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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무주반딧불축제' 자연특별시 무주로의 힐링여행

무주반딧불축제는 ‘자연특별시 무주’의 생태적 가치를 담은 축제로 무주군 대표 브랜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는 ‘자연특별시 무주방문의 해’를 맞아 사람과 자연 모두에게 힐링이 되는 여행을 선사한다. 특히 일회용품·바가지요금·안전사고 없는 3무(無)를 기반으로 ‘에코투어리즘 축제(환경보호와 지속 가능한 여행을 결합한 축제)’를 선보일 예정이어서 더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바가지요금·일회용품·안전사고 노(NO), 3무(無)는 기본 저렴한데 푸짐하고 깨끗한데 맛있기까지 한 축제 음식관과 간식 부스들이 날마다 방문객들을 기다린다. 가격만 착한 게 아니라 맛과 품질, 위생과 청결까지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계획으로 “바가지요금”을 뿌리뽑기 위한 민관 합동점검반도 운영한다. “일회용품 없는 축제”는 친환경 다회용기 사용으로 선도할 계획이다. 또 반딧불 안전지킴이 운영을 통해 축제 현장을 점검하고 위험 요인을 제거하는 등 “안전사고 없는 축제” 만들기에 주력한다. 3무(無)로 전국의 축제를 변화시킨 선두 주자다운 면모, 기대해도 좋겠다. 반딧불이와 친환경 실천, 1일 1에코(ECO) 9일간 친환경을 실천할 수 있는 ‘에코 파노라마(ECO PANORAMA)’를 운영한다. 현장에서 즐기는 친환경 실천 활동 인증 프로그램으로 ‘워킹 인(IN) 무주(하루 3천 보 걷기)’를 비롯해 ‘반딧불축제 참여’, ‘반디 서약(친환경 활동 동참)’, ‘플로깅(축제장 내 쓰레기 줍기)’, ‘재사용(장바구니, 텀블러 및 다회용기 사용 부스 이용)’, ‘에코 퀴즈(친환경 실천 관련 OX 퀴즈), ’활동 사진(무주반딧불축제 행복한 순간)‘, ’이벤트 공유(SNS공유)‘ 등을 인증하면 된다. 이외 ’방구석 재활용 마트‘ 등 친환경 실천 의미를 담은 프로그램을 신규로 편성했으며 아이디어 공모, 반디 폐품 & 재활용 과학작품 경진대회 등도 개최한다. 태양광·폐현수막 그늘막·재활용 수거함, 친환경 공간 축제장에서 쓰는 에너지원과 공간, 자재 등도 남다르다. 한풍루 수목등, 야광 조형물 등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친환경에너지(태양광 발전)로 사용하고 방문객들이 무더위를 피할 그늘막(최북미술관·예체문화관 광장)도 지역 내에서 수거한 폐현수막으로 일부 제작했다. 또 재활용쓰레기 수거함 2~3개를 설치해 그 자체를 조형물로 활용한다는 계획으로 반딧불축제를 보며 분리수거도 하고 근사한 활동가가 돼보는 것도 보람 있겠다. 폐 건설자재로 만든 테이블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 그리고 사진 한 장, 찰칵! 즐겁고 의미 있는 한 때로 간직해 보자. 주민들이 만들고 다 같이 즐기는 축제 무주반딧불축제는 무주군민이 함께 만들고 같이 즐기는 축제로, 올해 특히 주민 동참이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반딧불축제제전위원회 대의원들 50명이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직접 뛴다. 매일 현장을 돌며 만일의 안전사고에 대비하는 한편, 안전을 저해한다고 판단되는 상황 및 시설에 대해서는 즉시 조치할 계획이다. 이외 개막퍼레이드를 비롯한 전통놀이 시연, 교통 정리, 청소 및 안내 등의 자원봉사활동에 동참하고 축제 음식관과 간식 부스에도 참여해 무주의 맛과 정을 보여줄 예정이다. 무주다움으로 친환경 가치 공유, 글로컬(Global+Local)축제 무주반딧불축제는 2024 피너클 어워즈 및 아시아축제도시 콘퍼런스에서 환경보호와 지속 가능한 여행을 결합한 축제로 인정을 받아 ’에코투어리즘 축제‘에 선정된 바 있다. 무주반딧불축제만의 생태적 가치와 영향력으로 세계 축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과제를 제시한다는 방침으로 지난 7월에는 세계 3대·아시아 최대 맥주 축제인 중국 칭다오국제맥주축제의 러브콜을 받아 교류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이번 축제에서는 친환경적인 지역 특성을 살려 세계적인 축제로 올라서겠다는 무주반딧불축제 포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황인홍 무주군수 "무주반딧불축제는 자연과 사람의 공존을 지향하는 환경축제입니다." 황인홍 무주군수는 "환경지표 곤충이자 천연기념물인 ‘반딧불이’를 소재로 환경의 중요성을 알리고 보전의 필요성을 공유하는 등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에는 바가지요금·일회용품·안전사고 없는 3무 축제로 전국 축제장에 일대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고도 자부한다"며 "특히 9일간 42만여 명이 방문했는데, 한 건의 안전사고 없이 진행된 축제로 행안부 차관 주제 전국 시도지사협의회에서 지역축제 모범사례로 전파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올해는 ‘3무(無)’에 더해 ‘친환경축제’의 진수를 보여드릴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황 군수는 "반딧불이와 함께 하는 9일간의 특별한 경험 하실 수 있다"며 "축제의 성공 개최를 위해 더큰 기대와 응원을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유송열 무주반딧불축제 제전위원장 "올해는 환경보호와 여행을 결합한 에코투어리즘 축제를 기대하셔도 좋겠습니다." 유송열 무주반딧불축제 제전위원장은 "친환경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넘어 방문객 누구라도 친환경 실천에 동참하도록 할 예정"이라며 "축제장 내 쓰레기 줍기 등 인증 프로그램도 진행한다"고 말했다. 이어 "축제장 운영에 필요한 전력을 태양광 발전으로 한다거나 분리 수거함, 폐현수막을 활용한 그늘막, 폐 건설자재로 만든 테이블로 축제장 곳곳을 채울 것"이라며 "친환경 실천 분위기를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바가지요금을 없애기 위해 입점 업체를 공개 모집해서 음식 가격과 양을 사전 조율하고 행사장 내 모든 음식 부스에서는 다회용기를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기획
  • 김효종
  • 2024.08.28 15:14

“고창군이 가면(만들면) 곧 길이 된다”

민선 8기 심덕섭 고창군정이 전국 지자체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국내 최초, 전국 최초, 전북특별자치도 최초 등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지역소멸에 직면한 농촌지자체의 새로운 생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다. ‘군민행복! 활력고창!’을 향한 고창군의 도전 스토리를 살펴봤다. ‘국내 최초’ 세계의 보물 7개 보유 고창군은 마침내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의 보물 7개를 보유한 국내 유일의 도시가 됐다. 고창군은 2000년 고인돌유적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시작으로, 2003년 판소리 인류무형유산 등재, 2013년 행정구역 전체의 생물권보전지역 지정, 2014년 인류무형유산 농악 등재, 2021년 고창갯벌 세계자연유산 등재, 지난해 고창·부안 서해안권 세계지질공원 인증, 무장포고문 등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까지 성공시켰다. 특히 고창군은 지난해를 ‘2023 세계유산도시 고창 방문의 해’로 선포하는 혁신사례를 보여줬다. 이전 광역단위(전라북도 방문의 해)나 주변 시단위에서는 4~5년 시차를 두고 진행됐지만 고창군에서는 첫 시도였다. ‘2023 세계유산도시 방문의 해’의 대성공으로 1000만 관광시대를 활짝 열었다. ‘전국 최초’ 농촌인력 인건비 조례 제정·농업근로자 기숙사 완성 고창군은 2023년 8월 1일 전국 최초로 ‘고창군 농촌인력 적정 인건비 운영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시행 중에 있다. 내·외국인 가리지 않고 9월에는 적정인건비로 남자 11만~13만 원, 여자 9만~11만 원을 제시했다. 조례는 폭등하는 인건비에 한숨 쉬는 지역 농가를 두고 볼 수만은 없어 행정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의무나 강제사항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 1년여를 맞는 현재 고창군의 인건비는 인근 타 지자체에 비해 다소 낮게 유지되고 있다. 전국 최초로 농업근로자 기숙사도 완성됐다. 대산면에 들어선 ‘농업근로자기숙사’는 총 25여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연면적 950.4㎡에 지상 4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공동 취사장, 다목적실, 2층부터 4층까지는 2인실 숙소가 들어섰다. 기숙사는 농촌인력이 부족한 지역에 주거제공이 어려운 농업인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됐다. 일을 마치고 도착하는 주차장부터 외부세척장, 입구에 비치된 개인 사물함, 1층에 마련된 샤워장은 농작업을 하고 돌아오는 근로자의 실제 동선을 반영해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전북자치도 최초 ‘삼성전자 고창스마트 허브단지’ 유치 꿈의 기업 삼성전자가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에 들어온다. 삼성전자㈜는 고창신활력산업단지 18만 1625㎡(축구장 25개 규모)를 매입해 자동화 기술이 접목된 첨단 물류센터를 건립한다. 물류센터는 2025년 상반기 착공해 2027년 내 준공할 계획이다. 아울러 공사 중 건설·기계장비 등 관내 기업 및 인력의 우선 활용·채용도 기대된다. 고창군민들은 ‘삼성’이 들어온다는 것에 큰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각 모임·단체별로 거리 곳곳에 대형 현수막을 내걸고 세계 초일류 기업 삼성전자의 투자유치를 환영하고 있다. 특히 내년부터 무장 영선고등학교의 AI 특화 직업계고(가칭 전북인공지능고등학교)로 교명 변경이 확정됐는데, 삼성전자의 스마트 허브단지와 연계해 AI 핵심인력 양성의 중추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북자치도 최초 ‘국립고창치유의 숲’ 운영 산림청 산하 한국산림복지진흥원이 운영하고 있는 ‘국립고창치유의 숲’은 고창읍 고수면 일대 산림치유자원을 활용해 산림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전북특별자치도 최초의 국립치유의 숲으로 개장했다. 고창치유의 숲은 제1치유센터와 제2치유센터로 구분돼 있다. 최근에는 14개 읍·면 사회단체와 함께 치유 힐링에 나서면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고창의 편백림은 총 33만 평 부지에 무려 9만 평 가량의 편백나무가 식재돼 지역주민뿐만 아니라 관광객 누구나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고창군 다수 정책 타 지자체 모범 이외에도 고창군은 △사회복지 종사자 처우개선 용역(전북 최초) △소비자가 선정한 품질만족대상(전국 최초, 고창 미니수박) △국토교통부, 터미널 도시재생 혁신지구 시범사업 선정(전국 군 단위 최초) △저탄소 축산물 인증시범사업 농가 최다 배출(전국 최다) △전국 최대 규모 바지락 생산지(전국 최대) 등 과감한 도전과 열정으로 전국 첫 번째 타이틀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고창군의 전국 최초는 타 지자체 정책의 모범이 되고 있다. 실제 지난해부터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보존·활용 정책을 배우기 위해 전 세계 각국 대사관과 교육 공무원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대기업을 감동시킨 기업유치 전략은 적극행정 모범사례로 전국에 소개되고 있다. 특히 ‘전국1호 농업근로자 기숙사’는 전남 나주 공무원교육원 교육생들을 비롯해 전국 외국인계절근로자 유치도시 30여 곳에서 기숙사 시설과 운영 노하우를 배워가며 주목받고 있다. 심덕섭 고창군수는 “지역소멸을 막아내고 군민행복 시대를 열겠다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 첫 번째 정책을 만들고 성공스토리를 쓸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혁신을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

  • 기획
  • 박현표
  • 2024.08.27 15:53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실크로드의 미스터리 보물 (3) 흉노 무덤에 웬 그리스 알몸 여인?

흉노 무덤 ‘노인 울라(Noin-Ula)’에서 출토된 은제 팔레라(Phalera,말 장신구)에 새겨진 나체의 그리스 여성이 말한다. “저는 순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Artemis)예요. 외설스럽고 색을 밝히는 사티로스(Satyr)가 싫다는데 저를 자꾸 유혹해요. 또 옆에는 흥분한 상태의 남근을 드러낸 헤르메스(Heres)도 있어요. 저는 원래 그리스(로마)에서는 의례용 고급 식기의 부착물이었는데, 흉노 사람들이 중국 상품과 교환해 가지고 와서는 말 장신구가 되었어요.” △ 흉노 지배층 무덤 ‘노인 울라(Noin-Ula)’ 흉노(匈奴)는 BC 3세기부터 AD 1세기까지 동몽골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한 유목 전사들이었다. 노인 울라(Noin-Ula)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Ulaan Baatar)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유적지로 200개 이상의 흉노 무덤이 흩어져 있다. 노인 울라 고분들은 도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호화 장신구, 청동 유물, 도기, 직물, 도구, 의복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말, 낙타, 노루)의 뼈와 기장 씨앗 등 많은 물건들이 출토되었다. 또 칠기, 비단과 같은 물건의 존재는 한(漢)나라 시기 중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은제 팔레라(Phalela), 직물과 같은 물품은 그리스, 박트리아 (Bactria), 중앙아시아 등 다른 지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 알몸 여인의 은제 팔레라(Phalera) 팔레라(Phalera)는 은으로 만든 말 장신구를 말한다. 나체 여인이 마치 조각처럼 높게 부조된 이 은제 원반은 흉노 시대인 BC 1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원반의 지름은 143.1mm, 폭의 테두리는 6.4mm이다. 내부 원판은 거의 순수한 은으로 만들어졌고, 합금하였으며 4개의 은 못으로 판에 부착하였다. 판의 외부 가장자리를 따라 10개의 불규칙한 원형 관통 구멍이 있다. 제작 기법은 판의 뒷면을 두들겨 부조한 후 도금하고 아말감 처리를 하였다. 매장실 내 위치로 보아 말 장신구의 일부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원래 그리스(로마)에서는 장식용 식기나 접시 등에 붙어있던 것을 흉노 고위층은 말 장신구에 사용하였다. △ 알몸 여인의 정체 ‘아르테미스 (Artemis)’ 은제 팔레라에 새겨진 알몸 여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에 대해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팜므 파탈’ 옴팔레 여왕이 헤라클레스를 노예로 부리면서 희롱하는 모습이라는 설이 있지만 헤라클레스 도상은 애당초 꼬리가 없으므로 따르기 어렵다. 이 여인은 출산, 육아 및 순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Artemis)이고, 남성은 금박 말꼬리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사티로스(Satyr)로 추정된다. 이 은제 원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기를 드러낸 채 여성을 유혹하는 사티로스의 오른쪽 무릎에 앉아 있는 여성을 높은 부조로 묘사하고 있다. 여성은 왼손으로 사티로스를 밀어내고 있으며, 그녀의 손가락과 손이 그의 턱에 닿아 있다. 이러한 동작 묘사는 꽤 전문적인 것이며, 취한 사티로스의 모습은 위엄 있는 여인 이미지와 대비된다. 그녀의 구부러진 오른쪽 다리를 덮고 있는 베일의 한쪽 끝은 다리 사이로 부드럽게 주름지어 늘어져 있다. 다른 쪽 끝은 그녀의 왼쪽 팔뚝을 두 번 감싸고 등 뒤로 넘긴 후 솟아 있고, 염소 가죽이 여성의 어깨 위로 넘어와 오른쪽 가슴을 덮고 있다. 여인의 입은 작고 도톰한 입술이 꽉 다물어져 있으며, 머리에는 금박 왕관(diadem)으로 머릿발을 묶고 있다. 또 여인 바로 옆에는 솔방울로 장식된 나무 지팡이가 있는데, 이는 갑옷 역할을 한다. 지팡이 옆 작은 금박 인물은 헤르메스(hermes)로 발기된 남근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운동선수 체격의 수염 없는 젊은 남성은 동물 가죽 위에 기대 누워있다. 그는 왼손을 구부려 기대고 다리를 벌리고 있다. 남자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콧마루 옆 두 개의 깊은 주름으로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남성은 금박 담쟁이덩굴 화환(gilt ivy wreath)을 쓰고 있는데 황금색 뾰족한 끝이 반짝인다. 한편 그의 등 뒤로는 말꼬리의 금박 끝부분이 부조로 선명하게 보이고, 남성은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잡고 있는데 아마도 포도주를 담는 가죽 부대일 것이다. △ 흉노 무덤의 다원적 성격 흉노 제국 전성기 약 250년 동안 중국은 당황했고 평화롭지 못했다. 흉노는 중국의 부를 탈취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흉노에 유입되고, 그들의 기술과 문화가 영향을 미치면서 중국화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었다. 유목 민족들은 일반적으로 땅을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18미터 깊이의 노인 울라 고분은 중국 기술과 장례 의식의 영향이었다. 마차, 칠기, 비단 등 흉노 귀족 무덤 출토품의 3분의 2가 중국과 관련된다. 중국은 흉노에 옻칠된 마차를 선물했는데 실제로는 유목 전사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공물(貢物)이었다. 한편 흉노는 실크로드를 통제했고, 서방과의 무역에서 중국의 고급 상품을 가지고 중개자 역할을 했다. 중국 상품의 대가로 서방의 희귀품들이 교환되었다. 노인 울라에서 출토된 나체 여신의 은제 팔레라는 그리스(로마) 어딘가에서 제작된 의례용 식기의 일부분이었으나, 흉노에 들어와서는 말 가슴에 걸리게 되었다. 이처럼 흉노 무덤은 중국에 대해서 말해줄 뿐만 아니라 서양 문명의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 기획
  • 기고
  • 2024.08.26 15:28

"지역발전 구심점"...남원글로컬캠퍼스로 재도약 꾀하는 남원시

남원시가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도약을 시작한다. 옛 서남대 부지를 활용한 '전북대 남원글로컬캠퍼스' 설립이 그것이다. 시는 민선8기 최경식 시장을 중심으로 남원글로컬캠퍼스의 2027년 개교를 목표로 새로운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6년 전 서남대 폐교 이후 지속된 침체와 쇠퇴의 역사를 딛고 남원글로컬캠퍼스가 인구 유입의 거점으로서 지역에 활력을 가져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기대에서 절망으로...6년째 방치된 '애물단지' 서남대 서남대학교는 남원 시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지난 1991년 개교했다. 인구 10만이 안되는 작은 농촌도시에 50명 정원의 의대를 갖춘 종합대학이 문을 열면서 인구 유입의 거점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 같은 장밋빛 전망은 2018년 2월 서남대가 폐교되면서 큰 충격으로 돌아왔다. 설립자의 교비 횡령 등으로 인한 경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뒤 교육부의 폐쇄 명령에 따른 결과였다. 서남대가 폐교되고 캠퍼스가 황폐화되자 학교 앞 상권은 몰락했다. 2000여 명의 젊은 학생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남원시내는 점차 활력을 잃고 쓸쓸히 쇠락해갔다. 특히 서남대는 도서관 건물이 15도 기울어 있을 정도로 부실 공사 투성이인 탓에 마땅한 활용 방안을 찾기도 어려웠고 재정자립도 최하위인 시에서 200억 원이 넘는 토지 매입에 선뜻 나설 수도 없었다. 이에 따라 한때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 부지로 거론되기도 했던 서남대는 6년째 방치돼 잡초만 무성한 도심 속 흉물로 전락해 왔다. 지역 현안 1순위였던 서남대 활용...남원글로컬캠퍼스로 답을 찾다 시는 민선8기 들어 서남대 부지 활용 방안 마련을 지역 현안 1순위 과제로 꼽고 지난해 11월 교육부 '글로컬30' 사업에 선정된 전북대와 손을 잡았다. 전북대 남원글로컬캠퍼스 유치는 30여 년 전 서남대 설립 당시에 못지않은 지역사회의 활력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시의 판단이다. 최경식 시장이 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적극 추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는 2027년까지 국비 등 604억 원을 들여 서남대 부지에 전북대 남원글로컬캠퍼스를 설립한다. 이를 위해 지난 3월 매입 계약을 체결하고 205억 원의 예산을 편성해 서남대 캠퍼스 40만㎡와 건물 모두를 사들였다. 시는 2026년까지 시설 증개축을 마무리하고 이듬해 교욱부의 승인을 받아 4년제 기준 유학생을 포함한 1200여 명 규모로 문을 열 계획이다. 계획대로 추진되면 시와 전북대는 이곳에 지역 전통문화를 활용한 K-컬처 학부를 비롯해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한국어학당과 K-팝 학과 등을 신설해 전통과 글로벌 문화를 선도하는 대학을 표방한다. 특히 화장품과 전통목기 같은 남원 특화산업 창업 공간을 조성하고 항공·도심 항공교통(UAM), 농생명 바이오 관련 학과 등을 설치해 지역 미래 산업 성장에 긍정적 효과를 줄 것으로 기대한다. 남원글로컬캠퍼스 설립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자체가 앞장 서 폐교를 활용한 지역재생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현재 시는 서남대 미준공 건축물 철거와 내부 환경정비 사업을 추진 중이다. 또 원활한 외국인 유학생 확보를 위해 전북대와 협력해 유학생 수요를 파악하고 비자 발급을 완화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시는 남원글로컬캠퍼스를 통해 남원에 유입된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지역에 일자리를 창업하거나 근로자로서 그대로 머무는 것이 지속 가능성의 관건이라 보고 정주여건 조성과 기업유치를 위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한다는 방침이다. 최경식 남원시장 "지역과 대학 상생의 기회 주어진 것은 기적...최선 다해 성공시키겠다" 최경식 시장은 "후보 시절부터 폐교 서남대를 어떻게 재생시킬까 고민해왔는데 전북대 남원글로컬캠퍼스 설립을 통해 지역과 대학이 상생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 남원에 주어진 것은 기적이라 생각한다"며 이번 사업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어 "남원글로컬캠퍼스에 'K-컬쳐학부'를 신설해 최근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K팝 전문인력 양성의 메카로 특별한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며 "이러한 강점을 토대로 향후 남원 국제 K팝 국제학교 설립에도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최 시장은 "남원글로컬캠퍼스가 설립되면 외국인 학부생을 포함해 산업인력과 창업 입주기업 등 2000여 명의 인구 유입 효과가 기대되는 만큼 우리 시에서는 대학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대학이 완성되도록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 기획
  • 신기철외(1)
  • 2024.08.25 16:26

[참여&공감 2024 시민기자가 뛴다] 디지털 복원으로 되살아난 익산 미륵사

익산 ‘미륵사지’는 행정구역상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에 소재하고 있다. 백제 무왕 40년(639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백제를 대표하는 최대 규모의 호국사찰로 사적 제150호(1966.8.30)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백제역사지구)으로 2015년에 등재되어 세계의 관람객이 찾아오는 유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미륵사지는 1295만8688㎡의 광활한 대지 위에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후대까지 경영되었던 수 많은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어 지금도 지속적인 보수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최근 2019년에는 미륵사지 석탑 보수공사가 완료되었고, 2020년에는 국립익산박물관이 개관됨에 따라 현재는 다소 정리된 관람시설과 콘텐츠가 구비되어졌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의미가 막대하고 가람내 체계적 정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륵사에 방문해보면 연원이 불확실한 연지와 당간지주 그리고 2개의 석탑만이 덩그러니 서 있고, 관람 동선에 따라 이동하다 보면 약간의 정비된 유적의 모습들 예컨대 당시 건축물의 웅장함을 증거하고 있는 심초석이 보이도록 정비된 금당지와 널따란 강당지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이런 친절한 배려로도 과거 미륵사의 진정성있는 전체적인 건축물이 상상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관람객이 현장을 방문했음에도 미륵사의 온전한 모습을 확인하기에는 부족한 상황인 것이다. 이는 백제기 유적이 가지는 공통된 문제점으로 백제 유적 대부분은“땅 아래에서 피와 땀으로 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백제기 대부분의 유물과 유적이 고고학에서 밝혀졌다는 자조적인 평가에서 나온 말이며 또 “고대를 연구하는 것은 천재적 상상력이 있는 학자나 하는 영역이다”라는 말도 있다. 이는 실물로 남아 있는 고대 백제기 문화유산이 거의 없어 약간의 역사적 실마리(문헌, 유구 등)를 통해 합리적 추론에 의한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이유로 유적의 복원은 이제 필연이 되었다.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을 기반으로한 정보통신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문화유산의 가시적 표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지난해 디지털 대전환 시대 변화에 따라 미륵사 건축유적에 대한 디지털 복원연구를 추진하게 되었고 이런 노력은 20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국정과제(62-5)로 선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올해에는 그간 추진됐던 미륵사복원기초연구(2008∼2013년), 미륵사 복원 기본연구(2013년∼2023년) 등 그동안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미륵사 중문 디지털 복원과 콘텐츠 개발'이라는 증강현실 콘텐츠를 구축하게 되었고 이를 일반인에 공개할 수 있게 됐다. 이 콘텐츠는 건축물의 터만 남겨져 있던 현장에서 증강현실로 과거 미륵사의 건축유산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콘텐츠로 그간 양주 회암사지와 파주 혜음원지, 부여 정림사지 등에서 시도 된 바가 있으나, 이번 미륵사 디지털 복원의 경우는 20여 년 간 지속적으로 추진된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유적의 발굴과정 및 건축물 연구추이를 살펴보는 등 유적의 진정성있는 복원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 더불어 중문의 다양한 건축부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증강현실 상황에서 촬영을 하고 이를 메일로 전송할 수 있는 기능도 새롭게 탑재하고 있다. 미륵사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는 크게 3단계로 기간을 구분하여 추진되는데 사업은 2033년경에 마무리될 것으로 알려졌다. 1단계는 2023~2025년까지로 미륵사 3원영역(중문, 회랑, 목탑) 복원이 대상이며, 2단계는 강당영역의 건축물이 2026~2028년까지 추진될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3단계는 2029~2038년까지 승방영역과 기타구역을 복원할 예정으로 이후 복원 결과물은 일반인 공개는 물론 전문가에게 연구자료로 제공하고 더 나아가 대학의 교재로 제공할 수 있도록 콘텐츠 수준을 업그레이드 한다는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2038년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이다.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고 도읍을 정한(538년)이래 15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런 이유로 백제역사지구 관련 대부분의 정비계획은 이 기간안에 마무리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나름 동기부여가 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은 기간과 시간을 정해놓고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며 이 순간에 우리는 역사가 된다. 역사문화유산의 디지털복원이 우리 역사유적 복원에 필연적 단계가 되었다면 좀 더 강한 정책적 지원과 예산 투입이 필요해 보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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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1 14:31

[팔도건축기행] 화성행궁에서 '화령전'을 찾아야 하는 이유

요즘은 수원 밖에서도 유명해진 화성행궁의 바로 옆엔 행궁보다 덜 알려졌지만 더 중요한 건축물이 있다. 235년 전 화성행궁을 건립한 정조(조선 22대 임금, 1776~1800년 재위)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신 '화령전(사적 115호,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다. 임금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을 '영전'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전주한옥마을 근처의 경기전(태조 어진 봉안)과 이 화령전만 남았다. 현재의 화성행궁과 수원화성이 전국 방문객을 끌어모으고, 과거엔 정2품(지금의 장·차관 또는 도지사) 유수가 머물고 집무하는 유수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화령전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며 위상을 잃어가던 수원화성에 계속 순조와 헌종, 철종, 고종 등 모든 조선 임금들이 발길을 이어간 것도 화령전 때문이었다. 융건릉 능행차 길에 오른 임금들이 참배에 그치지 않고 매번 화령전을 찾아가 다시 한번 정조에게 잔과 절을 올린 작헌례(酌獻禮)를 치른 것이다. 화령전은 조선시대 왕실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창건 당시 원형이 대부분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아 5년 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2035호)로 지정됐을만큼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정부 정책에 따라 정조의 어진이 잠시 화령전을 떠나고, 병원·행사장·사무실 등 엉뚱한 목적에 쓰여 화령전이 낡거나 훼손될 때마다 수원시민들이 십시일반 성금과 힘을 모아 건물을 수리하는 등 화령전 지킴이를 자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수원시화성사업소 오선화 학예사는 "수원사람들에게 화령전은 곧 정조"라며 "그가 일궈낸 최고의 걸작 수원화성에 정조의 어진이 머물렀고, 지금도 머물고 있는 공간이 화령전이기에 건축물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다"고 화령전을 설명했다. 화성행궁을 방문한다면 화령전을 꼭 찾아야 하는 이유다. △역대 임금 모두 찾고, 백성에도 경사였던 화령전 화령전은 정조 승하 3개월 후 그의 할머니인 정순왕후의 명에 따라 지어졌다. 당시 정조의 장례(국장) 절차를 총괄한 총호사 이시수의 청을 정순왕후가 받아들였다. 정조는 생전에 부친인 사도세자를 가까이서 지켜보려고 자신의 초상화를 현륭원에 뒀는데, 나중에 정조의 묘를 현륭원 옆에 조성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조 어진을 다른 장소로 옮겨야 했다. 정순왕후가 별도의 전각을 지어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도록 하면서 1801년 4월 29일 화령전이 세워졌다. 건립에 참여한 400명 이상 각종 장인들은 쌀이나 포목 등의 상을 받았다. 처음 화령전에서 작헌례가 치러진 건 1804년이다. 11살에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가 15살 때 첫 능행차에 나서며 아버지의 어진을 찾아 잔과 절을 올렸다. 이후 왕세자까지 데리고 화령전을 방문하는 등 순조는 9차례나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서 예를 갖췄다. 그 뒤로는 헌종이 1843·1846년, 철종은 1852·1855·1860년, 고종도 1868·1870년 직접 화령전을 찾는 등 정조 이후 모든 조선시대 임금들의 능침(임금이나 왕후의 무덤) 친제(임금이 직접 지내는 제사)가 이어졌다. 이렇게 융건릉 능행차와 화령전 작헌례 등을 목적으로 수원화성을 방문할 때마다 임금들은 화성행궁에서 적어도 이틀을 묵었는데, 이는 지역 백성들에게도 경사였다. 임금이 대궐 밖을 나서는 '행행' 자체가 백성들의 요행을 뜻하기도 하는만큼 이 때마다 지역 백성들에게 여러 혜택이 내려졌다. △바로 인접한 이안청…온돌로 합자와 익실 관리 화령전과 같은 영전 건물은 조선시대 절기마다 선왕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어서 건축에도 각별한 격식을 갖췄는데, 화령전은 그 건축적 제도를 계승하며 고유한 특색까지 갖춘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2019년 제2035호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화령전은 1801년 건립 당시 정전(운한각)과 복도각, 이안청으로 구성되는 조선시대 영전 건물들의 건축제도 원형 그대를 유지하고 있다. 동시에 정전 실내에선 중앙에 어진을 봉안한 합자와 좌우에 갖춰진 익실의 구조를 갖추는 등 다른 영전에서 보기 어려운 특색을 지니고 있다. 건립 당시 화령전은 정전을 중심으로 이안청과 복도각이 연결돼 있고 정전 마당엔 내삼문에서 정전 월대까지 어로가 놓인 형태로 지어졌다. 마당 북쪽 담장에 난 동문을 나서면 재실이 있고, 동문과 정전 월대 사이에도 어로가 깔려 임금이 작헌례를 거행할 때의 동선을 드러낸다. 남쪽 서문을 나가면 위치해 있는 향대청과 전사청은 제례 때마다 물과 향, 제수 등 제사 준비에 쓰인 건물이다. 이안청은 정전을 수리하거나 그 밖에 변고가 있을 때 정전의 어진과 기타 서책, 기물 등을 임시로 옮겨놓기 위한 용도로 마련됐다. 정전 곁에 이안청을 두는 방식은 조선초기 다른 영전에서도 볼 수 있지만, 화령전의 이안청은 전주 경기전 등과 같이 담장 너머 별도의 구획된 영역에 위치한 게 아니라 복도각을 사이에 두고 정전과 이안청을 직접 근접하게 연결하는 방식을 갖추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여러 영전 가운데 화령전에서 처음 나타난 사례다. 화령전은 정전 건물 내부 평면 역시 다른 영전에서 보기 드문 형태를 나타내는데, 중앙에 합자를 두는 건 전주 경기전 등에서도 볼 수 있지만 좌우에 익실을 마련해 서책이나 관련 기물을 보관한 것은 색다른 특징이다. 특히 중앙 합자는 물론 좌우 익실의 바닥에 온돌을 설치해 5일마다 불을 넣어 습기를 제거하도록 했다. 이 온돌은 1872년(고종 9년) 왕명에 의해 마루로 고쳐졌으나, 건물 좌우 측면과 후면의 아궁이는 존치해 당시 정전에 온돌이 쓰인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화령전 지키는 첫걸음, 가치 제대로 아는 것" 이처럼 수원화성의 역사적 가치를 지켜내며 건축물로서의 가치도 드높인 화령전은 숱한 외력에 자칫 훼손될 뻔한 위기를 한 두번 겪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수원시민들이 화령전을 직접 지켜냈다. 화령전 안에 처음 봉안된 정조의 어진이 1908년 당시 정부 정책에 따라 덕수궁으로 옮겨진 이후 불에 타 사라지고, 다시 그린 어진을 2004년 모시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조의 어진이 떠난 화령전을 가장 먼저 멋대로 사용한 건 일제였다. 자신들의 근대문명 선전을 위한 병원(자혜의원)을 1910년 화령전에서 운영했다. 1915년엔 작약회란 조직이 화령전을 꽃놀이 장소로 사용했고 곡예단과 기생들의 공연 장소, 물건 판매장으로 이후 쓰였으며 나중엔 영화 상영과 피로연 등 각종 행사장 목적에도 활용됐다. 그렇게 임금의 어진을 모시던 화령전이 엉뚱한 목적으로 쓰이며 건물이 낡고 일부 훼손되기 시작하자 보다못한 수원시민들이 직접 화령전 지키기에 나섰다. 보수 규모는 작았으나 1934년 수원 유지들로 이뤄진 수원보승회가 건물을 직접 수리했고, 1936년엔 추녀와 지붕을 고쳤는데 당시 수리 공사를 위한 도면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해방 후엔 화령전이 무당의 숙소로, 마당은 밭으로 쓰이자 1949년엔 주변 신풍동 마을 주민들까지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엔 수원시와 화성군의 예산 및 자재 지원도 이뤄졌고 지역 대목수들도 공사를 도왔다. 그럼에도 다른 목적으로 활용된 화령전은 1963년에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며 보존 근거가 마련됐으며, 1975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수원성 복원보수정화사업에 따른 대대적 보수가 진행됐다. 이후 1992년 표준영정으로 그려진 정조의 어진이 80여 년만에 다시 화령전에 봉안됐고, 이후 2004년 다시 그려진 어진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화령전의 높은 가치를 지키는 첫걸음은 그 가치를 제대로 알고 기억하는 것이다. 5년 전 화령전의 보물 지정을 가장 반긴 것도 다름아닌 시민들이었다. 과거 화령전 수직관원들이 5일마다 어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수원유수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한번 향을 피워 어진을 보살폈던 것처럼 수원시민은 물론 국민들이 다함께 정조가 영원히 머물 화령전을 지켜야 할 것이다. /경인일보=김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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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9 15:11

<뉴스와 인물> 이원택 더불어민주당 전북특별자치도당 위원장

전북은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중앙정부 지원으로부터 고립됐다. 전북이 미래도약의 발판을 열기 위해서는 그 어느때보다 ‘강한 정치력’이 요구되고 있다. 지금 전북은 대외적으로 새만금 잼버리 파행에 따른 예산삭감 등의 후속조치 선행과 전국에서 전북만 제외된 대광법 통과, 역대 정권의 공약이었던 공공의대 설립, 미래산업 기틀이 될 수소·탄소·이차전지 산업 기틀 확보, 특별자치도에 걸맞는 재정 확보를 위한 재정특례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 또한 내적으로는 완주-전주 통합, 군산-김제-부안 새만금 특별자치단체 설립 등에 직면해 있다. 전북일보는 더불어민주당 전북특별자치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원택 국회의원(군산·김제··부안을)을 만나 향후 전북 발전을 위한 계획과 포부를 들어봤다.   -민주당 전북특별자치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셨는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를 지지하고 성원해 주신 당원 동지들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경제와 민생을 파탄시키고 국민 무시로 일관하고 있는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받들고 2027년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더욱 잘 대변하고 전북의 새로운 미래비전을 제시해 도민들과 함께 전북 대도약의 시대를 열어 나가겠습니다. 경제와 민생파탄, 국민무시, 검찰독재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고, 2026년 지방선거 승리와 2027년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에 앞장서며 전북특별자치도의 대도약을 이끌겠습니다.”   -전북은 지금 대한민국 속 외딴섬으로 불릴 정도로 예산과 정책 배려에서 소외되고 있는데 대응 방안은. “전북이 홀대 받고 패싱당하고 있는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새만금 잼버리 사태의 전북 책임 전가, 새만금 예산 삭감과 전북 국회의원 의석수 축소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싸웠고, 그 과정에서 전북의 이익을 지켜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전북 홀대에 맞서기 위해서는 전북지역 국회의원들이 원팀으로 단결해 예산과 정책현안에 대응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역 국회의원 모임을 매월 정기적으로 열어 상호 간에 소통하고 협력하는 장을 만들고 힘을 모아 중앙정부의 협의력을 높여 나갈 생각입니다.”   -새만금 SOC예산, 국제공항, 대광법, 공공의전원 등 현안들이 즐비한데 풀어나갈 해결책이 있으신지요. “얼마전 제출된 ‘새만금 SOC사업 적정성 검토 용역 최종보고서‘에서 새만금국제공항 건설사업과 관련한 추진절차와 방법 등이 모두 적정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새만금 SOC사업 추진의 당위성이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인데, 사실 타당성 조사가 모두 마무리되어 재검토할 필요도 없던 사안이었습니다. 연구용역을 한다면서 새만금 사업을 8개월 지연시킨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식의 전북에 대한 딴지걸기가 반복되지 않도록 앞으로 전북 관련 국책 사업 추진과 제도개선에 대해 도당 차원의 강력한 대응을 해나가겠습니다. 10명의 전북 국회의원들과 전북 도-시군이 합심해 정부의 부당한 정책결정과 예산홀대에 맞서 싸우고 또 설득해 나가겠습니다.”   -중앙 정치에서 전북 정치의 목소리와 입김이 작은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21대 국회에 비해 22대 국회에 전북지역 다선 중진의원들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5선 정동영 의원, 4선 이춘석 의원, 3선에 김윤덕, 한병도, 안호영 의원까지 무게감이 충분히 있습니다. 또한 전북의 권리당원도 15만명으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중앙 정치권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중요한 것은 전북의 정치권이 개인을 넘어 단결하고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당을 당원 중심의 대중정당으로 혁신하고 정치권이 똘똘 뭉쳐 합심한다면 못 해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도당위원장으로서 그러한 통합의 정치력을 발휘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전북 대선과 지방선거를 끌어갈 중책을 맡으셨는데, 각오와 목표는.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민주당이 국민들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해 무능하고 무도한 현 정권을 견제하고 심판하는 역할과 더불어 국민의 삶을 개선해낼 수 있는 대안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북도당을 대중적 도당으로 혁신하고 유능한 정책으로 변모시켜 그러한 국민과 도민의 요구에 부응하고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정권교체의 교두보를 마련하겠습니다. 민주당에 변함없는 사랑을 보내주시길 바라고 지방선거 승리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당원동지 여러분이 끝까지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전북 최대 현안은 전주-완주 통합인데, 통합과 관련한 도당위원장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전주 완주 통합의 기본적인 취지에 공감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행전략입니다. 통합 당사자인 완주 군민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실행전략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통합과 관련된 완주군민들의 다양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완주에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구체적으로 마련해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완주군민이 지역발전을 위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통합을 통해 해소할 수 있는 부분과 지원이 필요한 부분들을 정리하는 것이 통합논의를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주 군민이 기대할 수 있는 정책과 비전이 제시되어야만 통합 고지를 넘을 수 있는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원과의 관계 재정립과 도당 내부 조직 정비 방침이 있으신지요. “민주당의 주인은 당원입니다. 따라서 당원의 목소리가 언제든지 정당의 운영에 반영될 수 있고 국정과 도정에 반영될 수 있는 구조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당의 문턱을 낮춤으로써 당원 누구나 도당에 의견을 전달하고, 도당이 당원들을 자주 만나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도민과의 간담회를 활성화하고 전북 14개 시군과의 당정협의를 개최해 현안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해결해 나갈 예정입니다. 또한 다양한 정책 과제 해결 역량을 높이기 위해 도당의 정책력을 강화하고 전북의 비전과 전략을 제시해 나갈 수 있도록 도당을 정비해 나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민과 당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도당위원장이라는 중요한 소임을 맡겨주신 당원동지들과 도민여러분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전북도당을 당원중심의 정책정당으로 혁신하고 도민들과의 소통을 강화해 도민의 요구가 곧 도당 정책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도민이 어려울 때 힘이 되는 도당, 찾고 싶은 도당을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감사드리며,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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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24.08.18 16:5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⑭ 형사재판원본(刑事裁判原本)

조선 정부는 정부군과 지방 행정조직을 동원하여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기록물을 생산하였다. 이들 기록물에는 조선 정부의 논의과정을 기록한 문서, 진압군이 작성한 공문서와 보고서, 진압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동학농민군의 판결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동학농민군 자신은 많은 유물을 생산하지 못했지만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조선 정부 및 조선 정부가 편성한 진압군이 동학농민군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겨 주목된다. 형사재판원본(刑事裁判原本)은 조선 정부에 체포되어 처벌받은 동학농민군 다수에 대한 재판기록이다. 특히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인 전봉준의 판결선고서는 동학농민군의 지향과 인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기록에는 평안도 강계부 관찰사 조승현 등 6명의 을미의병 관련 고등재판소 판결문도 수록하고 있지만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관계가 없으므로 표 설명문에서는 제외하였다. 형사재판원본은 갑오개혁 시기 설치된 법무아문 권설재판소, 법무아문 임시재판소, 법무아문 고등재판소, 특별법원, 고등재판소, 대한제국 시기의 고등재판소, 평리원의 판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판결문에서는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동요(東擾)’로, 참여자들을 ‘비도(匪徒)’ 동도(東徒)‘ ’비류(匪類)‘ ’동비(東匪)‘ ’동학배(東學輩)‘로 그 지도자를 ’비괴(匪魁)‘ ’동학거괴(東學巨魁), 농민군 토벌을 ’토비(討匪)‘ 등으로 비하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내용도 매우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전봉준, 손화중, 서장옥,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최시형 등 총 211명의 최종 판결 선고서가 포함된 판결기록으로 동학농민군 및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이다. 농민군 진압에 소홀하였거나 결탁한 일부 지방관도 처벌을 받았다. 2024년 8월 5일 현재 공식 등재된 동학농민군 참여자는 3,817명으로 이 판결선고서에 기재된 관련자는 전체의 18.09%에 불과하다. 이 기록에서 1895년의 초기 선고에는 경성주재 일본영사 우치다 사다츠지(內田定槌)가 입회 서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군은 정부와 민병대와의 전투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체포되어도 심리와 판결 없이 현장에서 총살ㆍ참수 및 효수ㆍ타살, 원한에 의한 사살(私殺) 등으로 즉결 처형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고 관련 기록도 매우 소략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형사재판원본은 1894~1895년 동학농민군 진압과 그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도 이어진 농민군 개별 인물들의 활동과 정부의 체포와 심리와 재판 선고 처벌 등을 이해하는 데도 역사자료로서의 의미는 매우 크다. 이 자료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홈페이지에서 이미지를 포함한 원문 텍스트와 번역문을 확인할 수 있는데 ‘동학관련판결선고서’로 되어있다. 문서 원본은 국가기록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아래의 표는 전북일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동학농민군 관련 판결선고서의 핵심내용을 추려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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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15 15:34

[배리어프리, 공공디자인에서 인권을 찾다] ① 모두를 편리하게, '배리어 프리(barrier-free)'

배리어프리(barrier-free)는 장애인과 고령자, 임산부,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의 일상생활에 지장이 되는 물리적 장애물이나 심리적 장벽을 허물자는 개념의 운동 및 정책을 말한다.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의미인 만큼, 배리어프리 운동은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활발히 전개됐다. 덕분에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관이 늘었고, 무장애 여행이 활발해지는 등 크고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 하지만 여전히 ‘배리어프리=시혜적 복지 정책’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장애인 콜택시 증차 등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할 것들이 장애인만을 위한 정책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또한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도 한몫한다. 이에 배리어프리가 단순히 사회적 약자만을 위한 정책이 아닌 모두가 편리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정책임을 소개하고, 제도적 변화와 인식 개선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7차례에 걸쳐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독일은 전체 인구 중 약 11%가 이동의 불편함을 겪고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동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독일 정부가 2013년부터 2022년까지 대중교통의 완전한 배리어프리 구현을 실현시켰기 때문. 여객 운송법 제8조 1항에 따라 독일의 시내‧시외버스, 트램/지상철, 연방 주 내에서 운영되는 단거리 기차 등 대부분의 교통수단에 ‘배리어 프리’개념이 적용됐다. 독일은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물리적, 제도적, 심리적 장벽을 제거해 모두가 안전하고 쾌적하게 활동하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둔다. 특히 누구든 마음 편하게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권리, 보편적 이동권을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2023년 정부는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 일부 법률 개정안에 따라 '특별교통수단 도입보조 운영비' 237억 원을 편성했다. 이는 2022년 인구 74만 명의 독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시에서 시의회와 독일철도가 서부역 한 개역의 배리어프리 확장을 위해 편성한 예산보다 더 적은 금액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통약자에게 이동의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다. 2001년 오이도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 사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통약자들의 이동권 투쟁이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 오이도역 휠체어 리프트 추락사고 이후 이동권 투쟁운동이 펼쳐졌지만 1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한국은 장애인이 살기 불편한 도시로 꼽힌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을 위해 기반시설이 곳곳에 갖춰져 있지만, 형식적이거나 무용지물인 경우가 적지 않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적혀 있다. 행복추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모든 기본권의 이념적 기초일 뿐 아니라, 종국적 목적인 셈이다. 그 중에서도 이동권은 가장 기본적으로 보장해야 할 가치이다. 그렇기에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물리적, 제도적, 심리적 장벽을 없애야 한다는 의미의 배리어프리 실현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7월 독일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 유학생 마틴(Matin·49)은 “독일 사회는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자기결정권과 참여권을 가진 일반 시민으로 본다”며 “장애인도 비장애인이 누리는 권리를 동등하게 부여받을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모두를 편리하게 만든다"라며 "독일, 특히 베를린 주에서는 배리어프리 움직임이 너무나 당연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2021년 ‘저상버스 100% 도입 약속 이행’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기소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공동대표가 최근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는 전장연 회원 20여명과 버스 운행을 23분간 방해하고, 미신고 집회를 연 혐의(집시법 위반·업무방해)로 재판을 받아야 했고, 항소심 재판에서 처음 꺼낸 말이 "죄송하다"였다. 항소심 재판 당일, 박 대표는 거듭 사과하면서도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2006년 교통약자법이 제정됐고, 그에 따라 5개년 계획이 세워졌으나 저상버스 도입 이행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전장연이 주장하는 권리는 왜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들의 방식이 투박하고 공격적이었으나 왜 굳이 출퇴근 시간대에 거리로 나와야했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특히 지역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 조차 갖기 어렵고, 이동권 문제가 늘 후순위로 밀린다는 점을 따져본다면 '배리어프리' 환경 조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문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박은
  • 2024.08.12 18:22

[뉴스와 인물] 김경진 익산시의회 의장 “일하는 의회, 강하면서도 유연한 의회 만들겠다”

제9대 익산시의회 김경진 호가 출범했다. 신임 김경진 의장은 취임 일성으로 전국에서 수준 높은 모범적인 의회를 만들어 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기관으로서 시민의 기대와 신뢰에 부응하고 보다 나은 지역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매진하겠다는 각오다. 특히 그는 시정 발전을 위한 집행부의 파트너로서 매사 열심히 일하는 의회, 강하면서도 유연함을 잃지 않고 집행부와 소통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의회의 모습을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 새로운 시작에 나선 김경진 의장을 만나 제9대 후반기 의회의 비전과 의정 활동 계획을 들어봤다. 먼저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간단한 소감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제9대 후반기 익산시의회 의장이라는 막중한 소임을 맡겨 주신 익산시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의회의 의장이란 단순하게 의회를 운영하는 직책이 아니라 27만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시민의 뜻을 시정에 반영하여 익산시 발전을 이끌어 가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의원들이 의정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며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펼쳐 익산시의회가 시민들에게 믿음을 주는 의회로 거듭날 수 있도록, 또 저에게 의장직을 맡겨 주신 시민 여러분과 선배·동료 의원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맡은 역할에 충실하겠습니다.” 취임 일성으로 전국에서 수준 높은 모범적인 의회를 만들어 가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의회는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서 시민의 기대와 신뢰에 부응하고 더 나은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하는 것이 책무이자 존재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익산시의회는 인구 감소, 청년 취업, 원도심 활성화 등 시민들의 삶의 질과 직결되는 현안을 조속히 해결하고 국가식품클러스터 2단계, 농생명·바이오산업 등 익산의 미래를 견인할 주요 사업들이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공감을 이끌어 내는 생산적인 의정 활동을 펼치겠습니다.” 후반기 의정 활동에 있어 주안점이 있다면.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해까지 입어 하루하루가 살기 힘들다는 시민들의 한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재 상황에서 민생 안정과 경제 활성화, 사회안전망 확충 등에 주안점을 두고 시민들의 삶에 꿈과 희망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시민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의회를 만들겠습니다. 또한, 지역 생활 현장에서 시민과 함께 호흡하며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고충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문제를 해결해 지역사회를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시민의 눈높이에서 더 많은 일을 하는 의회가 되겠습니다.” 밖으로는 집행부 감시·견제가, 안으로는 의원들 간 소통과 화합이 중요한 부분인데요. 의회 수장으로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의회와 집행부는 지역 발전과 시민 행복 증진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함께 노를 저어가는 지방자치의 동반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동반자적 관계를 위해서는 ‘소통’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통을 바탕으로 집행부와 협력을 강화하여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강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시정을 살피는 견제와 감시는 지방의회 본연의 역할이기 때문에, 시정이 공정과 상식에 입각하여 집행되는지 집행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철저히 하는 강한 의회로 이끌어 가겠습니다. 저는 의원 한 명 한 명의 의정 활동이 제9대 후반기 의회를 성공적인 의회로 이끈다고 생각합니다. 각기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진 25명의 의원이 모여 있는 만큼 각자의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수의 의견을 바탕으로 하되 소수의 의견도 존중하면서 동료로서 화합하는 방법을 찾아가겠습니다. 의회의 수장으로서 앞장서 의회를 이끌어 가지만 때로는 뒤에서 묵묵히 조력하는 의장, 곁에서 함께 소통하고 고민하는 의장이 되어 의원들이 의정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최적으로 조성할 방침입니다.” 임기 내에 꼭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제9대 후반기 의회 슬로건을 ‘시민이 주인! 더 듣고 더 뛰는 실천의회’로 정했습니다. 의회의 모든 행보는 오직 익산시민을 향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시민들의 삶의 현장 가까이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시민을 위해 더 뛰면서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을 큰 폭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실천하는 의회’를 만들겠습니다. 저는 우리 의원들이 힘들수록, 더 진지하게 고민할수록 시민들의 삶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고 믿습니다. 지금의 첫 마음과 뜨거운 열정을 잃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익산시의회는 다르구나, 익산시의회는 정말 열심히 일하는구나’라는 칭찬을 시민들로부터 들을 수 있도록 임기 동안 제가 가진 모든 역량과 힘을 쏟아붓겠습니다.” 지방의회 인사권 독립 이후 지난 7월 정기인사에서 집행부와의 교류가 적극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요. “하나는 집행부와의 협치, 다른 하나는 일하는 분위기 조성이라는 취지입니다. 올해 하반기 정기인사에서 의회 승진 인사 요인은 많은 반면 집행부는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적정 수준의 교류가 이뤄지지 않으면 상대적 박탈감 등 직원들 간 불만이나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감시·견제 역할을 하는 의회지만, 협치 차원에서 집행부 공무원들이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른 측면의 의미는 열심히 일하는 의회사무국 분위기 조성입니다. 때가 되면 당연히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뒤처질 수 있다는 긴장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서 농협에서 39년간 인사와 기획 업무 등을 두루 경험하며 쌓은 노하우와 의회 입성 이후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린 판단입니다. 앞으로의 승진 인사도 그냥 순번대로 하는 게 아니라 승진 대상 3배수 내에서 열심히 일하는 직원에게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고, 필요할 경우 집행부와의 교류도 적극적으로 할 예정입니다.” 끝으로 익산시민, 전북도민 여러분들께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익산시의회는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25명의 의원들은 시민을 주인으로 섬기며 시민의 눈과 마음으로 현안을 바라보고 시민들의 바람이 시정에서 폭넓게 구현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애정 어린 격려와 관심을 부탁드리며, 여름철 건강 유의하시고 모두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재선의 김경진 의장은⋯ 김경진 익산시의회 의장은 오산남초등학교와 이리동중학교, 이리상업고등학교(현 전북제일고등학교), 원광대학교를 졸업하고 원광대 행정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40년 가까이 농협중앙회에 재직하면서 노동조합 전북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삼성동 주민자치위원장과 원광정보예술고등학교(현 원광보건고등학교)·익산지원중학교 운영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익산을 지역위원회 사무국장, 제8대 익산시 결산검사 대표위원, 제8대 익산시의회 후반기 기획행정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 기획
  • 엄철호외(1)
  • 2024.08.11 14:27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⑬ 동학임명장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총 185건이다. 이를 작성주체별로 구분해 보면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이 30건(16%), 민간인이 생산한 기록물이 33건(18%), 조선정부가 생산한 보고서와 공문서가 122건(66%)으로 조선정부가 생산한 문서가 대부분이고 동학농민혁명의 주체인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은 매우 적은 편이다.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이 많지 않은 것은 당시 역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동학농민군들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 중에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동학임명장이다. 동학임명장은 당시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인 최시형이 북접법헌의 이름으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1894년에 발급한 임명장이다. 현재 기록유산 목록에 포함된 동학임명장은 18건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포함된 동학임명장을 소장처별로 보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11건, 천도교중앙총부 6건, 독립기념관 1건이다. 이러한 임명장은 현재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시기를 1891년부터 1904년까지 확대하면 남아 있는 동학임명장은 대략 80건 정도이다. 나머지 동학임명장이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선정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추진과정에서 여러 기관의 자문을 통해 정해졌는데 이는‘국가기관이나 이에 준하는 기관이 소장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로 보존 및 관리 대책이 명확한 자료’였다. 이에 따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천도교중앙총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록물만이 목록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나머지 동학임명장도 세계기록유산으로서 충분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동학임명장은 모두 당시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인 최시형의 이름으로 발급되었다. 전봉준의 이름으로 발급된 동학임명장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발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봉준은 동학임명장을 발급할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는 최시형이었고,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최고책임자는 전봉준이었다. 전봉준은 동학교단의 틀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이끌면서 농민군을 조직화한 것은 백산대회 때이다. 이때 전봉준은 총대장, 김개남, 손화중은 총관령, 김덕명, 오시영은 총참모, 최경선은 영솔장, 송희옥, 정백현은 비서로 정하여 농민군대로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 하부단위에 대한 조직은 구성하지 못하였다. 전봉준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기존 동학교단의 조직을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최시형이 임명하고 그에 대한 역할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다고 보여진다. 위의 표에서 임명장이 만들어진 시점을 보면 주로 1894년 7∼8월임이 확인된다. 이는 이 시기에 많은 조선의 농민들이 동학에 입도하고 여기에 더하여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 동학교단 조직은 포접제(包接制)로 운영되었다. 즉 접(接) → 포(包) → 동학교단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조직은 접(接)이다. 접에는 접주(接主)와 접사(接司)의 직책이 있다. 접주는 접의 책임자로서 교도를 관리하고 교리를 전파하는 일이 주요한 임무이다. 접사는 접주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문서는 1894년 9월 최시형이 이수방을 접주로 임명하는 임명장이다. 이러한 접주임명장은 동학교단의 계통과 계보를 보여주고 있다. 문서의 오른쪽부터 보면 용담(龍潭)은 교조 최제우를 말하며 무극대도대덕(無極大道大德)은 최제우가 제시한 동학의 궁극적 목표이자 지향점이다. 대선생(大先生)은 교조 최제우의 존칭이며 시포덕(侍布德)은 최제우가 이 동학을 개창했다는 의미이다. 북접(北接)은 최시형을 말하며 무극대도대덕은 동학이 추구하는 목표로서 이를 최시형이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대도주(大道主)는 최시형의 존칭 또는 직책이다. 다음 태인(泰仁)은 지역을 말하며 지역의 책임자로서 이수방을 접주로 임명하고 있다. 다음 눈여볼 것은 도장이다. 접주임명장과 접사임명장의 경우, 도장이 5개가 찍혀 있다. 도장의 글자는 최시형의 호인 해월(海月)이다. 그런데 여기서 1894년 당시 최시형은 주로 보은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임명장이 만들어지고 전달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당시는 교통과 통신이 제한된 상황에서 각 포의 대접주 명의로 임명장을 발급하지 않았고 모두 최시형 명의로 임명장이 발급되었다. 이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백지 한지에 ‘해월’이라고 하는 도장 5개를 찍어서 각 포에 내려주면 각 포에서 대접주가 문서의 형식에 맞게 글자를 쓰고 직책을 부여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모든 임명장의 글씨체가 다르고 도장 위에 글씨가 씌여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수방 접주 임명장'과 '정성영 접사 임명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여러 개의 접을 관리하고 통할하는 조직이 포(包)이다. 포의 책임자를 대접주(大接主)라고 한다.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등은 바로 이러한 대접주로서 많은 접을 거느린 포의 책임자였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각 지역별로 봉기한 지도자들은 대개 이러한 대접주들이 대부분이었다. 대접주는 여러 접을 관할하기 때문에 이를 운영하기 위한 별도의 조직이 필요하였다. 그것이 바로 육임직이다. 육임이란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을 말한다. 교장은 알차고 덕망있는 사람(質實望厚員爲敎長), 교수는 성심수도하여 가르칠 사람(誠心修道可以傳授員爲敎授), 도집은 위풍을 갖추고 기강을 세워 다스릴 사람(有風力明紀綱知境界員爲都執), 집강은 시비를 밝혀 기강을 잡을 사람(明是非可執紀綱員爲執綱), 대정은 공평을 유지하며 근후한 사람(持公平勤厚員爲大正), 중정은 능히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사람(能直言剛直員爲中正)으로 임명하였다. 각 포(包)에서 교장이나 교수에 임명된 사람을 보면 모두 포내(包內)의 장로나 덕망있는 사람들이고, 도집과 집강은 실질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며, 대정이나 중정은 비교적 젊은 사람들로서 포내의 실무를 추진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육임직의 임명장은 북접법헌이라는 명의로 발행되었으며 한지 백지에 3개의 도장을 찍은 뒤에 각 포에 전달하여 각 포의 대접주가 직책과 이름을 기입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여러 개의 포를 비롯하여 모든 동학의 조직을 관할하는 것이 바로 동학교단이다. 동학교단의 최고책임자는 최시형이다. 최제우가 1860년 동학을 창도한 뒤 1864년 처형되었다. 이후 동학교단의 종통은 최시형이 이어받았다. 최시형은 경전을 간행하고 제의와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동학교단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도 동학교단은 최시형이 교주로서 역할하였으며 그가 체포되어 처형된 1898년까지 이러한 체제는 지속되었다. 동학교단에서도 육임직은 운영되었다. 동학임명장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최시형의 동학교단과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향후 이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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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9 08:44

[참여&공감 2024 시민기자가 뛴다] “갯벌의 세계적 위상, 이제 시작”.. 갯벌은 ‘복원’하고 ‘보전’해야

“만져봐. 부드럽지? 어떤 생물들이 있지? 조개, 갯지렁이, 꽃게. 망둥어와 문어도 있지?” 현장 학습을 온 유치원생들이 선생님의 설명에 집중한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펄을 쥐어도 보고 조개라도 있을까 진흙을 파헤쳐 보기도 한다. 매 년 아이들과 갯벌 체험을 오는 선생님은 아이들이 진흙의 촉감도 느껴보고 생물이 가득한 새로운 곳에서 배움은 물론 즐거운 추억을 쌓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소중한 배움터이자, 수많은 이들의 해루질 명소, 추억의 장소인 이곳은 전북 고창의 갯벌이다. 도시 사람들에게 갯벌은 한번 씩 ‘체험’을 하러 오는 곳이지만, 서해안 지역민들에게 갯벌은 무척 친숙하고 익숙한 곳이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조개와 게를 잡고, 펄에 발이 푹 빠져 넘어지기도 하며, 어느새 차오르는 바닷물에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던, 어릴 적 추억이 풍부한 장소이다. 가깝고 익숙해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깨닫기 어렵기도 하지만, 세계적으로 한국의 갯벌은 위대한 가치를 자랑한다. 서해안 갯벌은 세계적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 즉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가치가 인정돼 세계적으로 보전에 힘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세계 유일무이한 서해안(서천, 고창, 신안, 보성-순천) 갯벌은 각각의 특성도 있지만, 대표적으로 경관적 가치, 생물 다양성의 보고, 바다 새의 서식지로써 가치를 인정받았다. 우리에겐 여름철 조개나 한번 씩 잡으러 가는 그 친숙한 갯벌이 ‘유일하다’는 이유로 세계적 보전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크나큰 지구촌 다른 곳에서는 우리나라 같은 갯벌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같은 갯벌은 황해 갯벌, 즉 중국의 동해안과 한국의 서해안 갯벌이 유일하다. 이 황해 갯벌의 특징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와 범위에 있다.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의 갯벌(mud flat)은 풀이 자라는 염습지의 끄트머리 구간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니,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막대한 규모의 환경자원인 우리나라 갯벌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주류 국가들에 비해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막대한 탄소 흡수원 ‘블루카본’, 탁월한 ‘오염 정화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로 한국의 갯벌이 전 세계에 소개됐지만, 우리나라 갯벌에 대한 연구는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갯벌의 가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그 위상이 쌓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20여 년 전부터 서해안 갯벌을 연구하기 시작한 권봉오 국립군산대학교 해양생물자원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갯벌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관련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중요한 화두인 탄소 중립에 갯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갯벌의 탄소흡수력 연구를 바탕으로 국제 학회와 기관 등을 방문하며 우리나라 갯벌 알리기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권 교수와 연구진이 주목하는 갯벌의 가치는, 갯벌이 단순히 생물다양성의 보고라는 것을 넘어, 기후 위기 시대에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탄소흡수원’, 일명 블루카본이라는 점에 있다. 블루카본은 해양생태계에 흡수되어 저장된 탄소를 일컫는다. 대표적으로 맹그로브, 갈대, 염습지 등이 있다. 권봉오 교수는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갯벌의 탄소흡수력에 대해 연구를 진행했는데, 전국 갯벌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전체 갯벌이 연간 최대 49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승용차 20만 대가 연간 내뿜는 이산화탄소의 양에 버금간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 연구팀과 함께 갯벌의 오염 정화 능력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결과, 갯벌에는 총 152만 톤의 질소가 저장되고 있고, 연간 1만 톤의 정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권 교수는 “1만 톤의 정화 효과를 하수 처리장에서 처리한다고 가정해 하수처리장 건설비용에 대비하면, 연간 16조 원의 가치에 버금가는 양을 우리 갯벌이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갯벌의 효능과 가치가 연구로 검증되며 지난달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IPCC 전문가 회의에서 갯벌이 탄소흡수원(블루카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논의도 펼쳐졌다. 우리나라가 블루카본으로 정직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냐는 질문에 권 교수는 “IPCC에서 요구하는 것은 갯벌에 대한 객관적 연구가 이뤄졌는지 여부인데, 자신 있게 자료를 제출했다. 국제적으로 우리 갯벌이 인정을 받게 되면, 국가 정책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이러한 부분에서 같이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연구하고, 공부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갯벌이 블루카본으로써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초입에 들어선 것”이라고 평가했다. △논란의 땅 새만금의 갯벌은? 막대한 탄소흡수원이자 오염 정화원인 우리 갯벌. 우리나라 갯벌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데, 30여 년간 이어진 지지부진한 사업으로 아직까지도 선택의 기로에 놓인 땅이 있다. 상처와 논란의 새만금이다. 이미 20여 년 전, 새만금 간척을 반대했던 시민단체와 학자들은 새만금이 제2의 시화호가 될 것이라 입을 모았다. 갯벌의 정화 기능을 알던 학자들은 갯벌을 훼손할 경우 오염원이 계속 쌓이고 쌓여 썩을 수밖에 없는 구조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이는 현실이 되었고, 심각한 수질 오염으로 이어져 새만금의 해수 유통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끊이질 않고 있다. 어느 유명한 시의 구절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실제 새만금 인근 주민들은 흐르던 물길을 막자, 풍부했던 자원의 땅이 어떻게 황폐화 되었는지 직접 목격했다. 갯벌에 대한 블루카본 연구가 시작된 지 이제 10년. 갯벌을 살리는 것보다 매립해 농업용 땅으로 쓰는 것이 이득이라 여기던 때 시작된 공사는 강산이 세 번이 변하도록 이어지면서 ‘갯벌 복원’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갯벌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라, 탄소흡수 능력인 블루카본 기능 외에도 아직 우리가 모르는 갯벌의 가치가 더 있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의견이다. 고창 갯벌 등 서해안 갯벌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고 이후에도 지위를 유지하면서 전 세계가 우리나라 갯벌에 주목하고 있다. 유네스코 등재 뿐 아니라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에서 공식적인 ‘탄소 흡수원’으로써 인증을 기다리고 있다. 추가적인 갯벌의 연구와 국제적 인정을 위해서는 앞으로 두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갯벌 보전, 두 번째는 갯벌 복원이다. 남아 있는 갯벌은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보전’하고, 이미 훼손된 갯벌은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훼손된 갯벌의 복원이 가능한 것이냐”는 질문에, 오랫동안 갯벌을 연구해온 권봉오 교수는 자신 있게 답했다. “당연합니다. 갯벌은 바닷물이 흐르는 것이 핵심입니다. 바닷물이 흐르게끔 하면 갯벌은 자연스럽게 복원됩니다.” 목서윤 전주MBC 아나운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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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7 13:15

고창군, 서해안을 국내 최고 선셋 특화 관광지로 만든다

고창군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초대형 관광투자가 잇따르고 있다. 세계자연유산에 오를 만큼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고, 최고급 먹거리가 가득했던 지역인 만큼 그간 아쉬웠던 놀거리와 숙박시설로 세계최고의 선셋비치로 도약하겠다는 큰 그림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명사십리 해양관광지 조성 고창군 상하면·해리면에 걸쳐 있는 명사십리 해변.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8.5㎞의 직선형 해안이다. 일몰 시간이 되면 붉은 노을과 하늘빛 바다, 젖은 흙에 반사되어 붉은빛을 띠는 모래사장, 소나무들의 실루엣이 로맨틱한 장관을 만들어낸다. 지난 7월 30일 고창군청 대회의실에서 국내 기업 4곳(㈜LIG시스템, ㈜P&K INC, 영풍제약, 서울경제TV)과 3000억 원 상당의 ‘명사십리 해양관광지 조성사업 투자협약식’이 열렸다. 협약식에는 심덕섭 고창군수, ㈜LIG시스템 윤종구 대표, P&K INC 김태균 대표, ㈜영풍제약 김재훈 대표, 서울경제TV 홍준석 부사장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각 업체들은 2030년까지 3000억 원을 투자해 고창 명사십리 일대에 리조트와 숙박, 스포츠, 휴양·레져시설을 조성할 계획이다. 군은 연말까지 타당성 용역을 마무리하고, 내년도에 관광지 지정과 조성계획 용역을 본격 추진해 2026년 상반기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할 방침이다. 명사십리에 대규모 해양관광지가 조성되면, 관광객 유치는 물론 스쳐 지나가는 관광이 아닌 체류형 관광지로의 대변신하게 된다. 명사십리 관광개발은 지역의 숙원사업이었다. 명사십리 부지에 국유재산이 일부 포함돼 상업적으로 이용하거나 관광산업을 하는데 제한이 많았기 때문. 이에 심덕섭 고창군수는 기획재정부 등을 찾아 국유재산 매각을 요청했고, 최근 긍정적인 답변을 주면서 이번 관광투자 협약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고창종합테마파크, 정부 소규모 관광단지 후보 선정 국내 최대 스키장을 운영 중인 용평리조트(모나용평)은 2027년까지 3500억 원을 투자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고창갯벌과 맞닿은 심원면 만돌바람공원 인근에 273실 규모의 리조트와 200실을 갖춘 럭셔리 호텔, 컨벤션 시설 등을 조성한다. 고창종합테마파크의 하이라이트는 명산 선운산과 골프장, 숲을 마주한 인티니티풀(시각적으로 경계가 없을 것 같은 수영장)이다. 낮에는 이국적인 경관을, 밤에는 화려한 조명이 연출하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노을을 배경으로 인생사진도 남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될 예정이다. 특히 최근 정부의 소규모 관광단지 후보로 선정되며 사업에 탄력이 기대되고 있다. ‘소규모 관광단지’는 기존 관광단지의 개발부담금 면제 등 민자유치 혜택에 더해 인구감소지역 혜택(관광기금 융자우대, 재산세 최대 100%감면, 지방소멸대응기금 활용연계 등)이 추가로 지원된다. 지정요건도 기존 50만㎡에서 5만~30만㎡정도로 줄이고, 관광단지 필수시설도 공공편익과 관광숙박시설을 갖추면 승인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아직 개발이 확정되지 않은 주변 부지와 관련, 소규모 관광단지 지정을 통해 국내·외 많은 기업들의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30 서해안 관광지도가 바뀐다 노을대교는 고창군 해리면 동호와 부안군 변산면 도청리를 연결할 전체 7.48㎞ 길이의 다리를 말한다. 완공 땐 62.5㎞를 우회해야 했던 이동 거리가 단, 7㎞로 줄어든다. 다리가 놓이면 기존 한나절 넘게 걸리던 거리를 단 10분이면 오갈 수 있게 된다. 특히 노을대교는 대한민국 해안관광도로인 KR777 위에 건설된다. Korea777(KR777)는 경기, 충남, 전북, 전남을 잇는 서해안 관광도로인 국도 77호선과 동해안 관광도로인 7호선을 연결하여 명명한 것으로 한반도 바다 전체를 여행할 수 있는 통합해안도로를 일컫는다. 심덕섭 고창군수는 지난 3월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면담하고 지역염원인 ‘노을대교 조기착공’을 위한 정부차원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 고창 해안지역과 단 30분이면 오갈 새만금국제공항도 속도를 내고 있다. 국토교통부 서울지방항공청은 지난 6월 18일 ‘새만금국제공항 건설공사’ 실시설계 적격자로 HJ중공업 건설부문을 선정했다. 목표 개항 시점은 오는 2029년이다. 심덕섭 고창군수는 “아직까지 국내에 선셋비치를 특화시킨 곳은 없었다. 국내 생산량의 절반이 넘는 바지락과 풍천장어 등 최고의 먹거리는 충분하다”며 “온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즐길거리를 마련하고, 프리미엄 쇼핑시설과 호텔, 펜션단지를 지어 세계 최고의 선셋비치로 만들어 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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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표
  • 2024.08.05 16:30

[팔도건축기행] 후당 김인호와 대구건축

일제강점기와 해방, 6, 25동란의 폐허를 지나고서 60년대 조국 근대화의 시기에 비로소 근대건축을, 80년대 올림픽을 맞아서 우리의 현대건축을 세우게 되었을 것이다. 급변의 시간 속에서 겨우 남겨진 근대건축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대구건축의 선구자 김인호는 현대건축과 아울러 불국사 조영 계획, 영남제일문, 경주화랑 연수원등을 설계하며 전통건축 고찰 논문들을 남긴 대학교수(청구대학)였다. 그의 건축에는 전통과 지역성에 대한 실험적 표현들이 내재하며 지나치게 세련되거나 일률적인 설계로 정형화하지 않았다. ‘한강 이남에서는 대구의 건축 수준이 높고 가장 활동적이었다'라고 회자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바로 후당 김인호 선생(대아건축)이 활동했던 그 시절이었다. 대구의 건축가이면서도 서울 잠실야구장을 비롯, 대전 충무체육관, 원주 치악체육관 등 전국적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즈음에 이곳 시설들을 설계한 별들이 연이어서 떨어졌다. ‘잠실종합경기장’ 설계자 김수근은 86년 6월(55세)에, ‘올림픽 기념조형물’ 설계자 김중업은 88년 5월(66세)에, ‘잠실야구장’ 설계자 김인호는 88년 7월(56세)에 타계하였지만 짧은 생에 굵은 작품들을 남겼다. 30여 년을 시민과 함께하고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 증개축하여 ‘대구 콘서트하우스’로 재탄생한 과거 ‘대구시민회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사라질지도 모를 ‘경북체육관(현, 대구체육관)’ 건축을 조명해 본다. ◆대구문화예술회관- 30년 세월과 공간의 건축 서울 세종문화회관(1978년)을 시작으로 80년대부터 각 지역 도시에 건립된 문화예술회관은 그 도시 위상을 나타내는 대표적 건축이었다. 1990년에 건립된 대구문화예술회관은 30년 동안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도시의 안식처이다. 광장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전시동, 왼편으로 공연 동이 낮은 산자락처럼 펼쳐진다. 육각형 연속패턴 평면의 전시동은 화강석 바위처럼 중첩되어 이어진다. 전시동 로비의 조경 공간은 행사 시 다목적공간으로 바뀌었고 전시장 아래위 트인 공간은 탱화 등 대형작품을 배려했다 한다. 당시의 설계개요에서 말하고 있다. 전시동 평면 흐름은 농악의 상모 이미지와 외부 공간 축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 아리랑 흐름으로 구성, 외양은 대구의 상징 목련 꽃잎을, 공연 동 지붕은 박사(薄紗) 고깔의 승무를 연상하는 디자인이라 말한다. 당시의 현상공모 설계 공공 건축들은 전통적 요소의 건축 표현이 필수적이라 할 만큼 한국적 주체사상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행정관서 발주자의 분위기이기도 했고 다양한 건축 어휘를 경험하지 못한 과도기적 건축 표현이었을 것이다. 김인호 선생은 공사 기간 중 작고하여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광장 마당은 대구예술인 장(제2대 대구 예총회장)을 치르고 그를 떠나보내는 마당이 되었다. 대구문화예술회관 건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후당 김인호 건축전(2020년 11월)’이 이곳에서 열렸고, 선생의 뜻을 기려 창의적 젊은 건축가를 선정하는 ‘후당건축상’이 27년을 맞고 있다. ◆대구시민회관의 재탄생 (현, 대구 콘서트하우스) 건축을 ‘시대의 거울’이라고 말한다면, 바로 시민회관 건축은 그 시대의 문화 경제 정치가 담긴 건축이었다. 특히 대구역과 광장에 인접하여 근현대 대구의 도시변천사를 지켜본 건축의 장소였다. 시민회관은 문화예술 행사는 물론 국경일 기념식, 시상식, 반공 궐기대회, 미인선발대회까지 열리던 다목적 건축이었고, 부속건물에는 문화예술단체 시민단체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바로 이곳은 ‘대구방송국’과 ‘KG’홀이 있었던 사라진 기억의 공간이었다. 1975년 건립된 대구시민회관은 대구역 서편, 도시 정면을 향한 웅장한 처마와 지붕 곡선, 열주(列柱), 주두(柱頭) 등 전통적 요소를 세련되게 표현한 건축이다. 세워진 지 38년 후. 시민회관은 4여 년의 증개축 공사를 마치고 2013년 콘서트 전문 홀로 재개관했다. 시대적 노후 건축을 철거치 않고 건축적 가치를 보전하는 방법으로 과거 건축의 디테일과 구조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며 첨단 콘서트홀로 재탄생했다. 과거 시민회관은 다목적 공연장으로 전면 무대막이 설치되고 프로시니엄 아치가 무대와 객석을 구분 짓는 건축방식이었다. 콘서트하우스는 최고의 음향을 위해 무대와 객석이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된 슈박스 방식으로 대구가 자랑하는 시립오케스트라의 주 무대인 콘서트홀로 변신하였다. 대구예술발전소, 대구문학관, 대구근대역사관, 창조경제캠퍼스‘와 함께 도시 근대건축의 재생은 근대 골목과 건축 문화유산으로 이어져서 도시문화의 깊이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곳은 다행히도 도시의 여백을 존중하는 광장 공간이 중심이다. 공연이 있는 밤이면 내부 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으로 처마 곡선 실루엣이 우아하며 문화예술의 불빛이 도심 광장을 밝히는 밤이 아름다운 건축이다. ◆경북체육관 (현, 대구체육관)- 재생과 철거의 갈림길 1971년 개관 당시의 ’경북체육관‘은 1981년 행정 개편으로 ’대구체육관‘이 되었고, 당시 공사비(37억)의 70%는 시민 성금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과거 오리온스 농구팀을 거쳐 지금은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농구팀의 홈구장이다. 1966년 전국현상공모 당선작으로 당시 대형체육관 설계는 고난도 첨단구조의 건축적 실험이요 모험이었다. 양쪽 초대형 기둥이 지탱하는 지붕구조의 전체적 외형은 신라 화랑의 투구 형상으로 의미화한다. 동서남북 출입구는 사찰의 일주문을, 저층부 노출 구조는 대들보와 서까래 추녀 곡선의 한국 전통 조형으로 형상화하고 하였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상승하는 경사면과 지붕 수평 수직 구성은 기운생동(氣運生動) 하는 힘의 건축이다. 특히 체육관 내부 천장을 구성하는 3차원적 기하학 곡선은 시간을 초월한 건축미학이다. 당시 공사 현장의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거대한 상부구조를 받치고 있었던 마지막 공사가설 기둥 제거 시에는 붕괴 위험 우려에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때 선생이 직접 나섰다. 대형구조물이 제자리를 찾을 때 내는 굉음과 공포의 순간을 몸소 감당하며 설계자의 책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50년을 넘긴 체육관은 기능과 구조의 노후화, 교통 접근성으로 재생이냐? 철거냐? 갈림길에 서 있다. 바로인근 구, 경상북도청(현, 대구시 산격청사)과 아울러 향후 보존과 지속 가능 건축을 긍정적으로 연구해야 할 시점이다. 최상대 전,대구경북건축가협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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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5 15:22

[뉴스와 인물] 남관우 전주시의장 "현장과 시민에 무게…소통의 중심 굳건히 지켜갈 것"

제12대 전주시의회가 후반기를 맞아 새로운 출발점을 나섰다. 남관우 의장(66)을 중심으로 앞으로 2년여 동안 전주시 발전과 시민의 복리 증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는 전주시의회는 향후 의정활동을 보다 적극적인 현장 활동 속에서 찾는 데 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이같은 포부를 담아 ‘현장 속으로, 시민과 함께’라는 슬로건을 발표했다. 지난달 30일 열린 전북자치도시군의회의장협의회 제284차 월례회에서는 임시총회에서 남 의장은 제9대 후반기 협의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는 전북 시·군의회를 대표해 도민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정책을 발굴하고 지역의 각종 현안 해결을 위해 앞장서겠다는 각오다. 취임 한달, 제12대 전주시의회 후반기를 이끌면서 시민 소통을 중심으로 현장 의정활동을 강조하고 있는 남관우 의장을 지난달 24일 전주시의회 의장실에서 만나 후반기 의회 운용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 -4선 의원 경력의 의장으로서 기대와 관심이 큽니다. 의장에 당선된 소감이 있으신지요. "저에게 전주시의회 의장이라는 중책을 맡겨주신 동료 의원님들과 65만 전주시민분들에게 깊은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의장은 의원들의 동지이고 든든한 울타리가 돼야 합니다. 특히 시민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의정에 반영하는 '소통의 중심'을 지켜야 하는 자리인데요. 동료 의원들이 의장으로 지지해준 것은 4선 의원의 경력을 바탕으로 선배·동료 의원과 초선 후배 의원들 사이에서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해달라는 의미라고 봅니다.” -제12대 후반기 전주시의회의 슬로건이 ‘현장 속으로! 시민과 함께!’입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언론계에서도 '현장에서 발로 뛰는 기자'를 최고라고 생각하듯이 의원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민의 선택을 받아 의정활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의원은 시민의 참뜻을 바로 듣기 위해 현장에 답을 찾습니다. 주민과 직접 소통하고 공감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다짐으로 슬로건을 정했습니다. 늘 현장에서 활동하고 시민과 소통하는 마음으로 뛰어야 시민이 살기 좋은 전주시를 만들 수 있고 신뢰받는 의회가 구현될 것입니다. 앞으로 전주시의회 모든 의원들이 시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중심 역할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 말씀은 의회및 의회사무국의 위상 제고와도 연결이 되는것 같습니다. 역대 의장들도 강조해 오셨고요. "의회 구성원은 의원과 의사국 직원들이고, 의원들은 의사국 직원들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습니다. 의사국 직원들의 인사권을 그동안 집행부의 장이 가지고 있었고, 2년 전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독립적 인사권을 부여받았습다. 하지만 인력 확충이나 인사 적체 문제 등 조직 자체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예산의 편성권도 독립되지 않아 지방의회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데 장애 요소가 많은 게 현실이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체 조직권과 예산편성권 등을 담은 지방의회법을 제정하도록 전국 단위 협의회와 중앙 정치권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건의하고 협의하겠습니다.” -의회와 집행부간 협치 관계와 의원들의 정책적 역량 강화를 위한 복안은 있으신가요. "시의 주요 현안을 추진하는 데 있어 의회와 집행부간 상호 협의와 공유 방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간 긴급 현안 발생시 의회를 건너뛰는 일이 적지 않았던 만큼, 주요 쟁정 사업과 긴급 현안과 관련해 집쟁부와 정책 협력 회의를 상설화함으로써 상호 대등한 협치 체계를 만들겠습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특별위원회까지 가동할 수 있도록 의회의 권한과 역할의 폭을 넓히고, 긴급현안질문 제도를 도입해 의정과 시정에 즉각 반영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생각입니다. 또한 의원들에게 필요한 맞춤형 정책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정책지원관제의 재정립과 보좌 인력의 시너지 효과가 충분하게 발휘되도록 노력할 것이고요. 의원 연구단체 활성화와 정책연구용역의 활용 폭도 넓힐 수 있도록 시스템 개선이 필요한 상황인데요. 이를 위해 대외적 정책역량 네크워크 확립을 위해 토론회와 세미나, 공청회 활성화를 위한 지원 예산을 확대하는 등 다각적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제12대 후반기 전주시의회 의정활동 방향도 궁금합니다. "후반기 의회의 방향성을 고민하면서 의회와 의원의 역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결론은 시민이 주인 될 수 있도록 뛰자는 것이었고, 늘 현장 가까이에서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이 발굴되고, 시민들에게 의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의원 동료들끼리 소통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인데요. 다양성을 가진 많은 의원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협력해야 지역의 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화합하는 의회를 꾸려나가려고 합니다. 의원 전원회의를 상시화해 의원 모두의 생각과 합의에 의해 의회의 목소리를 결정하고, 시에 주요 현안이 있거니 의회의 명확한 입장이 필요할 때 활용할 계획입니다. 또 의장실을 상시 개방하고 상임위원회간 협의 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회기별 상설회의제도로 적극 도입하겠습니다." -최근 시의회에서는 완주·전주 통합 관련 토론회를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완주-전주 통합을 어떻게 보십니까. "토론회는 찬반 성격보다는 양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주민 간 갈등 해소 방안과 상생협력 사업의 지속 추진 및 추가 발굴에 대해 머리를 맞대는 자립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를 통해 특별지방자치단체, 메가시티 등 급변하는 행정환경 및 흐름에 대비해 우리 지역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논의하며 상생을 도모할 것입니다. 통합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발전적 대안을 제시하고,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이 찬성과 반대를 논하기 이전에 해야할 일이라고 봅니다." -지역 발전을 위한 시민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전북일보 독자들과 시민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면. “전주시의회는 앞으로도 현장 의정활동을 통한 소통으로 시민 목소리를 경청하고, 시민의 뜻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정활동을 펼쳐나가겠습니. 이를 바탕으로 시민이 살기 좋은, 시민이 만족하는 전주를 만들어 나가는 시민과 함께하는 의회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때로는 날카로운 질책으로, 때로는 따스한 관심으로 의회와 함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남관우 의장은 완주 경천면 출신으로 전주완산고와 전북과학대학교를 졸업했다. 제8·9·10·12대에 걸쳐 전주시의회에서 4선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현장 속에서 시민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생활정치'를 강조해왔다. 2009년 집중호우로 인한 진북동 도토리골 어은골 침수 피해 당시 현장으로 가장 먼저 달려가 주민들을 위로하고 해당지역이 재해위험지구로 지정되도록 노력해 전주천 수해 지역 각종 침수 대비 사업 시행의 단초를 마련하기도 하는 등 '발로 현장에서 뛰는 의원'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2015년 '그리운 어머님'이라는 트로트 앨범을 내 가수로 데뷔한 독특한 이력이 있기도 하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전국 대의원, 전주시 이웃사랑자원봉사단 이사장, 전주 덕진구 발전포럼 회장, 전주시 생활법률지원단장을 맡고 있으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 직속 정무특보단 전주공동본부장과 도당 후쿠시마 원전오염수 해양투기저지 총괄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 기획
  • 김태경
  • 2024.08.04 15:1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⑫ 전봉준 상서∙동도창의소 고시문

● <전봉준 상서(全琫準上書)> : 반일투쟁을 위한 ‘민족적 대연합’ 추구 1894년 동학농민군의 반일투쟁을 시작하여 북상하던 전봉준이 논산에 주둔 중이던 10월 16일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글이다. 동학농민군의 반일투쟁 준비는 1894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제1차 봉기 때도 ‘척왜양(斥倭洋)’ 구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백성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탐관오리를 쫓아내자는 것이었다. 상황이 변한 것은 5월 초순이었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직후인 5월 초부터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출병하는 뜻밖의 심각한 상황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6월 이후에는 일본의 경복궁 강점과 청일전쟁 개전, 내정간섭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 일본의 침략의도가 점차 노골화하였다. 이에 따라 농민군 지도부의 관심은 폐정 개혁으로부터 일본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반일투쟁’ 쪽으로 급격히 선회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여 국가가 멸망한다면, 폐정개혁은 고사하고 백성들이 하루도 편히 살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재기포를 결심한 전봉준은 9월 10일경 전라도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반일투쟁’에 착수하였다. 삼례에서 재기병을 준비하던 전봉준은 1개월여를 삼례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추수가 끝나지 않아 군량과 농민군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 반일투쟁을 전개하기에는 농민군의 현실적인 역량이 취약하였다는 점 등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한편, 각지에 통문을 띄워 함께 기포할 것을 촉구하였다. 손화중과 최경선이 있던 광주와 나주에도 다녀왔으며, 김개남에게도 연락하였다. 또 각지의 관아에 반일투쟁을 알리는 통문을 보내 군수품 조달에 협조할 것을 촉구함과 동시에 인근 지역의 관아들을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다가 추수가 거의 끝났고, 북접에서 기포를 결정하였다는 통지를 받은 직후인 10월 12일경 북상을 개시하였다. 북상 당시 농민군은 약 4,000명이었고, 이들은 주로 전라우도의 농민군이었다. 손화중과 최경선도 원래는 공주로 함께 북상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내려온다는 정보를 접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 주둔하기로 했다. 김개남은 전봉준과 달리 청주 쪽으로 북상하였다. 10월 12일 논산에 도착한 전봉준과 휘하의 농민군은 이미 도착해 있던 이유상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북상하는 과정에서, 또 논산에 주둔해 있는 동안 합세한 인근 고을이나 북접 휘하의 농민군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세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공주 진격을 앞둔 10월 16일 전봉준은 양호창의영수(兩湖倡義領袖)의 자격으로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전봉준상서>를 보냈다. 이글에서 전봉준은 우선 ‘왜구(倭寇)’들이 침략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백성들을 혼란하게 하는 상황에서 대신들은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려는 생각에 위로는 임금을 위협하고 아래로는 일본 오랑캐와 결탁하여 백성들을 해치려 한다는 현 상황을 규탄하였다. 이어 초야에 사는 필부들인 농민들도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반일투쟁에 일어섰으니, 충청감사도 동참하여 ‘의를 위하여 죽을 것’을 요청하였다. 골육상쟁을 피하고 항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관군까지 포함하는 민족적 대연합을 추구한 것이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 동도창의소의 한글 고시문, 행간을 다시 읽는다. 갑오년 11월 12일 동도창의소 명의로 발포한 고시문은 특이하게도 한글로 되어 있다. 2차 봉기의 분수령이던 공주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전봉준 등 동학지도부가 정부군과 지방 감영군 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다.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5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동학란기록>(하권, 379~380쪽)에서였다. 이 고시문은 정부군의 진압보고서류 중에서 노획한 문서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편집자는 한글로 된 언문에다가 행간에 임의로 한자를 넣어서 의미를 분명하고자 하였다. 제목에서 ‘경군여영병이교시민’이라는 한글 문구를 ‘(京軍與營兵而敎市民)’으로 표기하여 ‘경군과 영병에게, 그리고 시민에게 가르친다’는 이상한 표현으로 변했다. 본래 언문 표현대로 하면, ‘경군과 영병, 향리(鄕吏)와 장교(將校), 시민에게’ 호소한다는 제목일 것이다. 고시문의 서두에는 개항 이래 조일 관계를 개관하면서 갑신개화파가 일본과 협력했다는 점을 거론하고, 1894년 갑오개혁파들이 왜국과 체결하여 경성에 들어와 군부(임금)를 핍박하여 국권을 마음대로 농단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 1894년 6월 21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금년 뉵월의 개화간당’이라고 지적하였다(국편 편집본에는 ‘금년 십월’로 오기). 또한 갑오개혁 정부가 인민을 무휼하지 않고 도탄에 빠지게한 상황에 대해 ‘왜적(일본)’을 초멸하고 개화를 제어하고 조정을 청평하여 사직을 안보하려고 봉기를 일으켰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이때 사용된 ‘척왜척화’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설왕설래했다. 국편 간행본에 ‘척왜척화(斥倭 斥華)’로 한자를 첨기하여 동학농민군의 대외인식을 반일본·반중화라는 배외주의로 오도하게 만들었다. 이에 의문은 느낀 정창렬은 한글본 원본 사진을 확인하여 한자 오류임을 밝혔다(<갑오농민전쟁 연구>, 박사학위논문, 1991). 결국 개화간당 비판과 관련되어 ‘척화(斥化)’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고시는 사실 조선 군대와 접전을 벌여 많은 인명이 상하게 되었다는 후회와 질책을 가하고 있다. 공주 우금치 전투 전후, 이른바 ‘조·일연합군’에 대항하여 조선사람끼지 서로 죽이는 골육상잔을 중지하자면서 “조선사람끼리야 도 혹은 다르나 척왜 척화라는 기의를 같이”하자고 했다. 동학농민군은 자신을 섬멸하려 하는 정부와 영군에게조차 민족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국권을 침탈하는 일본에 대항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그런데 고시문 표기 중에는 “□성상, □군부, □조정, 충□군우국” 등 조정과 임금을 상징하는 용어 앞에 한 칸을 띄어 쓰고 있다. 이는 당시 국왕이나 국가를 우선시하는 관행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동학농민군의 의식 속에는 조선왕조의 통치질서를 그대로 긍정하는데 머물렀다고 해석될 수는 없다. 앞서 공포된 <선유방문 한글 고시문>에서 “우리 성상이 극히 인자하시니 어찌 너희를 죽이랴 하시리오”라고 하여, 백성을 적자(赤子)로 인식하는 고종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고시문은 고종 윤음이나 농민군 진압의 방침을 정면 반박하려고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고시문의 전후 맥락은 갑오 11월 12일 같은 날에 배포한 정부군의 탄압책을 비판하는 <고시문(示京軍營兵)>과 바로 연결되고, 순무영에서 배포한 고시문(한문 및 언문)에 대한 전면 거부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고시문은 조선사람끼리 동족상잔을 이제 그만두고 인민의 생명과 생존을 존중하자는 눈물겨운 호소를 담고 있다. 나아가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다는 면에서 반전 평화 휴머니즘까지 느낄 수 있다. 원본 자료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아카이브에 유리필름 사진 형태로 제공되고 있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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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1 15:50

[참여&공감 2024 시민기자가 뛴다]인구감소와 지방소멸 위기, 그리고 전북의 미래(하)

전북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위기가 심각하다. 출생아 수가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서울·경기 등 수도권으로의 청년인구 유출도 지속되고 있다. 또한, 전북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관련 교육·의료·주거·교통·생활편의 측면에서 주민 삶의 질이 저하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중앙정부·지자체 정책을 검토한 뒤, 국내·외 사례를 바탕으로 전북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대응을 위한 전략 및 정책과제를 제시한다. △중앙정부 및 지자체 정책과 한계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 따르면 정부는 ‘05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한 뒤 ‘06년부터 ‘23년까지 저출생 대응 명목으로 약 380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였으며, ‘23년 한 해에만 47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였다. 하지만, 매해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23년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을 기록했다. 통계 지표상으로 지난 20여 년간의 정부 저출생 대응 정책의 효과성이 크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또한, 지방소멸과 관련하여 행정안전부는 ‘21년 전국 89개 시·군·구를 대상으로 인구감소지역을 지정하고 특례를 부여하였으며 지방소멸 대응을 위한 사업들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정부의 여러 지방소멸 대응 정책 중 이슈가 되는 것은 ‘지방소멸 대응기금’이다. 최근 국회 예산정책처의 ‘2023 회계연도 결산 위원회별 분석 보고서(2024)’에 따르면 “지역별 특색없이 유사한 사업이 획일적으로 추진되거나 나눠먹기식으로 재원이 배분된”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파크골프장, 야간조명, 음악분수와 같이 기금 취지에 맞지 않은 사업, 단체장 공약과 같은 단기적인 사업, 기금 재원 부족 등 지방소멸 대응기금의 한계와 실효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중앙부처뿐만 아니라 지자체에서도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대응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지자체의 출산지원정책 예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출산장려지원금’이다. 국회 예산정책처의 ‘인구위기 대응전략 보고서(2023)’에 따르면 ‘22년 기준 국내 지자체 중 출산장려지원금을 지원하는 지자체는 총 213개이며, 예산 규모는 5735억원으로서, 전국적으로 매년 출산장려지원금 규모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출산장려지원금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큰 편이며, 지자체 간 경쟁이 과열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북 지역의 지방소멸 위기 대응을 위한 전략 및 과제 전북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문제는 출생아 감소 등 자연감소와 더불어 수도권으로의 인구 유출 등 사회적 감소로 인한 영향이 크다. 그러므로 정부에서 추진하는 저출생 대응 정책을 기본으로 하되 지역 외부로의 인구 유출을 줄이고, 신규 인구 유입은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역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이 지역에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면 수도권이나 대도시에 가지 않고도 청년들이 원하는 다양한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고, 삶 전반에서 청년들이 지역에서 매력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문제는 단기적으로 한두 가지 정책을 추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교육·의료·주거·교통 등 여러 분야의 정책들을 종합적으로 추진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협력적 거버넌스가 반드시 필요하다. 다음은 협력적 거버넌스를 바탕으로 전북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위기 대응을 위한 5개의 정책 패키지들이다. 첫째, ‘작은 학교 살리기 사업’을 통해 폐교 위기의 학교를 살리고, 학생 및 학부모 신규 인구 유입으로 인구감소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경남 작은 학교 살리기 사업은 경남도, 경남도교육청, LH공사가 협력하여 학교를 중심으로 소멸 위기의 마을을 되살리는 프로젝트로서, 각 기관이 5억씩 총 15억원의 예산을 지원하며, 교육청과 학교는 특색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지자체는 일자리 연계와 입주민 융합프로그램을 운영하며, LH에서는 임대주택과 편의시설을 건립하였다. ‘20년부터 시작하여 함양군 서하초, 고성군 삼산초 등 10개 지역에서 사업을 하였고, 251명(57가구)이 이주하는 성과가 있었다. 이 사업은 ‘교육’, ‘주거’, ‘일자리’관련 대안을 제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마을교육공동체’를 통해 학령기 아이들의 교육과 방과 후 돌봄을 지원함으로써 농어촌 지역을 아이 키우기 좋은 지역으로 만들 수 있다. 완주군 고산면은 ‘11년 설립한 고산향교육공동체를 중심으로 숟가락 공동육아, 고산청소년센터 고래 등의 단체가 활동하고 있고, 마을교육 및 방과 후 돌봄 관련 풀뿌리 교육지원센터, 완주미래행복센터와 같은 지원조직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완주 고산 지역은 주민, 학부모, 학교가 공동으로 학생들의 배움을 위해 협력하고 연대하는 마을교육생태계를 구축해왔다. 이와 같이 완주 고산은 10년이 넘는 마을교육 운동을 통해 전국적인 마을교육공동체 모델이 되었으며 ‘교육’, ‘돌봄’, ‘공동체’가 어우러진 지방소멸 대응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셋째, 지역으로 이주하는 청년, 시니어, 귀농·귀촌인 등의 지역 체류 및 정착을 맞춤형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일본 도쿠시마현 가미야먀 마을은 인구 5천명 규모의 산골마을로서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마을에 신규 인구가 전입할 수 있도록 이주교류지원센터를 설립하고, 마을에서 살아보는 체류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또한, 마을에 들어온 사람에게 빈집 정보를 제공하고, 빈집을 고쳐 사무실로 개조하고, IT 기업 등 위성사무실을 입주시켰으며, 기업들이 편하게 원격 근무를 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하였다. 그 결과 2008년부터 2016년까지 8년간 91세대 161명이 이주하였고, 위성사무실 16개소가 입주하였다. 가미야마 마을 사례처럼 지역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와 인프라를 제공함으로써 지역 체류와 정착을 도울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주거’, ‘빈집’, ‘청년’,‘일자리’, ‘교육’문제에 종합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넷째, 빈집, 빈점포 등을 리모델링하여 카페, 숙박시설, 문화공간 등으로 활용하여 빈집 문제를 완화하고 지역을 활성화할 수 있다. 공주 봉황동 마을호텔, 정선 고한 마을호텔 18번가 등은 빈집과 빈점포를 활용하여 게스트하우스로 조성하고, 마을에 있는 카페, 식당 등은 호텔의 편의시설로 연결한 사례이다. 또한, 부여 자온길 프로젝트는 빈집을 서점, 찻집, 양조장, 공방 등으로 조성하여 새롭게 재탄생시켰다. 여러 사례와 같이 인구감소지역 내 빈집, 빈점포에 대해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으며, 빈집을 숙박시설로 활용할 때 규제 완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도시 지역의 경우 ‘외국인관광 도시민박업 내국인 숙박 특례’관련 도시재생 활성화지역 내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에 대해 특례 확대 적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농어촌 지역 내 민간 버스 회사에서 노선을 폐지한 교통 소외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이동권 보장을 위해 공공에서 재정을 보조하는 마을버스와 마을택시 운행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으며, 음식료품 소매점이 없는 농촌마을을 대상으로 차량을 통한 이동편의점을 운영하여 주민 생활불편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이동편의점 민간 사례로는 ‘11년부터 전남 영광군에서 이동형 마트 트럭으로 매주 2회씩 42개의 마을을 운행하며 생필품과 식료품을 판매한 동락점빵 사회적협동조합이 있으며, 농식품부에서도 올해 7월부터 시범사업으로 지자체, 지역 농협과 협력해 농산물 등을 트럭에 실어 농촌마을로 배달하고 판매하는 ‘가가호호 농촌 이동장터’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업들을 통해 ‘교통’, ‘생활편의’, ‘돌봄’ 등의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지방소멸. 말그대로 소멸은 아니지만... 농어촌 및 지방중소도시의 인구가 감소하면 민간 및 공공에서 생활인프라와 서비스를 감축하게 되고, 서비스가 줄어들면 주민들의 삶의 질과 정주여건은 더 악화되게 된다. 그러면 일부 주민은 더 나은 거주지를 찾아 이주하여 인구가 유출되고, 지역의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은 가속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물론 지방소멸이라고 하여 그 지역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역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고령화가 가속화되면 경제·산업, 지방재정 측면에서 큰 타격을 받고 자족기능을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대응 정책은 중앙정부보다 현장에 가까이 있는 지자체의 역할이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자체에서는 기존 수립한 정책의 효과성을 점검하고, 보다 실효성있는 정책이 될 수 있도록 지역사회 내에서 라운드테이블과 같은 논의의 장을 마련하여 여러 사람들의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장우연 독립연구자, 전) 전주시 정책연구소 연구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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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31 15:18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실크로드의 미스터리 보물 (2)

문무왕(文武王) 비문과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 신라 김씨의 조상으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투후(秺侯) 김일제(金日磾). 최근 필자는 김일제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감숙(甘肅)성 무위(武威)시를 답사하였는데 이곳에 금년 8월 김일제 광장이 오픈하고 내년에는 <김일제기념관>이 개관한다. 그런데 이제까지 흉노 출신으로 알려져 온 김일제의 신분에 대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즉 흉노가 아니라 그리스에서 출발해 파르티아(Parthia)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감숙(甘肅)성 일대에서 살았던 그리스-박트리아 왕실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격적인 주장은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 제323굴 '장건의 서역 사신 출행도(張騫出使西域圖)'에 보이는 황금 조각상이 불상이 아니라 제우스(Zeus)상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소개한다. △ 김일제(金日磾)는 누구인가? '신라 문무왕릉 비문'에 “투후 [김일제]는 제천의 후손(秺侯祭天之胤)”,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 “먼 조상 이름은 일제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遠祖諱日磾自龍庭歸命西漢仕武帝)”는 명백한 기록이 남아 있어 신라 김씨의 시조로 간주되기도 하는 김일제(金日磾, B.C135-85)는 한무제(漢武帝)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파견한 장수 곽거병(霍去病)에게 사로잡혀 말을 사육하는 노예가 된 인물이다. 그후 김일제는 한무제의 암살을 막아낸 공적으로 발탁되고, 한무제는 흉노족이 황금을 유난히 숭상하는 것을 고려해 ‘황금’을 뜻하는 금(金)씨 성을 하사받아 김씨의 시조가 된다. 또한 흉노 출신의 그가 사육하는 황실 말들이 살찌고 뛰어나자 대장군 다음으로 높은 직책인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고 투후(秺侯)에도 봉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투후(秺侯)라는 용어는 김일제의 가계 왕국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 한무제의 군대가 약탈해 온 황금 조각상 BC 121년 한무제(漢武帝, BC 157-87)는 장수 곽거병을 보내 흉노 휴도왕을 토벌했을 때 태자 김일제는 포로로 잡혀와 노예가 되었는데, 그밖에 무슨 일이 있어났을까? 이에 대해 돈황 막고굴 제323굴 벽화 '장건의 서역 사신 출행도(張騫出使西域圖)' 방제(榜題)에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적혀 있다. “한무제가 흉노를 정복하고 10척 높이의 황금 조각상 두 개를 획득하여 감천궁에 안치하였다. 황제는 이를 위대한 신으로 모셔 늘상 참배하였다.(漢武帝將其部眾討匈奴,并獲得二金長丈餘,列之于甘泉宫。帝為大神,常行拜謁時.)”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한무제가 약탈해 와서 스스로 참배했다는 흉노 휴도왕의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황금상이다. 이제까지 이 황금상에 대해서는 한서(漢書) 주석가 장언(張晏), 유의경(劉義慶), 위수(魏收) 등이 “불교도들이 섬기는 황금상(佛徒祠金人), 불교의 유통으로 인한 전파(此則佛道流通之漸也)”로 해석하여 불상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한무제 시기에 간다라 양식의 불교 조각은 아직 중국에서는 유행하지 않았고, 특히 3미터에 달하는 두 개의 불상을 황실에 모셔 놓고 참배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흉노 휴도왕의 섬겼던 황금상은 불상이 아닌 다른 조각상일 가능성이 크다. 이 조각상은 그리스-박트리아 신상으로 제우스가 니케나 아테나를 들고 있는 조각상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애당초 휴도왕과 김일제는 흉노족이 아닌 그리스 박트리아계 외국인으로 이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 휴도왕과 김일제는 외래어의 한자 번역 휴도왕의 '휴도(休屠)'는 외국어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휴(休; '쉬다', '멈추다')와 도(屠; '학살') 두 글자는 중국어로는 '학살을 끝내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어로 '구원자'를 의미하는 '소테르(Σωτήρ, Soter)'가 휴도의 원래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김일제(金日磾)의 ‘일(日)’은 중국에서 ‘rì’로 읽히지 않고 ‘mì’로 읽힌다. ‘일(日)’자가 ‘밀(密)’ 혹은 ‘밀(蜜)’자와 관련되어 ‘mì’로 읽히는 의문을 풀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노력했으나 아직까지도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으나 외래어로 해석할 때 실마리가 풀린다. 즉 ‘일(日)’자의 이독(異讀)은 외래어 ‘밀(密)’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밀(密)’은 ‘태양’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외래의 역일(曆日)과 관계가 있으며, 소그드어에서 태양을 의미하는 ‘mīr’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제(磾)’는 고대에 증(繒)을 염색하는 데 사용한 검은 돌을 의미한다. <북사(北史)>의 기록에 따르면, 북방 호인(胡人)들은 "증(繒)으로 모자를 만들고(以增为帽)", "검은 색으로 모자를 만들었다(以皂为帽)" 즉 검게 염색한 증(繒)으로 모자를 만들어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휴도왕과 아들 김일제는 흉노 아닌 그레코-사카인 미국학자 루카스 크리스토풀로스(Lucas Christopoulos)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레코-박트리아인(Greco-Bactrians)인 즉 그리스-사카인(Greco-Sakas)들이 BC 176-162년경 감숙(甘肅) 일대에 남아 있다 흉노가 통제권을 장악하자 예속되었고, 후에 선비족이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했을 때는 다시 그들의 대열에 포함되게 되었다. 놀랍지만 휴도왕은 그리스 박트리아 왕으로 유티메모스(Euthydemus) 왕조의 창시자였고, 김일제는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Demetrios)였을 가능성이 있다. 감숙성과 신강 일대에서 출토된 수많은 헬레니즘 문물들은 단순한 상품 거래를 넘어 그레코-박트리아인들이 이 지역에서 종교적 문화적 관습을 유지하며 살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흉노가 아닌 그레코-박트리아 출신 김일제가 어떻게 신라 김씨의 시조가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 의거해 추론하면, 그레코-박트리아인 김일제 일가가 한나라 때 난리를 피해 요동(遼東) 지역 특히 산동과 한반도 낙랑 지역으로 피신해 왔다가 다시 신라 경주 일대로 옮겨 왔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향후 좀더 깊이 있는 연구와 구체적인 실증이 필요하다. (참고 자료: Lucas Christopoulos, 'Dionysian Rituals and the Golden Zeus of China', <SINO-PLATONIC PAPERS>(326), 2022.)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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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9 14:5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⑪<흥선대원군 효유문> : 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

<흥선대원군 효유문>은 1894년 8월~9월에 걸쳐 전국 각지에 전달된 문서로 대원군이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즉각 해산할 경우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필사본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으며, <수록>, <미나미 고시로 문서>, <소모사실>(정의묵), <뮈텔문서> 등의 자료에도 수록되어 있다. 각 문서에 따라 일부의 글자에 차이가 있으나 내용은 동일하다. <효유문>을 내린 날짜도 <수록>과 <뮈텔문서>에는 ‘개국 503년(1894) 8월’로 되어있고, <소모사실>에는 ‘개국 503년(1894) 9월 10일로 되어 있다’.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명하는 이 효유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문서 자체의 진위 문제, 그리고 대원군의 원래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다. 이는 대원군과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 간의 관계에 대한 논란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에 대한 이해와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효유문>은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전봉준과 대원군 간의 ‘밀약설’은 동학농민혁명 당시부터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제기되었으며, 대원군이 실권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일제시대에도 대부분의 글에서 이 문제가 언급되어 왔으나, 1945년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양자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100주년을 맞은 이후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새로운 연구들이 발표되면서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었음은 거의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전봉준과 대원군이 언제부터 관계를 가졌고, 또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다. 대원군과 동학과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이미 1893년 2월 동학교도들의 광화문 복합상소가 일어났을 때부터 중앙정계와 서울에 주재하던 각국의 외교관들 사이에 동학교도의 배후에는 대원군이 있다는 소문이 돈 바 있다. 또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도 이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해두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발발 이후 동학농민군의 요구에 대원군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4월 16일 영광에서 '창의소' 명의로 완영유진소(完營留陣所)에 보낸 통문이다. 이때 농민군은 자신들의 의거가 “탐관오리를 개과혁신케 하고 국태공(國太公)을 감국(監國)케 하여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데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어 4월 18일 함평에서 나주 공형(公兄)에게 보낸 통문과 4월 19일 초토사(招討使)에게 보낸 정문(呈文), 5월 4일 역시 초토사에게 보낸 소지(所誌)와 그 무렵부터 제시한 27개조의 폐정개혁안 등에서 대원군의 섭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2차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에도 대원군 측이 보낸 밀사들과의 만남을 비롯하여 몇 차례 직간접적인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료들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과 대원군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음을 추측케 하지만, 언제부터, 또 어떤 관계였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다만 여러 자료를 통해 볼 때 대원군은 1894년 6월 21일의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 강제 점령을 계기로 집정한 직후부터 이미 농민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를 위해 준비해 나갔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 언론이나 일제시대 일본인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봉준이 대원군의 사주를 받았거나 대원군의 비호를 기대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전봉준 혹은 농민군 측에서 대원군을 이용하려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지도부는 동학농민혁명에 임하기 이전부터 ‘반봉건’ 뿐만 아니라 ‘반외세’의 과제를 동시에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이러한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일찍부터 다양한 세력과의 연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대원군을 접촉한 의도도 대원군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가장 풍부한 기사를 생산한 일본 「二六新報」의 1894년 11월 14일자에는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동도가) 그들이 믿는 대원군과 미리 기맥을 통하였느냐 여부는 의문이지만, 전봉준의 인물됨으로 미루어 보면 그의 처음 기포가 반드시 대원군을 기대하였기 때문은 아님이 명확하다. 다만 그의 지략이 풍부하고 동도의 의기(義氣) 역시 한계가 있으므로 이에 대원군이라는 목상(木像)을 대중의 눈앞에 세움으로써 조종(操縱)의 편리로 삼으려 한 것 같다.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에 임할 때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란을 일으킨 다음 그 힘을 모아 전주감영을 점령하고, 나아가 매관매작을 일삼는 민씨 척족세력을 타도하면 팔도가 하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중들은 고을범위를 벗어나는 ‘반란’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자신들의 행위가 ‘반란’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노력하였다. 아직 반란의 대열에 동참하기를 꺼리던 민중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지지기반의 확대를 도모한 것이다. 이 점에서 대원군은 중요한 전술적 가치가 있었다. 대원군은 이미 실세한 정치가로 1885년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운현궁에 유폐된 채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국왕의 아버지이자 당시 대중들로부터 가장 호평을 받던 정치가였고, 또 이미 10여년간 섭정을 한 경력이 있으며, 임오군란 시에도 일시적으로 섭정을 하여 정권을 장악한 경험이 있는 등 대중적 신망을 한 몸에 안고 있었다. 전봉준은 이러한 대원군을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이 결코 반란이 아님으로 강조할 수 있었다. 이점은 5월 4일 홍계훈에게 보낸 <피도소지(彼徒訴志)>에서 “국태공을 받들어 나라를 맡기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거늘 어찌 불궤라 하느냐”라고 한데서도 엿볼 수 있다. 또 전봉준은 생각과 행동은 대원군의 농민군 동원기도나 ‘정변계획’과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전봉준이 제2차 기포를 결심하게 된 데는 농민군의 기포를 요구하기 위해 보낸 대원군 측의 밀사와 접촉한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이 보낸 밀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일본군의 일본의 침략의도와 일본군이 진압하러 온다는 계획, 일본이 친일적 개화파를 내세워 내정개혁을 추진하려 하나 그 진의가 의심스럽다는 점 등 중앙정국의 동향과 청일전쟁의 추이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원군이 농민군의 재기포를 요구하는 밀사를 파견한 직후 또 다시 <효유문>을 보내 농민군의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전봉준으로서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재차 봉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 사실을 알고 나서도 중앙정국의 동향과 청일전쟁의 추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재기포를 유보하여 왔으나, 대원군 측의 밀사를 통해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전봉준으로서는 농민군의 역량이 일본군에 맞서기에는 취약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국가가 멸망하면 생민이 어찌 하루라도 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국가와 멸망을 함께할 결심”으로 반일항쟁을 시작한 것이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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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5 16:59

[팔도 핫플레이스] 천혜의 비경 고군산군도⋯힐링‧체험‧즐길거리 다 있다

군산은 항구도시다 그 만큼 바다를 활용한 관광자원이 풍부하다는 의미다. 이 중 고군산군도는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 해상관광 자원이다. 고군산군도는 ‘신선이 놀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예부터 크고 작은 섬들과 바다 그 사이의 개성 있는 기암괴석들이 연출하는 경관이 훌륭해 ‘천혜의 비경’ 으로 불리고 있다. CNN은 지난 2022년 48개 국가로 구성된 아시아 대륙 곳곳의 관광명소를 설명하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숨은 관광명소 18곳을 발표했는데,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고군산군도가 이름을 올렸다. CNN은 고군산군도에 대해 “도심을 벗어나 휴양을 즐기려는 이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고 소개했다. 이곳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2023~2024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명소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사계절 어느 때에나 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고군산군도다. 특히 자연경관뿐 만 아니라 힐링과 체험, 즐길거리도 가득해 가족과 연인, 친구 등과 추억 쌓기에도 제격이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백사장 '선유도 해수욕장' 군산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50㎞ 떨어진 해상에 위치한 고군산군도는 선유도를 포함해 신시도‧무녀도‧ 방축도 등 63개 섬이 펼쳐져 있다. 이 중 16개 섬이 유인도로 인구는 약 2000명이다. 특히 선유도와 신시도·무녀도·장자도·대장도의 경우 ‘바다가 육지라면’의 노랫말이 현실로 된 섬들이다. 2017년 새만금방조제와 고군산연결도로가 개통되면서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접근성이 좋아졌다. 이런 가운데 고군산군도 대표적인 곳이 선유도 해수욕장이다. 선유도 해수욕장은 파도가 높지 않고 수심도 얕아 물놀이하기에 좋은 해수욕장으로, 육지섬이 되기 전부터 여름철 피서지로 많은 방문객이 찾던 곳이다. 모래입자가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운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다고 하여 명사십리 해수욕장이라고도 한다. 선유도 해수욕장의 중심에 자리잡은 명승(국가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뛰어나게 아름다운 경관) 망주봉은 선유도만의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 해수욕을 즐기는 피서객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곳 해수욕장은 8월 18일까지 운영하며, 개장기간 중 비치 파라솔과 구명조끼, 실내 샤워장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수려한 경관에 짜릿함을 더하다 선유도에서 명사십리 상공을 가로지르는 익사이팅 체험은 빼놓을 수 없는 즐길거리다. 선유도의 대표 익사이팅 체험시설인 선유스카이썬라인은 높이 45m로, 선유도 해수욕장 입구에서부터 망주봉 입구에 위치한 조그만 솔섬까지 700m를 케이블에 매달려 하강하는 시설이다. 짚라인을 타고 상공에서 내려다본 명사십리 해변은 하트 모양을 띄고 있어 연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짚라인의 종착지인 솔섬에서 옛시절 선유도에 유배된 선비가 망주봉에 올라 한양 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하였다는 설화를 떠올리며 망주봉과 명사십리 해변의 경관을 잠시 감상하는 것도 선유도 해수욕장만의 색다른 매력을 즐기는 방법. 부드러운 돌들이 가득 ‘옥돌해변’ 선유도의 옥돌해변은 선유1구 마을에 위치한 작은 해변으로 모래사장이 아닌 부드러운 옥돌과 주변의 기암괴석들이 연출해내는 풍광이 아름다워 점차 입소문을 타고 있는 명소다. 해안절벽에 데크길이 조성되면서 산책하기가 좋으며, 아기자기 작은 섬들과 해변이 연출하는 경관이 아름다워 마을에서는 '신선둘레길'이라고도 부른다. 햇빛에 반짝이는 돌들이 가득한 해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일상에서 한가로운 정취를 즐겨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이자 힐링이다. 옥돌해변과 해안산책로에서 바라보는 선유도의 노을 또한 아름다워 낮시간 해수욕을 마치고 해질녁 방문하는 것도 추천되고 있다. ◇바다 위도 걷고 대장봉 배경삼아 인생 컷도 찍고 선유도와 장자교를 연결하는 장자교스카이워크는 1986년 개통됐던 장자교를 지난해 스카이워크로 새롭게 리모델링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장소이다. 바다 위 투명유리 위에서 대장봉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장자도 천년데크를 지나 대장봉에 오르면 고군산군도의 풍광이 한눈에 펼쳐진다. 대장봉 정상에서는 고군산군도의 절경을 360도 모든 방향에서 전망하며 신선이 된 듯한 감상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숨은 매력으로 꼽히고 있다. 해질녘 전국 최고의 노을명소 ‘선유낙조 ’ 낮시간 시원한 물놀이와 짚라인 체험을 즐겼다면 해질녘 고군산의 노을 감상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고군산군도의 아름다운 절경 8선을 이르는 ‘선유8경’ 중 제1경은 ‘선유낙조’이다. 또한 망주봉은 낙조의 아름다운 경관 가치를 인정받아 명승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선유도의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고군산군도 어느 지점에서나 노을 감상이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명사십리 해수욕장과 솔섬데크, 장자교스카이워크, 옥돌해변 명품 데크길 등을 명소로 추천한다. 유람선 타고 고군산 바다 누비다 바다와 좀 더 가까이 하고 싶다면 유람선을 타면 된다. 선유도에서 유람선에 오르면 1시간 남짓 선유도-장자도-관리도-방축도-명도에 이르는 고군산 해상을 유람하며 육지에서와는 또 다른 모습의 고군산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갈매기떼를 만나고, 운이 좋다면 갈매기와의 인증샷도 남길 수 있다. 주요 관람 포인트별로 진행되는 선장의 간단한 설명은 유람여행의 재미를 더한다. 육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말도-보농도-명도, 광대도-방축도를 연결하는 해상인도교와 인어상(방축도)‧독립문바위(방축도)‧ 거북바위(횡경도) 등 고군산군도의 명물을 만나는 기회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K-관광섬으로 떠오른 말도‧명도‧방축도 섬여행의 매력을 오롯이 느끼고 싶다면, 장자도 선착장에서 고군산군도 서쪽으로 향하는 여객선에 몸을 실으면 된다. 관리도‧방축도‧명도‧말도 등 고군산 서쪽 섬들은 장자도에서 불과 15분~30분이면 갈 수 있다. 군산항에서는 2시간~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캠핑족이라면 해안절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관리도 캠핑장에서 백패킹을 즐겨보자. 고군산 섬트레킹 1번지 방축도는 산책로를 따라 무인섬 광대도와 연결된 출렁다리까지 트레킹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출렁다리에서 내려다보는 독립문바위의 경관과 광대도까지 건너가며 즐기는 아찔한 체험은 방축도 여행의 재미난 요소이다. 명도에서는 마을 산책로를 따라 오진여 전망대와 구렁이 전망대로 갈 수 있으며, 구렁이 전망대에서는 말도와 보농도가 한 눈에 보인다. 간조 시에는 무인섬 광대도까지 바닷길이 열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고군산군도의 끝섬 말도에서는 1909년 설치되어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말도 등대와 바위섬 정상의 한 그루 소나무 천년송, 해안절벽의 습곡구조 등 이색 볼거리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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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환규
  • 2024.07.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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