가보라는 것이다.시골집에 홀로 남은 오리 한 마리시골집에는 어머니가 심심파적으로 기르는 오리가 한 마리 있다. 나는 오리 돌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리에게 모이와 물을 주고, 저녁이 되면 알을 거두는 일이 어린 내 몫이었다. 여름철에는 오리의 빽빽한 깃털에서 나는 냄새로 코가 문드러질 지경이었다. 또 얇은 고무신에 전해지는 오리 배설물의 물큰한 촉감은 정말이지 징그러웠다. 알을 거두다가 배설물을 손에 묻히는 일은 말 그대로 다반사였다.시골집은 쓸쓸했다. 바람이 이리저리 굴려놓은 마당의 허섭스레기들을 대강 정리하고 오리가 있는 돼지막으로 갔다. 되도록이면 오리를 보지 않고 모이만 뿌려 주려고 문을 빠끔히 열자마자 오리가 푸다닥 날아든다. 반사적으로 떨쳐내니 다시 필사적으로 날아든다. 다시 밀치려다 오리의 간절한 눈빛과 마주쳤다. 세상에!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절실한 눈빛을 본 적이 없다. 할 수없이 문을 다 열고 돼지막 안을 살펴보았다. 어머니가 함지박에 담아 들여놓은 물은 꽝꽝 얼어서 커다란 빵처럼 부풀어 있었다. 일주일 내내 추웠는데 물은 진즉에 얼었을 것이고 오리는 마른 모이만 먹고 물을 못 마셨을 것이다. 마른 모이는 위장 안에서 불어 갈증이 더 났을 것이다. 내가 돼지막을 살피는 짧은 사이에 오리는 동파를 막으려고 조금 열어둔 수도꼭지 앞으로 뒤뚱뒤뚱, 그러나 재빠르게 달려갔다. 물 마시는 소리가 집안의 정적을 흔들었다.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어도 오리의 간절한 눈빛과 마주친 후엔 내게 어쩌지 못하는 책임감이 생겼다. 아무도 없는 집에 녀석을 혼자 두고 오자니 맘이 켕겨서 데려오기로 했다. 물과 모이만 주거나 아니면 살아있는지 들여다보고 바로 오려던 마음을 바꾼 거다. 녀석이 푸덕거릴까봐 날개나 다리를 묶을 생각도 했으나 오리를 만지는 것은 정말 싫었다. 그냥 돼지새끼처럼 몰고 오기로 했다.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빈집에 두고 올 요량이었다. 오리도 내 요량을 헤아렸는지 줄로 묶거나 막대기로 몰지 않아도 나를 졸졸 따라왔다. 마당을 지나 동네 고샅길까지도 내 옆에 딱 붙어서 따라 나왔다. 심지어 뒷좌석 차문을 열어주니 차에도 얌전하게 올라탔다. 그렇게 전주에 오는 한 시간 동안 오리는 차 안에서 퍼덕거리지도 않았고 앞자리로 넘어오지도 않았다. 물론 배설물도 흘리지 않았다. 훈련받거나 사람 손에 길들여 자란 개도 아니어서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신기했다. 주인 오길 간절히 빌었으리라간절하면 하늘에 닿는다고 했던가. 춥고 캄캄하고 기갈이 드는 겨울 한 복판에서 오리는 주인이 자기에게 와줄 것을 간곡하게 빌었으리라. 마루며 우물가에 생각 없이 배설물 내지른 것도 참회했을지 모른다. 지금 삶의 중대한 결정 앞에 선 사람들도 간절한 기도로 상대를 먼저 감동시켜야 하리라. 아파트에 데려와 욕조에 넣어주니 유유자적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뒤뚱뒤뚱 거실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냄새 지독한 배설물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오리와 한 달을 같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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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04 23:02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 공예인의 역할

상상력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유망산업으로 인식돼 세계 각국은 문화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중점 육성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한류 열풍으로 2012년 문화산업 수출액이 사상 최초로 수입액을 추월함으로써 한류 붐을 타고 신문화강국에 등극했다. 새정부에서도 문화융성을 국가정책 방향의 핵심기조로 제시함으로써 한류를 주춧돌 삼아 문화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산업전반에 문화가 체화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공예는 디자인보다 더 창의적이렇게 문화적 요소들이 체화돼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문화산업의 여러 분야에 공예도 엄연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공예인의 한사람으로 문화산업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는 훌륭한 인재 양성에 헌신해 왔다고 자부하지만, 한편으로 졸업생들이 취업과 작가의 길에서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현실을 대하면 공예교육의 지향점이 어디가 돼야 할지 막막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 대학교육에서 공예과를 시작으로 오랫동안 도자, 섬유, 목, 금속 등으로 세분해 공예인들을 양성해왔는데 입시환경이 급격히 변하면서 전공이 통합되거나 앞다퉈 디자인과로 옷을 갈아입어 대학에서 공예과를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마치 첨단 문화산업의 시대로 가려면 디자이너는 필요하고 공예가는 상관없는 구시대 유물인양 취급하는데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공예가란 다양한 재료와 공구를 사용해 공예품 즉, 실용적이면서 예술적 가치가 있는 물품을 제작하는 사람을 말하며 디자이너는 대상의 유무형에 관계없이 자기의 독창적 발상이나 착상을 실현하기 위한 전 과정을 계획하고 설계하며 조직화를 행하는 사람이다. 둘 다 예술가이면서 실용적인 물건을 만들거나 기획하는 사람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를 바 없으나 공예가는 작품을 디자인하고 직접 만들기까지 하는 점에서 보면 디자인보다는 공예가 훨씬 더 창의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다양한 상품이 시중에 나오다 보니 같은 기능을 가진 공산품을 더 차별화하고 매력적인 상품으로 포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외관 디자인이 중요시 되면서 이를 설계하는 사람, 즉 디자이너의 중요성이 증대돼 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첨단기술의 발전에 따른 산업의 고도화로 제품의 차별화가 어려워지자 산업디자이너들은 제품의 외관을 디자인하는데 머물지 않고 감성과 스토리를 엮어 제품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소비자들의 니즈를 충족시키려는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런 형편에 예술적 표현과 장인정신을 통한 작품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우리 공예인들이 문화산업 발전에 기여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순수미술작품들이 미술시장에서 표준화된 평가방법들을 통해 활발하게 거래되면서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우는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을 지켜만 보면서 누군가가 자리를 펴주기만 바라고 있을 것인가? 공예인, 문화상품 개발 적극 참여를다행히도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소비자들의 욕구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 상품의 수명이 매우 짧다. 그래서 과거 제품을 대량생산했던 대기업에서도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을 통해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제품에 예술을 차용하거나 융합해 작품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려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공예인들은 디자이너들이 제품기획자로서 소비트렌드를 연구하고 미래가치 창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점을 본받아 공예가로서 예술작품이면서도 실용성이 뛰어난 문화상품 개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이렇게 공예인들이 한류바람을 타고 세계로 확산될 수 있는 한국 전통문화와 장인정신이 깃든 작품제작에 적극 나선다면 한국공예문화와 공예인의 위상을 높이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이 되는 길이 그만큼 빨라질 것이다.△이광진 이사장은 원광대 미술대학 교수이며 박물관장으로 목정문화상전북예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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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28 23:02

갑오년 청마의 해

2014년 올해는 갑오년(甲午年) 말띠해이다. 전주역사박물관에서는 매년 연말연초에 띠전시를 열고 있다. 올해가 일곱번째로 말띠 특별전이 “달리자, 청마야”라는 주제로 열리고 있다.청마(靑馬)의 해라고 하는 것은 갑오년의 ‘오’가 말을 뜻하며, ‘갑’은 오행으로 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청은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상징하므로 청마의 해는 더욱 힘차고 생동감 있는 해이다.더욱 힘차고 생동감 있는 해 맞아열두 띠 중에서 말(馬)은 일곱 번째로 시간은 낮 11시에서 1시를 가리킨다. 낮 12시를 정오(正午)라고 하는 것은 곧 오시의 가운데라는 뜻이다. 밤12시를 자정(子正)이라 한 것도 자시인 밤 11시에서 1시의 가운데라는 데서 온 말이다. 말은 교통수단으로 우리 일상과 같이해 왔다. 암행어사의 마패도 실은 역참에서 몇 마리의 말을 바꿔 탈 수 있는지를 표기한 패이다. 마패에 그려진 말의 수에 따라 오마패, 삼마패라고 하는데 암행어사는 주로 이마패와 삼마패를 받았다. 교통수단은 자동차로 바뀌었지만, 자동차 이름에는 지금도 말 이름이 쓰이고 있다. 포니 자동차는 ‘귀여운 작은 말’, 갤로퍼는 ‘질주하는 말’, 에쿠스는 라틴어로 ‘천마(天馬)’, 영어로는 ‘세계적으로 독특하고 독창적인 명품 자동차’라는 의미이다. 말은 탄탄한 체형과 질주 본능으로 박력과 생동감, 힘과 도약, 강인함을 상징한다. 말이 우리 문화속에서 신의 전령으로 인식되는 것은 이런 힘찬 기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백마가 품고 있던 알에서 나왔다는 신화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말은 또 영혼을 인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는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천마도가 뿔 달린 기린이라는 설도 있다. 고대 무덤에서 나오는 말형 토우는 영혼을 인도하고 저승에서 영구히 복락을 누리라는 의미이다. 올해 들어 모방송국에서 정도전을 방영하고 있다. 그는 태조와 함께 조선 건국의 주역이다. 조선을 정도전의 나라라고 할 정도이다. 그가 말띠이다. 공민왕, 박제가, 정약용, 추사 김정희, 이상설 등도 말띠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튼, 작년에 서거한 만델라도 띠로 보면 말띠이다. 말의 힘찬 기운처럼 걸출한 인물들이다. 말띠 여자는 팔자가 세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에서 나온 것으로 우리나라 문헌이나 민속자료에는 없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말을 타는 꿈은 성공의 표시이다. 조선시대 성종비 정현왕후, 인조비 인열왕후, 효종비 인선왕후, 현종비 명성왕후 등이 모두 말띠다. 동학혁명기념일 제정 시급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올해로 120주년, 2주갑을 맞는다. 사람이 하늘이고 그런 세상을 만들려 한 동학은 전북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결집된 지역정신이다. 그럼에도 동학은 지역정신으로 자리하지 못하고 있다. 전북지역 지자체간의 갈등으로 동학농민혁명기념일 제정이 몇 년째 표류하고 있다. 올 한해 동학의 정신으로 뜻을 같이해 기념일 제정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청마의 힘찬 기상으로 새롭게 도약하여 전북이 신(新) 갑오개혁의 시대를 열어갔으면 한다.△이동희 관장은 전북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북박물관미술관협의회장, 어진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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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21 23:02

마음이 찾은 영화 '마테호른'

거의 일 년 전 일이다. 출장을 떠나기 전 배급을 담당하고 있는 양팀장이 다가와 말했다. 한 편의 영화를 구매해야 합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부담이었다. 영화제를 앞두고 상영작을 골라내기에도 주어진 시간과 일정이 부족했는데, 거기에 국내에 배급할 영화를 계약해 오라는 것은 일타쓰리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내색하지 않고 알았다는 말만을 되풀이 했다. 로테르담 영화제 관객상 수상작품지난 해 로테르담 영화제는 그 동안 다녀본 영화제 중 최악이었다. 그것은 영화제 상영작들이 형편없다거나 날씨가 추워 몸살이 났다거나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차마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회의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뒤를 돌아보기에는 앞으로 나아갈 시간도 빠듯했다. 로테르담 영화제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비디오 시사실에서 보내며 빛의 속도로 전체상영작을 관람하던 중 구비되어 있지 않는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다. 〈마테호른〉의 관람은 그렇게 시작됐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흐르며 시작되는 이 영화는 한 마을에 외롭게 살고 있는 프레드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출발한다. 6시가 되면 기도를 하고 밥을 먹는 한 남자의 삶은 규칙을 엄밀히 준수하는 것 같지만 사정을 알고 나면 일종의 채찍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바른 생활은 경건함이 아니라 죄책감의 행동이었다. 나홀로 족인 프레드 앞에 어느날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테오라는 남자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조그만 변화가 일어난다. 슈퍼에서 한 덩이의 고기를 사던 그가 두 덩이가 든 고기를 사면서 두 사람은 함께 일을 하게 된다. 이 과정은 비밀의 베일을 벗기는 것으로 이어지진다. 마을에서 항상 그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남자의 고통도 알게 되고, 테오의 과거 사연도 드러나면서 프레드를 포함하여 모두가 상처받은 영혼들이라는 통찰로 이어진다. 프레드는 아내와 함께 했던 마테호른에 이번에는 테오와 함께 오르기로 결심 한다. 정상에 오르는 마지막 장면은 프레드의 사슬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과 교차 편집이 되어 있다. 그때 듣게 되는 노래가 This is My Life.이다.〈마테호른〉은 위대한 감독의 영화가 아니다. 〈이프〉라는 영화에서 얼굴을 익힌 디데릭 에빙어라는 네덜란드 배우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것은 오늘날 예술영화의 시장에서 보자면 최악의 조건이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최신의 영화가 있다면 바로 이 작품이라는 생각이었다. 고통 위에 살아가던 한 남자가 자신의 현실과 대면하는 과정은 누구나 겪는 인생의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다. 누군가에는 사랑 이야기로, 누군가에게는 가족 이야기로, 누군가에게는 외로운 이들의 이야기로 다가올 이 작품은 실상 그 모든 것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로테르담 영화제의 관객상을 수상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시공간 초월해나눌 수 있는 마음지난 주에 개봉한 〈마테호른〉의 수입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꼭 일 년 만의 일이다. 어쩌면, 지난해에 한 일 중 가장 잘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극장으로 들어갈 때는 네덜란드 영화에 대한 이물감이 크겠지만 바흐와 함께 무장해제가 된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가벼워지는 마음을, 극장을 나왔을 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경험이 주는 본질이란, 그런 것이다. △이상용 프로그래머는 영화평론가로서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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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14 23:02

그리만 된다면야

도깨비 방망이 하나 갖고 싶다. 문화예술인의 바닥난 통장에 대고 ‘돈 나와라 뚝딱’ 하고 외쳐서 통장 잔고를 무진장 늘려주고 싶다. 필요할 땐 언제든 넉넉하게 쓰고, 쓰고 넘치는 돈을 가끔 귀찮아하기도 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 그리만 된다면야 정신문화를 위해 생활에는 좀 무디어도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 예술인들이 많아질 것 같다. 도깨비 방망이 하나 있다면…도깨비 방망이 하나 갖고 싶다. 초라한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어깨에 대고 ‘작품 나와라 뚝딱’ 하면 세계인의 칭송을 받는 작품들이 재깍 튀어나오면 좋겠다. 그리만 된다면야 작품 한 편이 작가의 생전에는 훈장이 되고 사후에는 명예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문화예술인들이 창작을 위해 고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아무 짬도 모르는 아이처럼 까만 눈을 깜빡깜빡하는 컴퓨터의 커서 앞에서 더 이상 궁싯거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야 건들장마처럼 시류를 따라가는 얍삽한 문화예술이 제대로 걸러질 것이다. 문화예술에는 일가견이 있는 듯 말하는 사람들이 막상 지역의 문화예술은 살짝 무시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도깨비 방망이 하나 갖고 싶다. ‘문화예술인 나와라 뚝딱’하면 문화예술인이 콩나물 자라듯 길러졌으면 좋겠다. 그리만 된다면야 어려서부터 문화예술에 대한 감성과 체험이 있는 환경 속에서 키우느라 긴 시간 허비할 필요가 없다. 기다려주고 격려해주며 키울 일도 없다. 당연히 국보인 문화유산을 홀랑 태워먹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야 문화유산 복원을 잘못한 사람들과 복원비 보다 홍보비를 수십 배나 더 지출한 사람들도 문화예술은 어떻게 형성되고 성장하는가를 알 필요가 없다. 또, 문화예술은 어떻게 수용되고 변화하는가를 공부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정신적인 자생력이 돈이나 권력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도깨비 방망이 하나 갖고 싶다. ‘문화경영 나와라 뚝딱’ 하면 사람들의 문화 경영에 대한 개념이 그 자리서 생겼으면 좋겠다. 그리만 된다면야 돈 뒤에 숨어서 은근슬쩍 문화예술을 왜곡하거나 길들이려는 사람들이 없어질 것이다. 문화예술을 정량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고 고무줄 자를 들고 달려드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다. 또, 소속 회원들의 머릿수로 단체의 역량을 계산하려는 사람들이 없어질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야 예산을 주는 사람도, 예산을 받는 사람도 딱할 일이 없을 것이고, 보이지 않는 손이 지역문화예술의 색과 방향을 결정할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문화예술인 묵묵히 창작에 몰두그러나, 도깨비 방망이는 도깨비 나라에 있고 여기는 사람의 나라여서 그리 될 수가 없다. 문화예술을 하는 사람은 지금처럼 통장 바닥을 자주 긁어야 하고 외롭고 쓸쓸할 것이다. 애면글면 내놓은 작품은 지역문화예술이라는 이유로 은근히 무시당할 것이다. 아이들은 문화예술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문화유산은 아무나 훼손할 것이다. 가시적인 효과를 위해 홍보비가 복원비를 앞지르는 행정가들의 눈속임을 견뎌야 하고, 돈을 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품 색과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히 창작에 몰두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유전자엔 그래도 인간세상을 사랑하는 신의 입김이 깃든 것일까?△김영 시인은 전북시인협회장을 맡고 있으며 만경여고 교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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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7 23:02

대체 무엇 때문에 일을 그르치려 하는가

세상에는 자기중심의 세계에 갇혀 사는 절대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외부 문화와 새로운 기준을 배척한다. 상대의 것이 옳더라도 오로지 자존을 위해 기어이 배척하거나 비난하는 세력들이다. 또 다른 세력이 존재한다. 문화 사대주의자들이다. 스스로 자기문화를 비하하며 앞서있다고 믿는 외부 문화에 대한 동경과 맹신이 지나쳐 열렬한 지지를 보내거나 추종하는 부류다. 하지만 인류 문화는 일원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제각기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그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보는 문화 상대주의자도 존재한다. 지역 고유정서 실종 공연 보듬기 그만인류가 각자의 삶을 운영하는 보편적 행보에 종교가 빠지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확신하는 가치에 기대어 상대를 우습게 여기며 계도와 구원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다. 헌데 적어도 사후 세계를 담보하는 종교 간의 갈등보다 더한 일들이 지금 전북에서 벌어지고 있다. 전북을 대표하는 브랜드공연이 막 시연회를 끝내고 수많은 사람의 질타를 받고 있음에도 아집인지 맹신인지 모를 자기 확신에 가득 차 귀를 닫을 태세다. 문화 사대주의의 절정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구성원이 서울 사람들로 이루어져 지역의 고유정서와 귀중히 여겨져야 하는 익숙함과 독창성의 삼중주가 실종된 공연을 보듬기에 바쁜 것이다. 이런 공연이 전북 대표 브랜드 공연이라는 이름을 버젓이 달고 행해지는 것을 지켜 봐야하는 암울한 시점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애써 지역예술을 지키며 능력을 배양해온 이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모멸감을 안겨주면서까지 내세울만한 대안의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한 지원을 해준 적도 없고 기껏 이벤트사에게나 맡겼던 짧은 시도에 실망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겠지만, 적어도 지역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유를 묻고 싶고, 그 과정이 있었다고 대답한다면 일을 추리는 과정에서 요식행위에 해당하는 통과의례의 소모품으로 지역 예술가들을 전락시킨 이유를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길 바란다. 지금의 선택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고 시도다. 문화 사대주의에 빠질 경우 문화 주체성은 상실되고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해당지역에 침투하려는 그들의 전략에 휘말리는 꼴을 당할 뿐이다. 더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고 더 나은 형태로 운영하고 싶은 것은 누구든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관하여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주체의 문제인 것이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그것을 더 잘 이해하고, 누가 더 많은 이해를 구할 수 있는지 답은 뻔하다. 지금 대한민국 지역사회는 서울 문화의 종속자와 다른 이름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왜 고유의 문화와 능력을 가진 전북마저 굳이 그 열등한 답습의 대열에 끼어 들려하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독점현상은 문화의 표준화와 획일화를 가중시킬 뿐이다. 그건 소비의 동질화를 일으키고 지역의 고유성을 사라지게 만든다. 우리만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으면 이 이상한 흐름에 우리는 구경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주체성 인식하고 받아들여야편견은 편견을 낳고 공감을 획득하지도 못한다. 중요한 것은 구성원의 주체성이다. 기어이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라도 비판적인 관점을 취한 다음에 받아들여야 한다. 무조건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고 최대의 지원을 한 뒤에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우리의 것을 중심에 두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것의 소중함을 직시해야 된다. 우리 것이 없이는 우리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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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31 23:02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의 진정한 의미

유네스코가 문화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현대 문명에 밀려 사라지는 소중한 유산을 지켜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무형문화유산 목록을 등재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다. 우리나라는 그 첫 해인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의 등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판소리, 강릉단오제, 강강술래,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영산재, 남사당놀이, 처용무, 가곡, 대목장, 매사냥, 택견, 한산모시짜기, 줄타기, 아리랑에 이어 지난 5일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8차 유네스코무형유산위원회에서 김장문화가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됨으로서 총 16건에 이르는 인류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보호받지 않으면 사라질 무형유산본인은 지난 7월부터 본 기고를 통해 짧고 부족한 지면이지만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어 이제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넘어 세계인들이 함께 보존하고 지켜 나아가야 할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의미 등을 살펴보았다. 공교롭게도 지난 5일 새롭게 우리의‘김장문화’가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경사를 맞게 되었고,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던 나에게도 더욱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인류무형유산 등재가 마냥 좋기만 한 일일까?’‘왜 이렇게 많은 유산이 등재 되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함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기준을 살펴보았다. 기준에는 다양한 조건과 요건이 있지만 그 중 눈에 띄는 한 가지 기준이 있었다. 그 하나는 바로 ‘사라져버릴 수 있는 문화유산의 보존과 보호’라는 기준이었다. 이는 바꾸어 이야기하면 이미 그 무형유산 자체가 보호 받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는, 동식물로 비유하면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멸종위기종’ 만큼이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등재된 김장문화만 하더라도 겨울철 음식문화와 관련된 우리 민족의 독특한 생활양식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점이 대부분이기 하지만, 한국인들의 식생활문화와 주거양식 등이 바뀌면서 점차 대한민국의 가정에서 김장을 하는 가정이 줄어들면서 김장문화가 점차 퇴색되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점도 인류문화유산 등재 권고 이유 중 한 가지로 작용하였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동식물종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들이 스스로 자연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순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의 자연파괴와 난개발, 무차별적 자연훼손 등 인위적 요인으로 인한 멸종위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라져 가는 동식물에 대해 무감각하며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가치 있는 것들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히 자연에서 사라져 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극한으로 그들을 내몰고 있다. 우리 문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대화·세계화라는 거대한 사회적 물결과 흐름 속에서 우리 전통문화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아름다움과 정신문화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나 고민 없이 ‘남’의 생각과 ‘남’의 옷을 내 것처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입으며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는 소홀히 함으로써 ‘멸종위기’로 내 몰았던 것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세계인과 공유해야 할 우리문화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의 등재는 정말 자랑스럽고 우리가 꼭 보존해야 할 세계인의 인류문화유산임으로 이를 널리 알리고 자랑하며 보존해야 함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그에 앞서 반드시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함께 공유해야할 것이 있다. 유네스코 등재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 우리가 그것들을 바라보며 가져야할 사회적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하는 진정한 문화적 가치가 무엇인지! 깊은 고민과 성찰 후 정제(精製)되어 나온 결정(結晶)!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세계인과 함께 공유해야 할 진정한 의미의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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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4 23:02

조금은 더 불편하게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엔 낯선 먼 곳에 자동차로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수였다. 지도를 따라 가다가도 중간에 차에서 내려 길을 물어야만 하기도 했다. 여러 번 도상훈련을 했음에도 길을 잘못 들어 고생한 경험도 있다. 그 시절엔 어떻게 살았을까? 얼마나 비효율을 견디며 귀찮은 일들을 감내해야 했었을까?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우리에겐 친절하기 그지없는 내비게이션이 있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편리한 도구를 만들 수 있었을까, 지름길로 안내해 줄 뿐만 아니라 과속단속 장비가 있는 위치까지 알려주어 과속을 하다가도 단속 카메라 앞에서 속도를 줄이게도 해준다. 신기하기만 하다. 친절한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좌회전하라고 하면 좌회전하면 된다. 유턴하라 하면 유턴하면 된다. 어디를 가든지 길을 헤맬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능소능대하다. 내비게이션에게 빼앗긴 것은 없는가“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인용한 글은 헝가리의 철학자 게오르그 루카치가 쓴 〈소설의 이론〉 첫머리에 나오는 부분이다. 어쩌면 별빛에 지도를 읽으며 별빛을 따라 여행을 하던 시대가 행복했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불편하고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이며 많은 시행착오를 각오해야만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행복했었다고? 무슨 뜻일까?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별을 보고 가야 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과 우주와의 총체적 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의 의미는, 오늘날처럼 기계문명 속에서 그것이 제공하는 편리함 안에서만 살아가려는 대신에, 인간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사회와 자연과 우주와 통섭하며 그것을 몸으로 읽어내며 살아가는 기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자. 내비게이션에게 빼앗긴 것은 없는지. 오직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대로 꺾고 틀고 늦추고 돌고 멈추고 하다 보니 주객이 바뀌지는 않았는지. 길은 단순히 목적지를 향해서 뚫린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다. 길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일 수 있다. 그 안에 인간이 쌓아놓은 문화와 역사가 오고가고 길 밖으론 또 다른 세상이 길에 면하여 펼쳐져 있다. 길 위엔 나와 동시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나간 시간의 인간들의 발자취도 새겨져 있는 것이다. 물론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길 위에 펼쳐진 문화와 역사와 인간과 풍광을 모두 체험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긴 하지만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서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는 여행이란 더욱더 이것들을 접하기는 난망하다. 실패·방황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그렇다고 오늘날 번잡한 삶 속에서 내비게이션의 역할이 무용하다는 말은 아니다. 내비게이션이나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문명의 이기에 지나치게 의존해 살아가는, 그래야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고와 그런 삶의 모습이 얼마나 비주체적인가, 나아가 인간 스스로를 소외하는 일인가 말하고자 예를 들었을 뿐이다. 기계 따위가 답을 다 알려주는 삶은 얼마나 재미 없을 것인가, 좀 느리고 좀 불편하고 좀 덜 효율적이면 어떤가? 인생에 지름길이 많으면 생이 짧다는 농담 아닌 농담도 있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을 기억한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수와 실패와 방황을 겪으며 삶은 더 풍요롭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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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7 23:02

김장문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축하하며

한국의 ‘김장문화’(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 in the Republic of Korea)가 지난 5일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8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인류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으로 등재됐다.UN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보건기구(WHO)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국제 식품규격 위원회(Codex·코덱스)에서는 주원료인 배추를 절임 하여 고춧가루, 마늘 등 양념류를 혼합하여 젖산 생성에 의한 적절한 숙성과 보존성이 확보되도록 포장되기 전후에 저온에서 발효된 제품으로 김치를 정의하고 있다.가족 중심 대량 김치 담그는 일 드물어하지만 김치가 한국의 전통 음식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외국인들이 더 많다. 한식(韓食) 세계화를 위해 이곳저곳 뛰어다니면서 자주 들은 질문이 “도대체 한국 전통 음식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김치와 같이 채소를 절이거나 발효시키는 식품은 다른 나라 문화권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비슷한 시기에 대량으로 김치를 담그는 일은 드물다. 무형유산위원회에서도 이 점에 주목해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세대를 거쳐 내려온 김장이 한국인들에게는 이웃 간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한편 그들 사이에 연대감과 정체성·소속감을 증대시켰다”면서 “김장의 등재는 비슷하게 자연재료를 창의적으로 이용하는 식습관을 가진 국내외 다양한 공동체들 간의 대화를 촉진할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등재를 결정했다.이로써 우리나라는 종묘제례 및 종묘 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처용무, 가곡, 대목장, 매사냥, 줄타기, 택견, 한산 모시 짜기, 아리랑, 이번에 김장문화 등 총 16개의 인류무형유산 등재 목록을 가지게 되었다.한편 현재까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전 세계의 음식 문화를 살펴보면 프랑스의 미식술, 그리스와 스페인 등 4개국의 지중해 요리, 멕시코 전통 요리, 일본 전통음식문화인 와쇼쿠 등 5건이며 우리나라의 김장문화가 6번째 등재를 하였다.이와 반면에 “김치가 인류무형유산인 것처럼 알려지면 상업화에 이용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특정 음식은 인류무형유산에 오를 수 없다는 유네스코 측의 발표는 음식문화의 독창성과 전통성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추세에 비춰 볼 때 전북지역 음식문화 자산의 발굴과 보존, 활성화는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를 제시한다. 전북의 음식이야말로 어느 지방도 따라올 수 없는 맛의 풍류와 멋의 전통, 나눔의 공동체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음으로써 오랜 세월 대대로 이어온 인류무형유산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도내 음식문화자산 발굴 활성화 시급김장 문화에 이어 또 다른 우리의 전통 음식이 인류무형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전통 음식의 원형을 찾아 복원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다.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로 지정된 전주는 그런 의미에서 특별하고 중요하다. 지역의 음식 문화를 보존, 발굴, 발전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해서 전북음식문화가 또 다른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토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음식 관련 행정, 학계,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활동과 역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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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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